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각스님(妙覺, 1942生, 비구니)
묘각(妙覺)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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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묘각(妙覺) |
법호 | 휴암(休庵) |
속명 | 김봉점(金鳳点) |
출생 | 1942.03.23. |
출가 | 1965년 |
입적 | |
사찰 | 봉곡사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59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묘각스님은 봉곡사 주지로 가람정비를 한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으로 경륜스님의 은사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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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경남 산청 출생 |
1965 | 법진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6 |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8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0 | 양진암 안거 성만 |
1972 | 윤필암 안거 성만 |
1977 | 아산 봉곡사 주지 취임 |
1985 |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90 | 봉곡사 문화재 지정 후 가람 중창 불사 시작 |
1995 | 만공탑 조성 |
2004 | 봉곡사 주지 취임 |
2015 | 충남 아산 남산 보각사 주지 |
문중 | 육화(六和)문중 |
수행지침 | 스스로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를 초월한다. 자성自性의 빛으로서 일체의 행이 단번에 구족된다. |
생활신조 | 방일(放逸)하지 말고 공부하자. |
상훈 | 본사 마곡사 가람 정비 수호 감사패 (1994) |
취미 | 운동, 국선도, 태극권 |
수계제자 | 지성(知性)·경륜(景輪)·일미(一味)·돈경(暾坰) |
활동 및 공헌
출생
휴암(休庵) 묘각(妙覺)스님은 1942년 3월 23일 경남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 상동부락에서 아버지 김인경과 어머니 민시남 사이의 2남 5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봉점이다.
동네에서 딸 부잣집으로 소문난 스님의 집안은 유교사상을 따랐고, 아버지가 직조공장을 운영하여 유복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학교를 몇 달씩 못 다니기도 했으며 학질 등 자질구레한 병치레가 잦았다.
호랑이가 여동생 허리를 물고 가는 꿈
그런 가운데 스님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꿈으로 자주 나타났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다섯 자매가 목욕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찾기에 나가 보니 큰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이 집에 딸이 많다는 말을 듣고 딸 하나를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님은 호랑이의 그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다섯 중에 하나를 골라 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스님이 동생들을 돌아보니 다들 예뻐서 줄 수가 없었는데, 고민 끝에 그 중 스님과 사이가 덜 좋았던 둘째 동생을 주며 데려가라 하자 스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랑이가 둘째의 허리를 덥석 물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호랑이가 동생을 물고 가버리자 스님은 속상한 마음이 들어 호랑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이 그런 꿈을 꾼 다음날 묘하게도 둘째 동생이 허리를 붙들고 아파 죽을 것 같다며 울기 시작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인지라 어쩔 줄 모른 채 집에 있던 약만 먹이며 낫길 바라다가 일주일이 지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니 맹장이었다.
스님은 그날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동생의 하얀 인조 옷을 입고 학교에 가려다 문득 동생이 죽을 날이니 그 옷은 동생을 위해 그냥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걸어두고 평상시 입던 꼬깃꼬깃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수업을 받으면서도 무언지 모를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2교시가 끝나자 선생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이 집에 도착하여 보니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목에서 심한 가래가 끓어 고통을 호소하던 동생은 허공을 보며 안 간다고 소리를 지르다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동생을 잃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슬픔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스님의 꿈에 동생이 나타났다. 말을 타고 나타난 동생의 모습은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스님이 ‘어디 있다 왔느냐. 고 반갑게 묻자 ‘용궁에서 지낸다.’고 대답하고는 가지 말라는 스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은 홀연히 떠나가버렸다.
이는 자신이 좋지 못한 꿈을 꾸어 동생한테 해를 끼친 게 아닌가 싶어 늘 고통스러워한 스님을 안심시키려는 동생의 뜻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법거량하는 꿈
또 한 번은 스님이 하얀 냇가를 걸어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보이기에 타고 올라가니 깨끗한 은모래가 깔려 있고, 가로수처럼 쭉 쭉 뻗은 과일나무가 아름답게 펼쳐진 길이 나왔다. 길을 가다 보니 큰 절이 나왔는데, 그 모습이 꼭 탱화에 있는 그대로였다.
탱화에 나오는 대로 거문고와 비파 등을 타는 보살들이 마치 대중공사를 하듯이 엄숙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은 당신의 자리라고 여기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스님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법거량이 시작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경책 하는 등 열띤 논쟁을 벌이다 하늘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오니 그 젊던 어머니가 백발이 되어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읽고
스님은 어려서부터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늘 조용한 곳을 좋아했으며, 사색하기를 즐겨하였기에 책읽기가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수녀님을 만났는데 한눈에 동경심이 일어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성모경을 너무 열심히 읽다 보니 저절로 외워져 비몽사몽간에도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수녀가 되리라 마음먹고 더욱 깊은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수녀님이 결혼하기 위해 환속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스님은 맹목적인 신앙에 차츰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공허감을 달래고자 손에 잡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읽게 되었다. 나중에는 철학책까지 독파하였으나 그 큰 공허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면서 불교란 무엇이며, 깨달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무수한 상념들 속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인천 용화사에서 출가
1965년 2월 7일, 마침내 스님은 아버지께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의외로 아버지는 묵묵히 딸의 얘기를 듣고 흔쾌히 허락하셨다. 더 나아가 이름난 큰스님을 알아봐주며 곧장 용화사로 찾아 가도록 도와주셨다.
스님은 용화사에서 전강 큰스님을 뵙게 되었는데 “결혼이나 하지 왜 중이 되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저 본능대로 제 짝을 찾아내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1965년 2월 7일 인천 용화사에서 법진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하고, 수행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66년 범어사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68년에는 범어사에서 다시 석암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출가 후 스님은 부모님을 생각하는 속세의 정이 워낙 깊었던 나머지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이 화가 되어 신경성 장염을 앓게 되었다. 이후 스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굳건한 신심으로 평안을 찾았지만 육신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수행
그러나 그토록 지독한 병마도 구도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스님은 1970년과 1972년 두 번에 걸쳐 양진암과 윤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리고 1985년 동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함으로써 중도에 그만두었던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또한 끝없이 솟구치는 열정으로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화두참구를 하였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다 보니 더 이상 체력이 버텨내질 못했다. 몸이 지치자 덩달아 마음까지 지쳐 결국 병을 얻게 되었다.
심장발작으로 혼절했을 때 문수보살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
1988년경 어느 날이었다. 10시 방선 후 스님은 대방에서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을 잃는 찰나, 스님의 영혼이 몸속에서 빠져나와 윗목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님의 영혼은 선방스님이 혼절한 스님을 발견하고 죽었다고 소리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몸속으로 되돌아가기가 어렵겠다며 체념하는 듯했다.
그런데 잠시 뒤 대중방에 모셔져 있던 문수보살님의 등신불이 내려와서 누워있는 스님의 오른 쪽에 앉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었다. 이에 문수보살님이 자신의 영혼이 몸속으로 들어갈 기회를 주시는 거라고 생각한 스님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게 되었다.
그 문수보살님은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불상으로서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한 듯 고개를 숙이고 계신 모습이었다. 이를 항시 안타깝게 여겼던 스님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가운데서도 무의식적으로 문수보살님의 목을 펴드렸는데, 스님이 깨어나서 살펴보니 문수보살님이 고개를 든 채 환히 웃고 계신 듯했다고 한다.
이후로 스님의 병이 씻은 듯이 낫자 병원의 의사들도 기적 같은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건강을 되찾아주신 부처님의 가피에 스님은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한다.
화두
스님은 불법을 익히는데도 영민한 모습 을 보였다. 봉곡사에서 현행스님, 우법스님등 많은 대중과 함께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수덕사에서 오신 혜암스님이 대중이 모인 가운데 화두를 주며 물으셨다.
“동전이 떨어져 있는데 한 사람은 발로 차고 가고, 한 사람은 주워 간다. 어떻게 할 테냐?”
그러자 묘각스님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 다 틀렸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혜암 큰스님이 호통을 치셨다.
“저 놈 죽여라.”
그러나 스님은 그 기세에 조금도 눌림이 없이 말하였다.
“저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혜암 큰스님이 스님의 멱살을 잡고 다른 방으로 끌고 가셨다.
“너 언제부터였느냐?”
큰스님은 그 보배로운 지혜의 문이 열린 순간을 묻고는 좋아하셨다.
“세 살 때 친구가 여기 있었구나.”
큰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또 하나의 화두를 주셨다.
“영산회상에서 세존이 꽃을 드니 가섭이 웃은 이유를 아느냐?”
이에 스님이 그 말씀을 받아 막힘이 없이 대답을 하자 그것은 전강 큰스님도 인가를 한 것이라며 혜암 큰스님은 굉장히 기뻐하셨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법거량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막혔다. 스님은 분심이 나서 열심히 정진을 하다가 일순 이글이글 타는 불을 보며 막혔던 부분이 활연히 열렸다. 그래서 혜암 큰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옳다고 하셨다.
“견처가 열리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므로 강건한 신심이 타오르지 않으면 공부가 익을 수 없다.”며 공부할 때는 욕심을 앞세워 장애를 만들지 말고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수행 결실로서 깨달음을 얻기를 권고하셨다. 또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늘 깨어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본성을 잃지 않고 깨어 있는 삶
스님은 언제 어느 때나 자기 본성을 잃지 않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스스로가 원력을 가지고 한 가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 한 가지는 이루어지기 마련이므로, 인과를 믿고 매사에 절약하고 복을 지으며 살면서 원력을 성취하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일지스님은 2022년 현재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서포리 지장암 주지로 정진 중이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진공(眞空)·정헌(正憲)·성훈·선문(善門)·수형(修亭)·현공(玄空)·진정(眞正)스님 등이 있다.
봉곡사 주지로 취임
스님은 1977년 7월 23일 봉곡사의 주지로 취임한 이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불사의 원력을 세운 뒤 이룩해 나가고 있다. 봉곡사를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만공선사께서 처음 견성한 자리라는 존귀한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서다. 취임 후 불사의 고삐를 다잡으면서 3년에 걸쳐 전기, 전화, 기와 불사를 이룩하였고, 1986년에는 산신각을 신축했다.
또한 만공선사와의 지중한 인연을 가진 사찰인 만큼 1994년 만공선사를 기리는 만공탑을 조성하기까지 불사의 원력이 장대하였다. 사찰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는 사찰을 전체적으로 불사하기 시작하여 1999년 완공을 이룩하였다.
기와불사
불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기와가 전부 새어서 고민하던 중 스님은 제일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이복례씨가 불사에 잘 동참한다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청하려고 찾아갔다. 스님이 찾아갔을 때 제일호텔은 이복례 씨의 딸인 곽향순 씨가 사장으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스님은 곽향순 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후 봉곡사의 불사에 동참해주기를 청하자 곽 사장이 십시일반 할 수는 있어도 전부를 돕기는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다. 이에 스님은 ‘전부를 다 해주시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두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제일호텔 측에서 불사를 모두 돕겠다는 연락이 왔다. 스님의 강인한 기개에 크게 감동하여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리하여 불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그 뒤로 문화재 지정을 인가받기 위하여 애쓴 결과 문화재로 지정받음으로써 중창 불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스님의 계획은 조감도대로 사찰을 복원하는 일이 급선무이며, 불사 때문에 문을 닫은 봉곡사 선원을 더욱 크게 지어 만공 큰스님의 뒤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도 집착 없이 자유롭게
스님은 수행자의 마음을 표현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내 성품을 보고 인연을 따를 뿐
어디로 흐르던지 상관하지 않네.
있는 것은 즐기고 없는 것은 찾지 않고
어느 곳에도 집착 없어 자유롭구나.
모든 인류는 행복하려고 하는 욕심에 얽매여서 불행해진다.
공부해야 된다는 욕심에 얽매이면 성품을 볼 수 없다.
스스로 밝은 성품에 몰입해 들어가면 보일 뿐
보고 나면 그뿐이다.
묘각스님은 2015년 현재 충남 아산 남산 보각사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지성(知性)·경륜(景輪)·일미(一味)·돈경(暾坰)스님 등이 있다.
봉곡사
충남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자리하고 있는 봉곡사는 신라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로 산 위에 있는 배틀바위의 전설에 따라 돌 석(石) 자를 붙여 옛 이름은 석암사라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6개의 암자모두 소실 되고 그 이후 인조 24년(1646년)에 중창했으며 정조 18년(1794년)에 경헌과 각준이 중수하고 산의 봉이 양쪽 날개를 펼치고 나는 것과 같다 하여 지금의 이름인 봉곡사로 불리기 사작하였다.
현재 봉곡사는 향각전과 대웅전,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인 고방이 남아 있으며 주차장에서 사찰에 이르는 700m의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아름답고 ´천년의 숲길´등 자연 산책로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이 숲길은 산림청에서 주최한 ´아름다운 거리숲 부분´에서 장려상을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246~25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27
- 아산시 문화관광, 봉곡사 https://www.asan.go.kr/tour/develop/m_tour/?m_mode=view&pds_no=2019111514555027835
- 굿모닝 충청, [충남 치유의 길…불교 순례길2] 아산 봉곡사 천년의 숲 ] 2021.02.23.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809
- 연암산(다음블로그), 불기 2559년 부처님 오신날(양력 5월25일 https://blog.daum.net/kchsik35/287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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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각(妙覺)스님 | 본항목 | 묘각스님(妙覺, 1942~) | 妙覺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각스님(妙覺,_194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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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각(妙覺)스님 | 육화(六和)문중 | ~의 일원이다 |
묘각(妙覺)스님 | 법진(法眞)스님 | ~을 은사로 출가하다 |
묘각(妙覺)스님 | 석암(昔岩)스님 | ~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다 |
묘각(妙覺)스님 | 석암(昔岩)스님 | ~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다 |
묘각(妙覺)스님 | 양진암 | ~에서 안거를 성만하다 |
묘각(妙覺)스님 | 윤필암 | ~에서 안거를 성만하다 |
묘각(妙覺)스님 | 봉곡사 | ~에서 주지로 취임하다 |
묘각(妙覺)스님 | 동국대학교 | ~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다 |
묘각(妙覺)스님 | 봉곡사 | ~를 문화재 지정 후 중창 불사하다 |
묘각(妙覺)스님 | 봉곡사 | ~에 만공탑을 조성하다 |
묘각(妙覺)스님 | 봉곡사 | ~에서 주지를 역임하다 |
묘각(妙覺)스님 | 아산 남산 보각사 | ~에서 주지로 취임하다 |
지도
- 봉곡사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