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이병두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8일 (수) 06: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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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정안(淨岸)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의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고 한국 북방지역의 비구니 선 수행 문화를 이끈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951 강원 강릉 출생
1971 지장암에서 혜종(慧宗)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2 희찬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7 청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운문사 강원 졸업
1980 석남사에서 수선 안거
1980~1981 지장암 재무
1985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지장암 재무
1986~1996 백양사 천진암 주지(도감)
1993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사회학과 수료
1995~1996 지장암 감원 소임 (겸임)
1997 정진선원에서 2년 안거
1999 문경 윤필암 하안거 성만. 월정사 포교원 연꽃유치원 원감
2004 현재 지장암 주지 및 감원
2014.6.12. 입적

기타정보

문중 봉래(蓬萊)
수행지침 탐(貪)·진(眞)·치(癡) 벗겨내니 원래 완벽하게 갖추어진 자성광명(自性光明 절로 드러나네.
생활신조 최선을 다하자.
상훈 전남 장성경찰서 감사장 수상(1989) 외 다수
특기 인테리어
취미 붓글씨
수계제자 지훈(地熏)·지용(地湧)·지륜(地輪)·지광(地光)·지현(地賢)·해만(海曼)·지욱(地煜)·지우(地雨)·지중(地中)·지도(地導)·지경(地經)·지범(地凡)·지성(地成)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 은공(恩空) 정안(淨岸)스님은 1951년 강릉 연곡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진경희이다.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던 1970년, 스님도 콜레라에 걸려 심하게 앓던 중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내 갈 길이 따로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트여 이듬해인 1971년 2월 1일 오대산 지장암에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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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불사

  • 출가 후 스님은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지장암으로 돌아와 재무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라남도 백양사 천진암에서 사찰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스님은 중국 유학과 천일지장기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의 많은 대중스님들이 발우를 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스님에게 누군가가 스님 자리라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법석을 여는 꿈을 꾸다니….’
  • 스님은 꿈이 천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감하고 천진암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 천진암으로 내려가 불사에 혼신을 다하였다. 천진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당시에는 낡은 법당과 허물어져가는 요사채만으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스님은 천일지장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보수하고 부족한 생활용수를 보충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이용했던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었으며, 천진암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후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를 보수하여 천진암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 또한 호남에 비구니 선원이 거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워 파도처럼 밀려오던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10월 15일 삼천일 지장기도 불사 회향을 하면서 호남에 첫 비구니 선원인 백암선원(白岩禪院)을 개원하고 그 해 첫 동안거를 열었다.

은사와 상좌의 입적

  •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오대산 지장암 면모 일신

지장암의 모습
  •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와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처가 다 배움터요, 행하는 모든 일이 공부 아님이 없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이에 스님은 지장암으로 돌아왔고 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화두와 직면하게 되었다.
  •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화두, 곧 육신을 죽일 것인가, 설자리를 버릴 것인가, 마음을 죽일 것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공동체 삶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에피스드를 수행의 재료로 삼아 어려움을 통해 겸손을, 가난한 살림살이를 통해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 또한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라는 명성에 조금이라도 부응할 수 있도록 지장암 내 기린선원을 정비하여 많은 대중이 살 수 있게끔 조건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소개

* 소재지:  강원도 진부면 동산리 63-9



  • 남대 지장암은 한암스님이 1925년 49세에 봉은사 조실로 추대 받고 잠깐 머물다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온 후 입적까지 27년간 산문을 나오지 않았던 곳이다.
  • 1931년경 금강산에서 한암 스님께 공부지도를 받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두 분의 비구니 스님(황해도 출신 률노스님, 개성 출신 해노스님) 등이 지장암에 주석하게 되면서 지장암에서 해제 결제없이 30여명의 스님들이 정진했으며, 1937년 본공스님이 한암스님을 친견하고 지장암에서 입승을 살며 선원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이로부터 지장암 기린선원이 탄생하였다.
  • 지장암 비구니선원은 최초 비구니선원을 연 수덕사 견성암에 이어 윤필암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니 이에 1931년경부터 비로소 북방 비구니 선불교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 당시 지장암은 한 철에 비구니선객들이 가져오는 쌀 6말과 보살이 가져오는 쌀 9말로 정진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인홍스님이 원주를 맞으면서 스님의 신심과 원력으로 곡식을 다락에 쌓아 놓을 수 있었고 대중은 먹는 일에 걱정을 하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한국전쟁 직전 인홍스님이 원주를 살고 본공스님이 입승을 살던 8~9년이 지장암의 선 수행의 황금기로 볼 수 있다.
  • 지장암 기린선원은 1992년까지 매년 하안거에 선원대중이 모여 정진을 하였으나 해가 거듭할수록 시설의 협소함을 절감하고 1994년 지층을 겸한 90여평 규모의 비구니수행도량으로 거듭나 하안거와 동안거로 나뉘어 대중 30명이 함께 좌선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관련정보

혜종스님, 청하스님, 희찬스님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59~46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31.
  •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 http://namdaejja.webbi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