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동희스님(東熙, 1945生, 비구니)

biguni
Ehjkkims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9일 (수) 06: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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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동희(東熙)스님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불교음악인 범패를 배우기 시작하여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전수자로 지정되어 불교음악 유네스코(UNESCO)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영산재의 보전(保全)에 기여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945 서울 출생
1950 청량사에서 상길(相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6 청량사에서 혼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7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사)동희범음회/동희불교문화원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dongheesunim/D5Or/2)에는 영산재 전수자인 운공스님으로 되어 있으며, 영산재 보존회는 이월하(月河)스님(1875년생~1950년 입적; 세수75세, 법납 60세)을 영산재보존회 중흥조로 모시고 있으며, 통도사 방장을 지내신 월하(月下)스님(1915년생.~2003년 입적)과는 다른 스님임
1978 범패 연구소인 자인사 설립
1989 제1회부터 2006년 제18회 까지 중요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시연회 집전
2021 현재 청량사 회주, 영산재 전수교육조교,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 어산종장, (사)동희법음회 이사장

교육경력

효동범음대학, 영산보존회 부설 범음대학, 운문사 승가대학, 봉녕사 승가대학, 삼선 승가대학,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덕여자대학교 출강, 국립국악원 특강

연주경력

연도 내용
1977.4 인간문화재 조정 범패 작법 시연(문화회관)
1980.5 독일 <베를린 음악제> 초청 영산재 집전
182.79 하와이 <달마사> 수륙재 집전 (진주만 원폭 피해자 원혼들을 위한 재)
1985 베를린 음악제 및 구라파 한국대표 순회공연
1987.7 일본 <보현사> 수륙재 집전
1988.6 <제1회 아시아 민속축제> 한국대표 참가
1990.7.15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전수자 인증
1990.6 <알라스카 하지(夏至) 축제> 한국대표 참가
1991,3 <로마교황청 성음악대학 합창단>과 함께 범패 연주
1991.11 <한일불교 문화교류협회> 초청 영산재 시연(일본)
1993.4 <보문합창제> 범패, 작법 시연(세종문화회관)
1994.6 <국립민속박물관> 주최 영산재 시연
1995.4.20 만둥만화 육법공양에서 육법공양 무대시연(문화체육관)
1995.7.15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 이수자 인증
1995.12.3 <한동희스님 영산대작법> 공연(국립극장 달오름)
1995.12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포교상> 수상
1996.5 독일 국제교류 초청 <한국문화 불교전통 예술> 범패 시연(함부르크)
1996.10 <월하문화재단 > 초청 "Voice of Korea" 미국순회공연
1997.9 대만 타이페이 <세계불교 교류> 영산재 시연(대만 국립문화관)
1997.11 미국남부 <한국 3대 성악 국제문화교류> 영산재 시연
1999.4 한국의 범패시리즈 1집, 2집(산사의 향기) CD 및 카세트 테잎(아세아레코드)
2000.5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 > 육법공양 시연(동대문 운동장)
2000.5 [5월 문화인물 '진감국사의 달] 기념 초청공연(국립국악원 예악원)
2000.5 국제교류재단 주최 <불교음악, 불교무용> 공개세미나 참석, (하와이대학, 클리브랜드미술박물관, 한국LA 문화원, 시애틀동양미술박물관)
2000.10 코리아 소사이어티 초청 <한동희스님 영산대작법> 미국 7개주 순회공연
2001.4 국립국악원 50주년 <불교예술의 미> 출연
2001.7 일본 동경국립극장 < 영산재 초청공연> 출연
2002.5 2002 아시아 현대음악제 출연
2002.5 현대 무용극 <페미 타지 > 출연(예술의 전당)
2002.6 월드컵 성공기원 영산재 출연
2002.9 하늘과 땅의 소리 <천지 여음/ 1부 범패 > 출연(삼청각)
2003.9 조계종 주최 < 영산재 > 집전 (조계사)
2004.2 <여무-허공에 그린 세월> 출연(국립국악원 예악당)
2004.4.29. 『한동희 스님의 육법공양』 공연 (호암아트홀)
2004.6.29.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불교의식 시연(중앙승가대학교)
2004.8.2. 제1회 모스크바 인비월드 workshop 진행 (INBI WORLD center)
2004.11.15 한국불교무용음악과의 만남 출연(LA UCLA Schoenberg Hall)
2005.8.15. 제2회 모스크바 인비월드 workshop 진행 (INBI WORLD center)
2005.9.4. 사단법인 동희범음회 설립기념공연 '범음' 공연(국립극장 달오름)

기타 경력

연도 내용
1959.3.5. 박송암 문하 상주권공 수료
1961.4.5. 박송암 문하 각배 수료
1964.4.20. 박송암 문하 영산 안차비 수료
1968.6.30. 박송암 문하 짓소리 수료
  • 이상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13. (사)동희범음회/동희불교문화원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dongheesunim/D5Or/2 ) 영산재보존회(홈페이지, http://yeongsanjae.or.kr/bbs/content.php?co_id=senu0201 )

인적사항

문중 청량사(淸凉寺)
생활신조 끊임없는 노력
상훈 영산대작법 시연 공로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포교상 수상 수계제자 도윤(導允)·도법(導法)

활동 및 공헌

출생과 출가

동희(東熙)스님은 1945년 8월 5일 아버지 한상익과 어머니 권점길 사이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이름은 한희자이다. 서울 청량리 청량사에서 여섯 살의 어린나이로 상길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되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도 전혀 모르고 사물에 대한 판단이 제대로 서기도 전에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절에 오게 된 것이다.

범패공부 시작

그러나 총명함과 영특함이 남달랐던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염불소리만은 귀에 쏙 들어왔다고 한다. 염불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큰 소리로 아침에 들었던 스님들의 염불을 음률까지 흉내 내면서 달달 외웠다고 한다. 누가 보아도 다겁생에 염불과 인연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하여 스님은 아홉 살 때부터 법당에 들어가 염불을 하게 되었다. 그 이 후 12세에 사미니계를 받고 당대 어장이신 고(故) 박송암 스님께 범패 공부를 시작했다.

스님은 염불을 대처승한테 배웠다. 그래서 얻어진 별명이 '새끼 대처'였고, 스님이 염불을 하러 가면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선종이 우리 불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만큼 강원이나 선방에 가서 참선을 하며 생활하는 것이 같은 승려들 사이에서도 우위를 차지했고 우월감을 가졌으며, 염불을 하며 재(齋)를 지내는 스님에 대한 대접은 그리 좋지 못했다. 주변의 도반스님이나 어른스님들은 스님을 만나기만 하면 '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굳이 하려고 하냐.'며 질책을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스님은 괜히 억울한 마음도 들고 분이 나기도 하여 멀리 피하곤 했다.

더군다나 스님의 몸이 약하다 보니 은사스님은 강하게 만류를 하셨고 때로는 매도 들었지만 동희스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은사스님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낙해주셨다. 지금은 오히려 “너 죽을 줄 모르고 학교며 어디며 여기저기 공연 돌아다니면 건강은 언제 챙길 거냐?”하며 걱정을 해주시고, 스님이 간혹 자신의 길에 회의를 느낄 때면 곁에서 용기를 북돋워주신다.

동희스님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서울 신촌에 있는 봉원사를 오르내리며 고단한 범패 공부를 시작했다. 그 시절 바라춤을 춘다며 틈만 나면 법당 뒤로 돌아가 연습하는 바람에 후원의 냄비 뚜껑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특히 범패의식은 너무 근사했어요. 그래서 못 쓰는 냄비 뚜껑 두개를 구해서 양쪽에 손잡이를 만들어 바라로 삼고, 멀쩡한 냄비를 몰래 내와서 태징(金鼓)으로 삼았죠. 그리고 매일 산에 올라가서 두들기며 염불하고 혼자서 범패 흉내는 다 냈습니다. 그게 제 어릴 적 유일한 놀이였던 셈이죠.” 부처님 없이 범패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작은 불상까지 진흙으로 직접 만들어 모셔놓았다고 한다.

묘음(妙音)

처음 범패를 배울 무렵 송암스님이 너무나 엄격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의식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잘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대중이 있거나 없거나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네 스승이 누구냐! 그 스승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다시 배워라.” 많은 대중들이 있는 가운데 송암스님 앞으로 불려나가 이런 꾸지람을 듣는 일은 거의 2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한번은 나비무를 하는데 팔이 쳐졌다며 태징체가 날아온 적도 있었다.

이렇듯 가르침에 있어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으시며 엄격하기가 이를 데 없는 스승님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어려움을 잘 견뎌낸다며 격려해주시는 따뜻함 때문에 용기를 내어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영산재에서 나비춤을 추게 되었다. 스님은 작은 몸짓으로 영산회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염불 구절구절 부처님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환희심으로 승화되었다. 그동안 스승님께서 누누이 이르시던 '묘음' 이라는 말의 뜻을 마음으로 전수받아야 한다는 얘기 등 그간 어렴풋이 떠돌던 가르침들이 확연히 인식이 되었던 것이다.

“입으로만 하는 염불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범패는 묘음(妙音)이거든요. 부처님의 세계를 온전히 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염불 속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범패공부를 할 때 스승의 마음자리를 배우려는 노력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사사(師事) 및 영산작법 이수자 등록

동희스님은 사십여 년 동안 송암스님께 사사를 받아왔다. 송암스님께서 염불을 하시면 스치는 숨결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세우곤 한다. 배우고 또 배워도 늘 새롭고, 언제나 어려우며, 항상 아쉬움이 남는 까닭이다. 날로 연로해지는 큰스님의 건강만이 동희스님이 모질게 잡고 있는 유일한 욕심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이수자인 동희스님은 1995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범패승 계보에 올랐다. 스님은 그 계보에 오르기까지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계보에 오르기 위해서는 1년에 한 번씩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평가회에 참여해야 했다. 평가회는 일종의 대회형식으로 치러졌다.

스님은 당당히 도전하여 무대에서 범패를 시연했다. 시연을 무사히 마치고 1년 후, 모든 조건이 다 좋고 그 기능은 완벽하지만 비구니이기 때문에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문이 왔다. 화가 난 스님은 관리소를 찾아갔다. 관리소 측에서 말하기를 전국적으로 조사해본 결과 계보 상 그동안 비구니가 범패나 염불을 이어온 전례가 없다며 예외는 존재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즉, 비구니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내외세계적인 공연활동

송암스님의 뜻에 부합이라도 하려는 듯 스님은 1993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를 수료하는 등 불교의 거룩한 가르침을 더 많이 더 깊이 수용하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들이 쌓여,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마음의 소리로 불세계(佛世界)를 그리는 범패의 밑거름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하와이 달마사의 초청을 받아 수륙재를 집전하러 간 적이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에서 원폭의 피해를 입어 전사한 원혼들을 위한 재였다. 하와이에서 진주만까지 800여 명의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군함을 타고 가면서 염원을 담아 염불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스님의 염불에 젖어 군함 안은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색목(色目)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가락을 이해하여 우는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스님도 눈물을 흘리며 염불을 했다고 한다.

또한 스님은 외국의 여러 학교에 초대되어 판소리, 가곡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성악인 범패를 공연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그때마다 외국인들은 아름답고 웅장하여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범패의 기본 정신인 불교는 외국인에게는 생소하고도 먼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염불 소리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명상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다.’, ‘혼의 소리이다.’ 등등의 극찬이 쏟아졌다.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 스님에게 ‘사람이 맞느냐?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며 경이롭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직하고 진솔한 그네들의 반응에 스님도 같이 감동하고 흥을 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도 스님을 초청한 적이 있으며, 앞으로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범패를 알릴 계획도 갖고 있다.

1985년 베를린 음악제 및 구라파 한국대표 순회공연, 1988년 아시아 민속축제 제1회 한국대표 참여를 비롯하여 1991년에는 로마교황청 성음악대학 합창단과 함께 범패를 세계무대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의 크고 작은 불교행사, 영산재, 수륙재, 예수재 등을 송암스님과 함께 집전했다.

동희스님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5년 우리나라의 불교예술을 선보이는 큰 무대를 처음으로 마련했다. ‘한동희 스님 영산대작법’이 바로 그것이다. 송암스님은 손수 무대에 함께 서주셨을 뿐만 아니라 추천사를 통해 동희스님의 대작불사를 아낌없이 치하해주셨다. “광복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동희스님이 전통불교 의식인 범패의 원형을 보존 전수하기 위해 무대에 올리는 이 공연의 의의는 참으로 큽니다. 본인에게 근 40년 가까이 사사를 받아온 동희스님이 이렇듯 큰 무대를 마련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수행 정진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불교교단과 나아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에 큰 디딤돌을 놓아가는 대원력이라 하겠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스님, 태고종 총무원장 스님,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회장스님 등 여러 불교계 어른스님들의 격려 속에 조촐하지만 성대한 무대가 올려졌다. 국립극장에서 행해진 그날 공연은 한마디로 감동의 무대였다. 객석은 성스러운 불교의식과 범패의 아름다움에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무대와 객석은 온몸을 다 바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기도의 마음, 그 한마음으로 서로 이어졌다. 또한 기획, 연출, 무대미술, 의상, 사진 등을 전문인으로 구성하여 불교의식을 최초로 무대화한 작업이었다. 이 공연은 교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에 큰 관심을 일깨우며 성공리에 마쳤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조계종 포교원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동희스님은 ‘그 모든 것은 불가에 몸을 담은 불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으며, 스승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스님은 의식의 흐름보다는 한 작품으로서의 예술 공연에 초점을 맞춰 의상도 직접 준비했는데, 옛날을 기억하며 가사장삼의 색상을 복원해 영산작법의 진수를 맛보게 했다.

오랜 원력을 세워 한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이 무대는 어쩌면 맥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불교문화의 원형을 박송암 스님을 증명법사로 후학에게 선보인 것이었으며, 이는 뒤늦은 감이 있으나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오랜 숙원이었다. 스님은 그 원형 찾기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공연을 했다고 한다.

후학지도

후학지도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동희스님은 범패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승속을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펴고 있다.

동희스님은 영산보존회 부설법음대학, 삼선승가대학, 동덕여자대학교, 운문사승가대학, 서울 대학교, 한국종합예술대학, 국립국악원 무용단 등에서 의식무용을 지도했다. 그때마다 어떻게 하면 쉽고 바르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심하여 스님만의 독특한 악보와 무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요즘 사람들이 너무 결과에만 매달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비디오나 녹음테이프가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너무 거기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범패는 악보도 무본도 없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것은 곧 오랜 연마를 통하는 과정 속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받는 가르침이 더 많다는 뜻이다.

“특히 스님들은 서두르지 말아야 해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만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결과는 자연히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배울 때도 잘 못해서 걱정들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 나가야 해요. 처음부터 잘하려는 욕심이 가득하면 배울 때 적극적이질 못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틀리면 혼이 나기도 하면서 그저 미련하다 싶을 만큼 한 단계 한 단계 과정을 밟으면 되는 거죠. 이제 앞으로는 정말 미련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예요. 우리 같은 스님들이 그것을 해야죠.”


스님은 범패를 영상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단순히 기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송암스님과 무언의 대화로 나눈 부분까지 원형 그대로 남겨놓기 위한 작업이다.

팔부금강은 이 도량을 옹호하소서.
허공신은 속히 나아가 천왕을 보필하소서.
삼계의 모든 하늘에 천왕 모였으니
불국토의 상서장엄 이루어지이다.

스님은 2004년 4월 29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한동희 스님의 육법공양' 공연을 하여 불교의 전통종합예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 동희스님은 '소중한 불교유산인 육법공양의 모습을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해서 그 문화적 가치와 정신을 널리 선양하며 불교를 알리고자 이번 무대를 마련했으며, 특히 40여 년간 불교 예술을 가르치다 3년 전에 입적하신 송암스님의 뜻을 기리는 의미도 함께 포함돼 있다.'고 공연의 소감을 말했다.

동희스님은 동덕여자대학교, 삼선승가대학 강사와 영산재보존회 부설법음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한국종합예술대학, 동희법음회연구실 등에서 범패와 작법을 지도했다.

영산재의 대중화와 한국 불교예술의 해외 전파에 앞장서온 스님은 2004년 6월 한국에서 열린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8th Sakyadhita)에서도 범패와 작법을 선보여, 세계인에게 1700년 한국 불교문화예술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동희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도윤(導允)·도법(導法)스님이 있으며, 범패 전수제자로는 비구 덕림·법운·선각스님, 비구니 현준·현수·진성·선혜·도영·증문·지수·인화·선정스님, 재가불자 이명숙, 민연옥, 김미숙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대은(大恩)스님 본항목 대은스님(大恩, 1951~2014) 淨岸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은스님(大恩,_185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예순(禮順)스님 혜종(慧宗)스님 ~의 제자이다
지장암 ~에서 출가하다
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기린선원 ~을 중창하다
천진암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백암선원 ~을 창건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