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暎岩)스님

biguni
공선정행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22일 (목) 06: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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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영암 임성(映巖 任性, 1907~1987)
  • 생애·업적

1907년 8월19일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박석순(朴碩淳) 선생과 모친 임봉필(任奉必) 여사의 3남3녀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속명은 기종(淇宗).
어려서 사서삼경 등 유학을 공부했다. 우연히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보다 “제행무상일체공(諸行無常一切空) 즉시여래대원각(卽是如來大願覺)”이란 구절을 읽고 발심했다. 17세(1924년)에 양산 통도사에서 주청담(朱淸潭)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구하(九河)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오대산에서 한암(漢巖)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1932년 청담.자운.종묵.혜천스님 등 도반과 울진 불영사에서 3년 결사를 했으며, 이때 대중 외호의 소임을 맡아 도반들이 정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1938년 오대산으로 주석처를 옮겨 월정사 재무로 종무행정을 보았다. 빈약한 사찰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사찰림(寺刹林)을 수호하고, 신심(信心)을 북돋우기 위해 적멸보궁 봉찬회(奉讚會)를 조직했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월정사 총무를 맡아 과도기의 혼란에서 사찰을 지켰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가 병화(兵火)로 소실된 후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울진 동림사, 울산 해남사 등의 포교사로 취임했다. 종단 정화 후 통도사 총무를 역임했으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당시 해인사는 해인대학 재단과 농지소송사건 등으로 살림이 어려웠다. 스님은 팔만대장경 정대불사(頂戴佛事)를 창안하여 봉행하고 불철주야로 기도했다. 이때 꿈에 백마(白馬)가 먹구름을 헤치고 동쪽으로 달려가는 꿈을 꾸었다. 그 이후 고등법원에서 패소한 사찰 관련 재판을 대법원에서 역전시켜 위기에 처한 해인사를 구했다. 서울 봉은사 주지 시절에는 7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2만여 평의 토지를 확보했으며, 대웅전을 확장 중건하는 등 도량을 일신했다. 1979년에는 운허스님에 이어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역경불사에 나섰다.
1967년.1975년 총무원장, 1974년 중앙종회 의장, 1978년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종단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1967년.1979년 동국대 이사장에 취임해 건학이념 구현과 교육입국에 공헌했다.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87년 6월3일(양력) 오전7시30분 서울 봉은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0세, 법납 65세. <마음 없는 마음>이란 어록을 남겼다. 유고 법문집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가 있다. 스님의 비는 봉은사와 해인사에 모셔져 있다.
※ 출처 : 불교신문(2010.01.20 11:02) 81. 영암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