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준스님(慧俊, 1935生, 비구니)
혜준(慧俊)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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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혜준(慧俊) |
법호 | |
속명 | 박순례(朴順禮) |
출생 | 1935. 3. 26 |
출가 | 1954년 |
입적 | |
사찰 | 화운사(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3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준(慧俊)스님은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와 사회복지 및 포교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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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충남 서산 출생 |
1954 | 충남 개심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6 | 화운사 강원 사교과 수료 |
고봉(高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
1965 | 동화사 내원암 하·동안거 성만 |
해인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
1978 | 화운사 총무 |
1990~1997 | 화운사 주지 |
1997 | 승가사에서 하안거, 불영사에서 동안거 성만 |
1998~1999 | 승가사, 불영사에서 하· 동안거 성만 |
2004 | 현재 화운사 주석 |
기타사항
문중 | 실상(實相) |
수행지침 |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하자. |
취미 | 서예 |
수계제자 | 선오(聁逜)·성기(性紀)·선일(禪壹)·선형(先炯)·견진(見珍)·요공 |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준(慧俊)스님은 1935년 3월 26일 아버지 박성군과 어머니 최입출 사이의 1남 6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이름은 박순례이다.
스님은 어릴 적부터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온화한 부처님과 따뜻하고 정다운 스님들을 흠모하며 따랐다. 이렇게 불법의 인연을 키워서 발심을 거듭한 후 20세 되던 해인 1954년 충남 개심사에서 지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혜준스님은 출가 3년 전부터 지명스님의 말씀을 교훈으로 삼아 생활했다. 지명스님과의 인연이 각별하였던지 뵙는 순간 마음속에 존경심과 좋은 생각이 가득했다.
행자생활
불교정화운동 후 지명스님이 개심사에 들어가신 직후에 출가를 한 혜준스님은 아무 것도 갖춘 게 없는 궁색한 절 살림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루 공양의 양은 세 끼를 한꺼번에 다 먹어도 허기가 질 만큼 적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항상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야 했다.
스님의 행자 생활은 불사를 돕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모두가 힘들던 시기였으므로 불사를 하려면 스님들이 직접 개울가에서 모래를 건져 올려 세숫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날라야 할 만큼 고되게 일을 해야만 했고, 계단을 놓을 때에도 커다란 돌을 스님들이 맨손으로 하다시피 했다.
지붕에 기와를 올릴 때에 인부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쉬엄쉬엄 일을 하는데 스님들은 간식과 휴식은커녕 쉴 새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배고픔을 참지 못한 어떤 스님은 공양주를 찾아가 인부들처럼 스님들에게도 간식을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보리 삶은 것도 없다.'는 공양주 보살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인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대중스님들이 간식조차 먹지 못 하는 것을 보면서 스님도 어린 마음에 많이 서운했다고 행자 시절을 회상한다.
수계
스님은 출가 3년 후인 1956년 화운사에서 사교과를 졸업하고, 그해 고봉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처음 화운사에 와서 황량한 도량을 보고 너무나도 서글펐지만 은사 지명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신심을 다하여 극진히 시봉하며 무려 45년 동안 화운사에 머물렀다.
혜준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릇이 워낙 크다 보니 행자 때부터 불편한 일도 있었지만 재미있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았다.며 고생을 즐거움으로 대신했다. 스님은 '항상 스스로 현화現化하라.' 하던 은사스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비구니계는 1965년 해인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강원에서 공부를 하던 중 졸업을 하지 못하고 화운사로 돌아오고 말았다. 경을 보는 것만이 길이 아니라, 차라리 참선과 은사스님의 뒷바라지를 하며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1997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동안 스님은 승가사, 불영사 등 선방을 두루 다니며 안거를 성만했다.
- 사진출처(은사 지명스님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 337
운전을 배우다
50년 전에는 화운사 강원 터가 모두 과수원이었다. 원주 소임을 보면서 자동차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운전을 배웠다. 그 후 25년 동안 과수원에서 수확한 과일도 싣고 다니고, 강원을 할 적에는 학인스님 70~80명의 교통수단이 되어주었다. 그 당시에 비구니스님이 전례가 없는 운전을 한다고 어떤 스님은 야단을 치기도 했으며, 혹시 스님을 흉보는 학인스님들이 있지 않을까 속으로 걱정하기도 했다.
화운사 주지 소임
지명스님께서 주지를 사실 때인 1978년 스님은 원주 소임을 그만두고 총무 소임을 맡았다. 총무 소임을 보던 중 은사스님이 풍으로 쓰러지면서 혜준스님은 8년 동안 화운사 주지 겸 총무로 살림을 맡게 되었다.
소임을 사는 동안 기도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리고 은사스님과 도량 가꾸기에 전념을 다하여 불사를 거듭 이뤄냈다. 스님이 처음 화운사에 왔을 때 법당은 대략 10평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칠성각도 작았다. 당시 칠성각은 불사를 하지 않고 개축만 했었는데, 근래 들어서 칠성각을 증축 불사했다.
대웅전 등 모든 건물은 은사스님과 스님의 신심과 구도의 열정으로 이룬 결정체이다. 은사스님께서 병이 난 후 혜준스님이 두 채의 요사채를 도맡아 관리했다.
수계제자
2004년 현재 용인 화운사에서 정진 중인 혜준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선오(𨁁逜)·성기(性紀)·선일(禪壹)·선형(先炯)·견진(見珍)·요공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335~341.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56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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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慧俊)스님 | 본항목 | 혜준스님(慧俊, 1935~ ) | 慧俊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준스님(慧俊, 1935生, 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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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慧俊)스님 | 실상(實相)문중 | ~의 일원이다 |
혜준(慧俊)스님 | 지명(智明)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혜준(慧俊)스님 | 개심사(충남 서산) | ~에서 출가하다 |
혜준(慧俊)스님 | 고봉(高峰)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혜준(慧俊)스님 | 석암(昔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혜준(慧俊)스님 | 화운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