비구니 인명사전

혜해(慧海)스님

biguni
Daramsalra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2일 (일) 18:28 판 (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혜해(慧海)스님 |사진=400px |법명=혜해(慧海) |법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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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말사 신계사에서 출가하, 남하후 신라시대에 이차돈 순교성지이자 흥륜사 터가 있는 천경림에 천경림선원을 개원하여 구도정진과 후학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북한의 신계사 복원에 기여하였으며, 현대 금강산 선수행의 마지막 주자로 꼽히는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1921 평북 정주 출생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금강산에서 남하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

활동 및 공헌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

은사스님의 신통력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스님은 잠깐의 이별이 은사스님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 그리고 25세에 향곡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香谷)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

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

입적

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

혜해스님의 사리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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