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재홍스님(在洪, 1931生, 비구니)

biguni
Ehjkkims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7일 (목) 05:37 판 (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 = 재홍(在洪)스님 |사진 = 42.재홍스님1.jpg |법명 = 재홍(在洪) |법호 =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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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재홍(在洪)스님은 종식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보은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1 경북 예천 출생
1959 서산 개심사에서 종식(宗識)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0 혜붕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개심사 강원 졸업
1974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전국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
2004 보은사 주지
문중 계민(成珉) 문중
수계제자 보광(普光)

활동 및 공헌

출가

[만공 큰스님 사리탑에서]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637
[속리산 법주사에서 (1966. 9. 16)]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639

재홍(在洪)스님은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이름은 윤순화이다. 스님은 불행히도 나이 겨우 11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러나 백일도 안 된 핏덩이 남동생을 돌보느라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당시는 일제 시대였기 때문에 스님은 공청에서 증표를 끊어 일본 가게에 가서 우유와 설탕을 타다가 동생을 먹였다. .

스님은 이렇게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하였고, 선생님은 공주여자사범학교에 추천을 해주셨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할 수가 없었다. 스님은 아버지 몰래 호적등본을 떼어 지방에 있는 상급 학교에 원서를 넣어 겨우 진학을 하게 되었으나 남동생 때문에 공부를 그만둬야 했고, 이후 공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안고 절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절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재홍스님은 1959년 개심사에서 종식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었다.

수학과 수행

스님은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으나 행자 생활이 결코 쉽지 만은 않았다. 한 번은 보리밥을 짓는데, 한 시간 이상 절구질을 해야 보리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모른 채 원주스님께서 강사스님 몫으로 조금 내주신 쌀을 보리와 한데 섞어 밥을 지었다. 밥을 하고 보니 한 숟가락쯤 되는 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깡 보리밥을 강사스님께 올렸다. 당시 강사스님이었던 태욱스님은 '이도 없는데 보리밥을 먹고는 도저히 글을 가르칠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이 밥을 지었냐.’하며 화를 내셨다.

재홍스님은 장삼을 입고 태욱스님 앞으로 나아가 “노스님, 다음에는 어떻게든 부드럽게 지어 올리겠으니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참회를 하였다. 이후 스님은 강사스님이 드실 쌀을 따로 씻어 냄비에 담아 쌀밥을 지었고, 대중밥은 큰솥에 지었다. 냄비가 보글보글 끓을 때면 부엌을 통해 지나다니던 학인스님들이 그 안에 든 쌀밥이 궁금하여 자꾸만 뚜껑을 열곤 하였다. 그러니 밥의 뜸이 제대로 들 리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매끈한 사발을 냄비 뚜껑 위에 얹어놓아야 했다. 가을에 알밤 한 개를 주으면 여러 조각으로 쪼개서 밥에 얹고, 몇 알이라도 주으면 한 톨을 통째로 넣어 밥을 지어드렸다.

재홍스님은 자원하여 3개월 동안 강사스님의 공양을 지었다. 그 후 심검당 불사가 있는 한 철을 다시 자원하여 6개월 동안 공양을 지어올렸다. 처음에는 능숙하지 못해서 자주 야단을 맞았지만 점차 일이 손에 익게 되자 나중에는 강사스님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스님은 그 시절을 회상하면, 장작 불타는 아궁이 위에 솥을 얹어 놓고 밥이 끓기를 기다리며 그 앞에서 책을 읽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재홍스님이 사집[1], 사교[2] 졸업을 하고 탁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동네에 소창 동방아를 입고 탁발을 나갔는데, 개가 덤벼들어 옷을 물어뜯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런데 개 이빨이 소창에 걸려 개가 오히려 놀라 소창에 걸린 채 달아나는 것이었다. 스님은 너무 놀라 아무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어느 집에 탁발을 갔는데, 새댁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스님은 그날 주무시고 가라는 새댁의 간곡한 청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머슴살이 갔던 신랑이 밤늦게 돌아온 것이다. 신랑은 윗방 댓돌 위에 하얀 고무신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누구를 집에 들였냐며 새댁에게 화를 냈고, 결국 등불을 켜고 스님을 확인하고 나가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노스님을 시봉하다

님의 노스님인 정현스님(‘한국비구니의 문중’에서는 정인(貞仁)스님으로 씌여있다.)이 해인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정현 노스님은 선학원의 처음이자 마지막 주지로 살면서 선학원의 빚을 다 청산하셨는데, 큰 스님들이 남쪽에서 올라와 비구니를 주지로 앉혀 놓았다고 빈정거렸다. 이에 노스님은 왜 비구니는 선학원 주지를 못사느냐? 내가 잘 나서 주지를 사는 게 아니다. 빚 갚는데 내가 필요하니까 주지로 맡긴 것이지 키만 크면 큰스님이냐.'고 호통을 칠 만큼 당당한 분이셨다.

노스님은 짓궂은 면도 있었다. 노스님이 해인사 삼선암에 사실 때의 일이다. 환경 노스님과 내기를 하셨는데, 공양 중에 먼저 말을 한 사람이 쌀 한 가마니를 주기로 한 것이다. 노스님은 어간이 돌아오자 어간에 앉아 있는 환경 노스님의 발우에 물을 철철 넘치도록 부었다. 그런데 말을 하면 내기에서 지기 때문에 환경 노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다. 노스님은 계속 물을 부었고, 보다 못한 환경 노스님은 “그만 부어라!” 하고 말을 하셨다. 결국 환경 노스님이 백기를 들었고, 노스님은 쌀 한 가마니를 시주받았다고 한다.

비구 스님들의 어려움까지 살펴주셨던 노스님은 금오스님과 전강스님을 비롯한 역대 큰스님들과 도반으로 지낸, 자상한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셨다. 성품이 화통하여 근대의 큰스님과 법거량을 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언변이 좋고 겸손하셨고, 그 때문에 큰스님들과 지기지우로 지냈다고 한다.

재홍스님이 노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개심사에서 올라왔을 때의 일이다. 스님은 노스님의 다 떨어진 인조속곳을 보고 “노스님, 옷이 너무 낡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입다가 버려도 될까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노스님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입을 수 있다.'며 벼락처럼 호통을 치셨다. 재홍스님은 노스님에 대한 지극한 마음으로 올린 말씀에 느닷없이 불호령이 떨어지자 무척 서운하였다. 노스님은 제대로 된 계절 옷 하나 없이 사계절을 나셨다.

노스님이 입적한 후에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입고 벗을 옷 두 벌이 전부였다. 그만큼 검박한 생활을 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입적하신 스님에게 섭섭함을 느끼기는커녕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재홍스님 또한 노스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산 덕분에 검소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입적하기를 원한다.

거동이 불편하신 노스님의 대소변을 직접 받아내며 정성껏 모셨던 재홍스님은 은사스님 또한 지극히 시봉하였다. 은사스님은 입적하기 전 2년간 중풍을 앓으셨는데, 이때도 재홍스님은 손수 은사스님의 수발을 거들었고, 나중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밥을 떠서 먹여드렸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은사스님은 치매를 앓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것이 치매인 줄 모른 채로 시봉을 했어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재홍스님이 안양 수리산 일체암에 상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노스님이 계셨던 때라 선방 대중에 상좌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고심하던 중 하루는 낮에 꿈을 꾸게 되었다. 스님들이 열을 지어 걸망을 메고 언덕을 올라와 마루에 차탁을 내려놓으며 이곳에 살러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언덕을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상좌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마중을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아는 형님 스님이 언덕을 올라왔다. 재홍스님은 그 스님에게 '나는 이 절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형님은 어떻게 하실 거냐.'고 여쭈었다. 상좌의 마중을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언덕을 오르려고 하였지만 여전히 미끄러질 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 번째 시도를 하는데 봉선사 운경스님께서 다가오더니 등을 떠밀어 올려주셨다. 재홍스님은 지금도 운경스님의 그 손길이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재홍스님의 노스님은 대중에서 살다 나온 뒤 다시 대중으로 들어가자니 방 한 칸에 얽매이게 되고, 또 마땅히 갈 곳도 여의치가 않아 어렵게 오막살이 한 칸을 마련하셨다. 그곳이 안양 수리산 일체암이다. 재홍스님은 그곳에서 노스님을 모시고 3년 동안 지냈다. 비가 오면 법당에는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스님은 오막살이를 개축하기로 마음먹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이후 신도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주어 새 법당을 짓게 되었는데, 음력 2월에 시작한 공사는 사월초파일이 지나고 백중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마무리 되어 준공검사가 떨어졌다.

보은사 불사를 하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피와 알뜰하게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 덕분에 남에게 빚을 지지 않고 무사히 불사를 회향하였다. 보은사라는 이름은, 시주님들의 시은으로 절을 지었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터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재홍스님은 보은사의 절터가 협소하여 유치원을 세울 수도 없고, 절집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해서 사람들을 마음껏 돕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특별한 포교를 행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법당이 30~40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신심껏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기도 법회를 자주 열고 있다.

스님은 신도들에게 어려운 법문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몸소 부처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2004년 보은사 주지를 맡고 있는 재홍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보광(普光)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635~64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05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1, 349..
  • BBS, 서울 양천구 불교가 뭉쳤다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124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재홍(在洪)스님 본항목 재홍스님(在洪, 1931~) 在洪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홍스님(在洪,_193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재홍(在洪)스님 계민(成珉)문중 ~의 일원이다
재홍(在洪)스님 종식(宗識)스님 ~의 제자이다
재홍(在洪)스님 서산 개심사 ~에서 출가하다
재홍(在洪)스님 혜붕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재홍(在洪)스님 양천구 보은사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지도

  • 보은사 (서울시 양천구 목3동 318-126)



주석

  1.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
  2.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의 4과목을 강원에서는 4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