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해스님

biguni
Daramsalra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8일 (수) 06:18 판 (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혜해(慧海)스님 |사진=400px |법명=혜해(慧海) |속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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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현대 금강산 선수행의 마지막 주자로 불리는 혜해스님은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이 페이지는 연습으로 시도해 본다.

수행행적

출생

혜해스님은 1921년 4월 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 수역리 안의동이라는 농촌 마을에서 1남 3녀 중 셋째 딸 간혹 맏이로 표현된 보도자료가 있으나, 제자들의 확인 결과 셋째딸이 맞다. 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출가 전 이름은 박성일(朴聖一)이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 pp.576-577, 한국비구니연구소 (서울, 2007, 뜨란출판사)

5살 때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19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와 살면서 가난한 살림을 책임지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의 전쟁 막바지로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 애써 농사 지는 작물들을 모두 공출로 빼앗기는 힘들고 지친 일상이었다. 출가 전 어린 성일의 금강산에 관한 기억은,

“지금 생각하면 기특한 생각이긴 해. 내 집이 신의주 부근에 있었어. 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늙어 죽은 후에 저 산과 바다만 남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이불을 쓰고 펑펑 울었지. 왜 그토록 울었는지는 몰라. 그런데 한없이 슬프다가도 금강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금세 웃음기가 돌았어. 숙연인가 봐.” 출처: https://m.blog.naver.com/gigangbo/140197389663 (검색일자 2022.01.15)


라고 금강산의 인연을 되뇌곤 했다. 성일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치면서 지나가는 탁발승을 보면 ‘나도 따라가면 참 좋을 텐데. 이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 스님들을 하대하던 현실과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하여 쉽사리 출가를 엄두내지 못했다.

출가

성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남동생을 결혼시키자마자 홀가분하게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 위의 책, p.577.

성일은 어릴 적부터 중국인들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에서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고, 금강산에서 수행했던 사명대사의 일화들을 귀동냥으로 들으면서 자랐지만, 출가자의 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일제 식민지의 민중으로 자라면서 느낀 서러움을 출가하여 사명대사처럼 신통 자재한 힘을 얻어 나라를 구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열차를 타고 외금강역 일제강점기에 기차로 금강산 유람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경성역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철원역에서 하차 후 금강산행 전차로 환승하여 내금강역에 내리면 장안사 입구에 도착하는 경로이다. 조선철도는 1898년 시작하여, 1919년 금강산 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 1923년 철원~금화간 개통으로 시작하여 1931년 7월 금강산전기철도가 완전개통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철원역을 출발하여 … 병무 등 27개 역을 통과하여 종착역 내금강역까지 4시간이 소용되었다. 개통 당시 여객 운임은 쌀1가마와 맞먹는 7원 56전이었다. 두 번째는, 양양에서 출발하는 동해북부선을 타고 고성을 거쳐 외금강역에 내리면 금강산 입구에 도착하는 방법이다. 출처: 종걸·혜봉 공저, 󰡔석전 박한영󰡕 (2016, 전주시, 신아출판사), pp.309-311.; https://bestan.tistory.com/1014 (검색일자 : 2022.03.31)

에서 내려 수구넘어재를 넘어서 금강산에 들어갔다. 밤이 깊어서야 극락고개를 넘자 아름드리 소나무로 울창한 숲에 곧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성일은 내금강 세존봉 아래에 있던 신계사 암자 법기암에서, 1944년 음력 7월 초하루, 삭발염의하고 은사 대원 스님에게서 ‘묘련(妙蓮)’이라는 법명을 받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행자 생활

묘련이 행자 생활을 한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大願)스님을 비롯하여 사숙님들과 사형들, 그리고 은사 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 20명의 대중이 모여 살았다. 그때, 세수 예순이었던 은사 스님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출가 전에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가사 선생님을 한 적이 있는 당시 보기 드문 지식인으로, 항상 관음기도로 수행 정진하셨으며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곤 했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 위의 책, p.580.

 묘련은 엄격한 은사 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 스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하며 지냈다. 때로는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다.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던 짚신이 하루에 한 켤레씩 떨어지곤 했다. 은사 스님은 끊임없이 사중 일을 하시는 한편으로, 무명천에 분홍 빨강 등 색색의 물을 들여서 밤새 다듬이질을 하고 기르는 아이들의 옷을 재봉틀로 지어 입혔다. 그런 은사 스님 밑에서 묘련의 일상은 낮에는 부엌일, 밭일, 빨래 등을 하고 밤이 되어야 󰡔천수경󰡕 등을 외우는 고된 날들이었지만 부처님 전에 나아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간절하게 기도했다.
 출가해 처음 맞은 겨울인 이월 초엿새 날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묘련은 절 앞마당에 언 눈을 모조리 두드려 깨고 나서 24명분의 빨래를 시작했다. 태산 같은 빨래는 하루 일거리가 아니었다. 묘련은 도랑에 솥을 걸어놓고 옷을 삶고 건져 낸 옷은 다시 겨울 도랑의 찬물에 헹궜다. 한 벌의 옷을 몇 번에 걸쳐 헹궈서 잿물을 뺀 후에 다시 먹물을 들이는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한 묘련은 정작 본인의 빨래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다 깨끗하게 씻고 빨래해도, 묘련은 어지간히 땀이 나도 그저 냇가에 가서 쓱쓱 닦아내는 것으로 빨래하는 것을 대신했다. 남들과 같이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어보지 못했다. 겨울이면 한 달에 한 번 따뜻한 물을 데워서 대중이 목욕할 때도, 본인은 그저 물을 뒤집어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시간과 물을 아끼는 습관은 원적에 들 때까지 이어졌다.

스님의 선사상

혜해 스님은 구두선(口頭禪)을 경계하고 직접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계율에 철저했고, 수좌 5계를 철저하게 지키고 늘 제자들을 근기에 맞게 가르쳤으며, 스스로는 하심과 검소함으로 일관했다. 혜해 스님은 스스로 수행에 대하여,

  “(화두가) 안 끊어지지. 아무리 잠을 자려고 애를 써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참 어렵기는 하지. 말쑥하게 화두가 들리면, 다른 생각이 나는 법이 없는데, 그렇게 하기를 근 3년을 했지만, 그래도 깨닫지는 못했어요. 화두가 놓쳐지지 않고 오직 화두뿐이었는데, 어째 그래 깨달아지지를 않았어요.… 아무래도 잘하지 못했으니까 못 깨달았겠지요.”

출처 : 2008 <부처님오시날> 특집 동영상 중에서


라고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피력하곤 했다. 그저 스님의 법을 듣고자 찾아오는 납자에게는, ‘나에게 들을 말이 없어요.’라고 애써 겸손하게 말했지만, 가르침이 필요한 이에게는 그의 근기에 맞게 늘 가르치신 선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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