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선경스님(禪敬, 1904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8월 28일 (일) 08:05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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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선경(禪敬)스님은 유활문도회의 수장격으로 청풍납자의 수범을 보이며 뭇 대중을 애호하였고, 제방 비구니 납자들의 어머니였던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4 충북 청원 출생
1921 마곡사 영은암에서 명덕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2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36~1983 수덕사 견성암, 사불산 윤필암, 금강산 보덕굴, 동화사 부도암, 범어사 대성암, 천성산 내원사 등에서 안거 성만
1938 사불산 윤필암에서 안거 중 활연개오
1942 한암스님으로부터 당호 ‘담연당’ 하사 받음
1963~1973 내원사 선원 입승
1996 1996.1.26(음12.7.) 금강암에서 입적 (세수 93세, 법랍 76세)
문중 육화(六和)문중
수행지침 밑 없는 철배(鐵船)를 타고 육지에 행하여도 걸림이 없음을 알아라.(오도송)
수계제자 법연(法演)・만수(晩水)・정훈(正訓)・명기(明機)・도강(度江)

활동 및 공헌

출가

[선경스님]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193
[선경스님]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196
[한암스님이 선경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00
[선경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199
[선경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194
[선경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01
[앞줄 좌측부터 본공스님, 만공 큰스님, 인홍스님 뒷줄 좌측부터 선경스님, 청룡사 윤호스님, 회룡사 도준스님, 상근스님(월정사 지장암에서. 1943년 계미년 하안거)]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135
[서양제자들과 함께, 맨 왼쪽이 마틴 배춸러] 사진출처: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31/2011073101075.html
[선경스님이 만년을 보낸 공주 금강암] 사진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137 .
[내원사에 있는 선경스님부도] 사진출처: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139 .

담연(膽然) 선경(禪敬)스님은 1904년 음력 5월 2일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라는 산촌에서 아버지 노씨와 어머니 고씨의 딸로 태어났다. 비록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자애로운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9세 되던 해 어머니을 여의게 되어 인생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다 병까지 얻게 되자 마침내 죽음까지 각오하게 되었다. 어느 날 스님께서 스스로 명을 끊으려고 할 때 홀연히 허공에서 다음과 같은 공청이 들리는 것이었다. “그대 부처님 인연이 지중한데 어이하여 스스로 명을 끊으려 하느냐?” 그 순간 스님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출가를 결심하셨다. 초발심이 곧 변정각으로 스님에게 이어졌다. 18세 되던 해에 스님은 마곡사 명덕스님께 나아가 삭발을 하고 그로부터 열네 해 동안 노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하였다.

윤필암에서 수행 중 활연개오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처음으로 결제를 하고, 덕숭산 만공선사의 법문을 듣고 마음에 느낀 바 있어 선방을 찾아 나섰다. 견성암에서 한 철을 지내고 은사스님의 인도를 받아 문경 땅 윤필암의 청안선사 회상에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하루는 청안스님께 나아가 삼배를 드리고 화두를 여쭈었더니 선사께서 “만공 선사께서 주실 화두를 내가 왜 가르치겠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그 말을 들은 스님께서는 분한 마음에 더욱 굳게 마음을 다져먹고 먹고 자는 일조차 잊고 오로지 분심으로 정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삼칠일이 지나도록 성성적적(惺惺寂寂)하여 수마는 간데없고 오직 한 덩어리 의심뿐이었다.

하루는 청안선사께서 큰 방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이셨다. ‘밑 없는 철배를 타고 육지에 행하여도 걸림이 없음을 알라.’ 그 글을 보는 순간 스님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마음의 의심이 마치 화롯불에 눈 녹듯이 스러지고 마음이 확연히 열렸다.

‘밑 없는 철배란 곧 마음이다. 마음은 본래 걸림이 없으니 육지를 간들 무슨 걸림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도 꼬리도 모른다.”던 만공 큰스님의 말씀을 홀연히 깨닫게 되었다.

‘본래 마음에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 것, 그때 만약 만공 큰스님이 스님 곁에 계셨다면 ’둘러태기‘를 쳤을 것이다. 혹 스님을 둘러친들 그 또한 무슨 걸림이 있으랴.’

그때가 스님의 세수 서른다섯이 되던 해였으며 인생이란 도시 한자리의 꿈(일장춘몽)임을 알았다. 청안스님은 스님의 답을 듣고 크게 놀라시더니 해제도 되기 전에 걸망을 둘러메고 수덕사로 떠나시고 말았다.

본공, 대영스님과 함께 수행하다.

견성암에서 청안스님으로부터 선경이 한 소식 들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본공, 대영 두 비구니가 도반이 되어 윤필암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윤필암에서 세 철을 나는 동안 스님은 줄곧 공양주를 사시며 도반들과 용맹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큰 방에서 정진을 하는데 홀연히 스님 전생의 일들이 환히 보이는 것이었다. 숙명통이 열린 것이다. 스님은 전생에 속리산 법주사의 비구였으며 형색과 인품이 뛰어난 수좌였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못했던 과보로 금생에는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났으며 가난한 집안에서 복락을 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배움과도 인연이 없이 태어났으나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어 비구니가 되었던 것이다. 스님의 부모님은 전생에 단월이었으며 은사스님은 도반이었다. 이후 스님은 누구든지 한번 보기만 하면 그 사람의 전생을 훤히 알 수가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 수덕사의 만공 큰스님께서 윤필암 대중들에게 각기 아는 바를 적어 보내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에 스님은 ‘윤필바위를 말랑말랑하게 삶아서 선지식께 공양 올리겠습니다.’라고 적어서 보냈다. 스님의 글을 받아보신 만공스님께서 “도인은 생돌을 좋아 하느니라”고 답장을 주셨다. 그 후 스님께서 돌을 말랑말랑하게 익혀서 갖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닌 경지에서 만공 큰스님을 친견했다.

큰스님께서는 “어서 일러라.” 하고 말씀하셨다. 스님이 “본래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것을 있다고 하셨습니까?”하고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홀연히 공하여 선사도 제자도 사라지고 없었다.

금강산, 낙산사에서 수행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신 스님이 보덕굴에서 칠일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어느 날 관세음보살님이 이르시길 ‘그대 마음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무얼 그리 애를 쓰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금강산에서 칠일기도를 마치고, 낙산사의 홍련암(관음굴)으로 가서 이칠일 기도를 시작했다. 하루는 관세음보살님께서 이르시길 ‘모든 관세음보살과 영산회상이 그대 마음 가운데 있는데 무얼 그리 애를 쓰느냐?’시며, ‘앞으로는 선지식을 친견하며 탁마하고 정진이나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행

홍련암 관음굴에서 이칠일 기도를 마친 스님께서는 도보로 걸어서 오대산 상원사로 향하엿다. 신선령 가까이 갔는데 때는 한겨울이라 눈이 하얗게 덮여서 앞뒤 좌우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한 청년이 병을 흔들면서 나타나 물었다. “스님들 어디까지 가십니까?” “예, 한암 큰스님 회상에 가는 길입니다.” 스님의 대답을 들은 청년이 말하였다. “오늘은 이 동네에서 주무시고 내일 신선령을 넘으시지요.”

그래서 그날 밤을 마을에서 지새우고, 이튿날 신선령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 눈에 덮여 향방조차 분간할 수가 없어 발을 떼어놓지 못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허공에서 공청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길을 조심하시오. 어제 사람이 하나 지나갔으니 길을 잘 살펴 그 발자국을 따라가시오.” 이에 스님께서는 공청대로 길을 살피고 발자국을 따라 간신히 더듬어 상원사에 당도했다. 한암스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시며 어디로 해서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스님이 대답하였다. “예, 신선령으로 넘어 왔습니다.” 그러자 한암 큰스님께서 크게 감탄하시며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문수보살께서 길을 인도해 주신다네”하시며 크게 감탄하고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나 막상 상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하고 보니 대중이 너무 많아 방이 좁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지장암에서 한겨울 동안을 공부하였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인 사월 보름날, 마침 한암 큰스님 생신이라 스님은 상원사로 올라가 스님을 뵙고 나서 북대(北臺)로 봄나물을 캐러갔다. 나물 캐는데 정신이 팔려 그만 길을 잃고 헤매던 스님은 해가 질 무렵에야 지장암에 돌아왔다. 그랬더니 본공스님의 꾸중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대중스님과 도반들에게 송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날 본공스님은 늦게 도착한 벌로 스님에게 북대로 올라가라 하였다. 대영스님과 북대에 다다르니 시간이 밤 아홉시나 되었다. 참회하고 용서를 빌고 나서야 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종일토록 산속을 헤매던 피로도, 육신에 대한 애착도 모두 끊은 채 묵묵히 앉아 정진했다.

수마도 잊고 정진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밤중이 되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치더니 방문이 덜컹 열리면서 바람이 방안을 도는데, 스님 몸 가까이에는 오지 못하고 마침내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스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문을 닫고 날이 샐 때까지 꼬박 정진하고 아침에야 상원사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한암 큰스님을 뵙게 되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북대에서 정진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한 수좌가 쌀 여섯 말을 지고 북대에 올라가 결제하는데, 도둑이 쌀을 훔쳐가는 것을 막으려다 도둑에게 맞아 끝내 목숨을 잃고 중음신(中陰身)이 되었어, 그래서 지금 큰 절에서 천도기도 중이란 말이야, 비구들도 무섭다고 요즈음에는 아무도 안 올라가는데”하시며 “장하다”고 거듭 칭찬을 해 주셨다.

선방에서 이렇듯 줄기차게 정진에 전념하다 보니 스님께서는 밥맛을 잃고 자꾸만 기운이 떨어졌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더니 마침내 온 몸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옥수수밥도 감자밥도 싫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수동자가 놋그릇에 밥을 담아 가지고 와서 밥을 권하였다. “이 밥을 드시면 병도 낫고 기운도 날 것입니다.” “대체 내가 무슨 병에 걸렸소?” “예, 황달입니다.” 스님께서는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 밥을 받아먹었는데, 신기하게도 노랗던 몸이 다시 본래의 색으로 변하고 입맛이 돌면서 기력도 전처럼 되살아났다.

그런 일이 있는지 얼마 안 되어 하루는 스님께서 꿈을 꾸었다. 스님이 상원사에 올라갔는데 문간에서 물레방아가 돌고 있고, 한 동자가 나와서 반가이 맞으며 물었다. “제가 조실스님 방문을 열어드릴까요?” 스님은 동자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아니다. 나는 조실스님을 안다.” 스님은 볕이 따뜻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미투리를 삼고 계시다가 스님을 보며 책망을 하시는 것이었다. “왜 잠긴 문을 열고 들어왔느냐?” “저절로 열리던데요.” 문수보살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하나 맞으면 다 맞지, 윤필암에서 공부하던 살림살이 이야기나 해보지.” 스님은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아뢰었다. 그러자 문수보살께서 말씀하셨다. “화상(和尙)머무는 곳을 알겠네.” “할(喝)” 스님의 대답에 문수보살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그러나 스님이 지른 할(喝) 소리에 꿈을 깨어보니 스님이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고 한다.

한암 큰스님으로부터 담연당(湛燃堂)이란 당호를 받다.

상원사에서 자신의 도를 점검하며 수행정진을 거듭하던 선경스님은 1942년 39세에 이르러 한암 큰스님으로부터 담연당(湛燃堂)이란 당호를 받기에 이른다. 그 후 다시 수덕산 견성암으로 돌아온 것은 나이 44세, 만공 큰스님께서 입적하신지 백일이 지난 1947년 2월이었다. 혜암스님께 소식을 전해들은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어쩔 줄 몰랐다.

수덕사에서 별좌로 살다.

그 후 스님은 수덕사에서 별좌를 살면서 큰스님 삼년상을 마쳤다. 3월 7일 생신기를 지내고 나서 별좌 소임을 내놓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홀연히 귀에 목탁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만공 큰스님께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좌 들어오너라.” 스님이 장삼을 입고 방에 들어갔다. “너는 별좌 내놓지 말고 삼 년만 지내면 네 일을 모두 마치게 된다.” 만공 큰스님의 말씀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더 못 하겠습니다.” “할 수 없지 애 많이 썼다.” 선경스님은 이제 와서 그때 그 꿈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삼 년만 더 정진하라는 경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역시 스님이 정진을 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달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더니 온 몸이 환해졌다. 훗날 선경스님은 그때 공부가 진전되었음을 깨달았다.

꿈을 꾸고 난 다음 날 경봉 큰스님께서 별좌를 부르신다고 하여 큰스님 전에 나아갔다. “별좌는 삼년만 더 살아라. 그러면 너는 모든 일을 마치리라.” 그러나 스님은 이번에도 큰스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물러나왔다. “세 도반들이 모두 소임을 내놓았으니 저 혼자는 못합니다.” 이렇게 별좌를 내놓고 큰 방에서 정진을 하는데 갑자기 큰 벼락이 내리쳐 불덩어리와 스님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나는 해탈했네!” 스님은 큰소리를 치며 밖으로 나갔고 대중 스님들이 모두 놀라 스님을 쳐다보았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닌데 뱃속에서 아기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스님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손으로 배 속의 아기를 꺼내어 터뜨렸다. 그랬더니 환한 광명이 비추었다.

선경스님이 대구 동화사 부도암에서 일년 을 살며 만행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효봉 큰스님께서 경봉 큰스님이 보냈다는 꽃잎을 들어 보이자, 그때 선경스님이 아뢰었다. “꽃잎을 딸 적에 그르쳤습니다.” 그랬더니 효봉 큰스님께서 대중에게 물으셨다. “허공에 누각을 지었으니 부처를 어디에 모셔야겠느냐?” 이에 스님은 벌떡 일어나 효봉 큰스님 앞으로 나아가 우뚝 섰다. 그랬더니 효봉 큰스님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범어사 대성암에서 수행

그 뒤 스님께서는 범어사 대성암으로 가서 한 철을 났다. 어느 날 동산선사(東山禪師)께서 대중에게 염주를 들어 보이며 말씀하셨다. “이 염주를 받아 가거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나가 염주로 동산 큰스님을 치고 싶었지만 그만 두신 스님은 양산(梁山)의 천성산(千聖山) 내원사로 향하였다.

내원사에서 입승으로 살다.

도반들과 함께 천성산에 와서 정진을 하니 참으로 환희심이 나는 것을 깨닫고, 그 곳에서 오래 살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 때가 1963년 세수 60세 때의 일이다. 당시 처음에는 본공스님이 입승을 맡았으나 신병으로 소임을 다할 수 없어 내놓았기 때문에 이듬해부터 스님께서 입승소임을 맡았다.

한번은 향곡(香谷)선사께서 오셔서 이르셨다. “중국 말이 죽을 먹었는데, 한국 돼지의 배가 터졌다” 스님이 대답했다. “아이고 배야!” 그랬더니 향곡선사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밖으로 나가셨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조실이신 경봉 큰스님이 오셔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만(萬)문수가 나타났으니 진문수(眞文殊)를 찾아 내거라.” 스님이 대답 대신 향곡 큰스님 앞에 나아가 세 번 절을 하니 큰스님께서 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문수를 아직 못 보았구나.” 스님은 향곡 큰스님을 죽비로 한 대 치고 싶었으나, 죄송하여 다만 “할!”하니 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경수좌가 보살심으로 정진을 잘 하는군.”

1977년 섣달, 그러니까 향곡선사께서 열반에 드시기 얼마 전에 내원사에 오셔서 대중들에게 이르셨다. “만문수가 여기 나타났으니 진문수를 찾아내라.” 그 말을 들은 스님께서는 장삼을 입고 조실방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만문수, 진문수, 삼세제불, 역대조사 천하의 모든 노화상(老和尙)이 다 내 콧구멍에서 나왔습니다.” 향곡 큰스님께서 되물으시었다. “콧구멍이 어디 있는고?” “본래 콧구멍은 없지만 어디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대답하자 향곡 큰스님께서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 말씀하셨다. “참 공부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이제 노시고 젊은이들 탁마나 해 주시오.” 이로써, 스님은 불문에 들어와 오로지 “밑 없는 배에 한평생을 싣고” 살아온 수좌(首座)로서의 편언척자(片言隻字)를 마쳤다.

수행록 집필

선경스님은 출가 이후의 수행 여정을 담은 수행록을 집필하였다. “이 보잘 것 없는 수행의 자취를 통해 행여 후래(後來) 여성 구도자(求道者)들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자신(自信)을 심어주고 불퇴전의 의기(意氣)를 보탤 수 있다면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수행록의 첫머리에는 노스님을 찬탄한 원담(圓潭)스님의 글이 실려 있다. “조용한 수행자의 발자국, 쾌활 자재한 법열을 노래 불러 구도 생활의 가장 작은 단면을 표출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놀라운 일이라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며 백척간두에 몸을 던지고 철벽무문에서 걸림이 없었으니 이는 곧 밑 없는 배였으며 이 배의 사공이 곧 노선객 선경 비구니였음을 차마 누가 알았으리요.”

경기도 평택의 명법사에 주석

그로부터 1년 후 향곡스님은 열반에 드셨고, 내원사에서 10여 년간 수행자의 본분사를 계속하였던 선경스님은 1980년대 말 노쇄한 몸을 이끌고 경기도 평택의 명법사로 거처를 옮겼다.

입적

명법사에서 6년을 지낸 스님은 입적하시기 몇 해 전에 충남 공주의 금강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가 1996년 1월 26일(음력 12월 7일) 홀연히 사바와의 인연의 고리를 끊으시니, 스님의 세수 93세요, 불문에 든지 76년 되던 해였다. 훗날 문도들이 스님의 뜻을 기려 내원사 입구에 사적비와 나란히 부도를 세우니, 그 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영원한 선지식으로 남아계시리라.

스님의 수계상좌로는 법연(法演)・만수(晩水)・정훈(正訓)・명기(明機)・도강(度江) 등이 있다.


                  밑 없는 배(無底船)

         대중이 비로암(毘盧庵)간다고 나서기에
         늙은이 몸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나
         밑없는 배를 타고 비로토굴에 올라 보니
         산은 찌를 듯이 솟아있고
         물은 잔잔하게 흘러흘러 가니
         그대로가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
         제불(諸佛)의 근원(根源)이며
         제불의 성품(性品)이더라
         계곡(溪谷)의 한 모퉁이를 돌아가보니
         깨끗하고 찬란한 옥빛의 빙설탑(氷雪塔)은
         문수(文殊)의 전신체요
         빙설탑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문수의 장광설(長廣舌)이요, 쾌활한 소리로다.
         찬란한 빙설탑 위에서 공양(供養)하는 대중은
         옛 자취를 돌아보고 온 듯
         영산회상(靈山會上) 당시 천여 명 대중의 모습 같구나.
         밑 없는 배에 천여 명 대중을 태워도 차지 않을 뿐 아니라
         크기로는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담아도 다 차지 않으며
         작기로는 작디작은 미진(微塵)의 안에도 다 들어간다.

         밑 없는 배는 한 모양도 한 빛도 없으며
         언어(言語)로 표현(表現)할 수도 없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진여자성(眞如自性) 자리로다.
         비로토굴에서 하산(下山)하여 돌아오니
         법기보살(法起菩薩)이 무상법(無上法)을 토(吐)해내네
                                      - 78세 되는 1981년 정월 어느 날

윤필암

[윤필암 사불전] 사진출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well/pilgrim/942898.html

윤필암은 문경의 사불산에 있는 대승사의 부속 암자이다. 대승사의 창건은 사불산의 산마루에 있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과 관련이 있다. 네모의 각 바위 면에 불상이 조각된 사면석불상에 관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사면석불상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왕이 가서 예경(禮敬)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여 대승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름이 전하지 않는 승려에게 절을 맡겨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볼 때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승사의 암자인 윤필암은 1380년(우왕 6) 승려 각관과 찬성(贊成) 김득배의 부인 김씨가 창건하였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이색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써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묘향산(妙香山)‧금강산(金剛山)‧소백산(小白山)‧사불산(四佛山)‧치악산(雉岳山)‧용문산(龍門山)‧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이색이 기문을 써 주었고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색은 「윤필암기(潤筆庵記)」에서 이르기를,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니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하였다. 이는 나옹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공덕산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윤필암을 세우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윤필암 경내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2기가 있어서 창건 시기는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1645년(인조 23) 서조(瑞祖)와 탁잠(卓岑), 1765년(영조 41) 야운(野雲), 1806년(순조 6) 취운(醉雲), 1885년(고종 22) 창명(滄溟)이 윤필암을 각각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던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내원사

홈페이지 : http://www.naewon.or.kr/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로써 수려한 산수와 6Km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천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성사께서 창건하신 절이다.

1898년 석담유성(石潭有性) 선사가 설우(雪牛), 퇴운(退雲), 완해(玩海) 등과 더불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절 이름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 명명한 후 선찰로써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인 혜월선사께서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운봉, 향곡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을 잇는 명안종사를 배출한 도량이다.

6ㆍ25사변으로 사원이 전소되자, 비구니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10년 만에 독립된 비구니 선원으로써 새롭게 중창되었다. 그 후 만공스님의 법제자인 법희, 선경스님등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다. 1979년 도용스님을 입승으로 모시고 18명의 스님들이 모여 삼년결사를 시작한 이후 1999년 여섯 번째 회향을 하였고 지금도 비구니 선객의 정진도량으로 선불장이 되고 있다.

  • 원효대사와 비구니 수옥 스님의 이야기 * 1,300여 년 전 원효대사는 중국 태화사(太和寺)에서 건너온 1천 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屯寺)와 89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의 암자 가운데 상ㆍ중ㆍ하 내원암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발생한 큰 수해로 대둔사와 89암자 대부분이 유실되고 하내원암만 남아,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내원사로 법등을 잇게 된 것이다. 한말에는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선찰(禪刹)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6.25로 소실되고 말았는데, 오늘날의 내원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시기에 이룩한 비구니 수옥(守玉) 스님의 업적이다. 스님은 어려운 시절에 전쟁으로 폐허화된 내원사를 중건하고 단절된 선원을 복원하여, 오늘날 명실공히 내원사를 비구니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일구어낸 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원으로서 내원사는 근대 경허(鏡虛) 스님의 법제자인 혜월(慧月) 선사가 조실로 주석하며 운봉(雲峰)ㆍ향곡(香谷)ㆍ명안(明眼) 선사 등 한국 선종사의 선맥(禪脈)을 잇는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수행도량으로서의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동국제일선원’으로서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으며, 눈 푸른 선승들의 수행공간 구실도 아울러 담당하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92~203.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4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3.
  •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p. 119~140 .
  • 마르틴 배춸러, 조은수역 『출가 10년 나를 낮추다』, 뜰, 2011.
  • Martine Batchelor, 『Women in Korean Zen: Lives and Practices』, Syracuse University Press, 200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선경(禪敬)스님 본항목 선경스님(禪敬, 1951~2014) 禪敬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경스님(禪敬,_190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선경(禪敬)스님 육화(六和)문중 ~의 일원이다
선경(禪敬)스님 명덕스님 ~의 제자이다
선경(禪敬)스님 마곡사 영은암 ~에서 출가하다
선경(禪敬)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지도

  • 금강암 (충남 공주시 신풍면 쌍대리 62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