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 친가의 출가

biguni
Daramsalra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13일 (월) 18: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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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책자

  • ❁ 정찬주 장편소설 『인연.1』과 『인연.2』 :응민스님과 일타스님 일가의 출가 이야기
  • 정찬주 장편소설 『인연 1』, 『인연 2』

[출가의 서광]

일타스님의 외증조할머니인 안성 이씨 평등월 보살은 충청도 공주 땅에 자리잡은 광산 김씨 영인(永仁)에게로 10대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다. 평등월 보살은 늙으막에 비록 혼자가 되었지만 만수(萬洙), 완수(完洙), 은수(恩洙) 세 아들의 효성은 지극했고 며느리들도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였다.

어느 날, 비구니스님 한분이 탁발을 하러 왔다. 비구니스님은 집안에서 가장 큰 바가지에 쌀을 가득 담아 바랑 속에 부어주는 할머니를 향해 불쑥 말을 걸었다.

"할머니, 요즘 세상사는 재미가 좋으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을 일사천리로 늘어놓았다.

스님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업?"

충청도 사람들은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업'이라는 말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은 전율을 느낀 할머니는 스님께 사정을 했다.

'제발 업(구렁이)만은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할머니의 간청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정녕 업이 되기 싫거든 오늘부터 바깥출입을 금하고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시오."

말이 끝나자 비구니스님은 바랑과 삿갓을 방에 놓아 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바랑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뒤 할머니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같이 염불기도 하다가 8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마을 사람들이 '불이 났다' 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했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다.

외증조할머니의 장례를 마친 일타스님의 외가 식구들은 그때까지 생각하던 불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외증조할머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저 노인장이 삶의 끝에서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염불을 하는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이변이 일어나자 절실한 신심으로 변한 것이다.


[일타스님 외가의 출가]

가장 먼저 출가한 이는 일타스님의 큰외삼촌인 김학남(金學男, 1902~1955)씨다. 4형제 중 맏이였던 큰외삼촌은 부인과 하나뿐인 아들을 남겨둔 채 천진도인 혜월(慧月)선사의 제자로 출가하여 법안(法眼)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뒤 법안스님은 오대산 금강산 천성산 지리산 등지의 이름있는 선방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참선정진했다.

두 번째로 출가한 사람은 일타스님의 외할아버지 김만수(金萬洙, 1878~1947)씨로서 어머니의 방광과 아들의 출가 이후, 수년동안 거사의 신분으로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 송광사 삼일암 등의 이름있는 선방을 전전하다가 셋째 아들인 용학(容學)이 장가를 들자 불러 물었다.

"얘야, 너도 이제 장가를 갔으니 어른 아니냐? 내가 없어도 머슴들 데리고 농사지을 수 있겠느냐?"

"예."

젊은 혈기에 아들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그 길로 출가하여 '추금(秋琴)'이라는 법명으로 용맹정진했다.

세 번째 출가자는 일타스님의 막내 외삼촌인 김용명(金容明)씨였다. 막내 외삼촌은 일본 명치대학(明治大學)을 다닌 수재로서 온 집안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끊어진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뒤따라오던 사람이 병원으로 옮겨 3일만에 의식을 되찾았고, 그때 병실에서 <불교성전>을 보다가 홍법대사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이라는 시를 읽고 발심했다. 193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배를 타고 귀국한 용명은 고향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양산 통도사로 가서 윤고경(尹古鏡) 대강백을 은사로 모시게 되었고 '진우(震宇)'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때 힘이 빠진 것은 셋째 외삼촌 용학이었다. 큰형은 스님이요, 둘째형은 방랑자, 일년 내내 백마지기가 넘는 넓은 땅을 농사지어 그 비싼 학비를 보내었건만, 믿었던 동생(용명)마저 스님이 되니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며칠 동안 바람쐬고 오겠다" 는 말을 남기고 찾아간 곳은 큰형님 법안스님이 계신 해인사 백련암이었다.

법안스님은 '혼자서 대가족 살림을 꾸려나가기 힘드니 하산하여 집안을 맡아달라'는 동생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고 오히려 출가를 권유했다.

"무엇하러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가? 스님 되어 절에서 살아보게. 이 절이 바로 극락일세."

거듭되는 권유와 한달 남짓 절에 머물면서 느낀 매력 때문에 셋째 외삼촌 용학도 마침내 자운(慈雲)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보경(寶瓊)'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어지는 아들들의 출가로 집안에 여자와 아이들만 남게 되자, 크게 상심한 외할머니 강씨(姜氏)가 직접 백련암으로 향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두 아들의 권유에 못이겨 해인사에 눌러앉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나선 사람은 수년동안 만주로 러시아로 떠돌아다니다가 막 귀국한 일타스님의 둘째 외삼촌인 김용남(金容男)씨였다.

"해인사만 가면 함흥차사가 아닌 해인차사가 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 가서 백련암을 불태워 버리고라도 어머니와 형제들을 데리고 오리라."

남은 가족들에게 다짐을 하며 집을 나선 천하한량 둘째 외삼촌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또 설득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요즘 같은 험난한 세상에는 중이 되는 것이 최고로 좋습니다. 옛사람들이 무릉도원 찾아갔듯이 우리 모두 해인사로 떠납시다."

1940년, 마침내 외가의 모든 식구들은 전 재산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향했다. 그때 법안스님의 장인, 장모와 아들 둘도 함께 출가했고, 집안을 돌보던 머슴들 가족 6명도 따라서 출가함으로써 일타스님의 외가쪽 35명은 모두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타스님 친가의 출가]

일타스님의 친가 식구는 모두 6명이었다. 아버지 연안 김씨 봉수(鳳秀)와 추금스님의 맏딸인 어머니 김상남(金上男) 사이에서 경희(敬喜), 사열(思悅), 사의(思義), 명희(明喜)가 태어난 것이다.

스님의 친가에서 처음으로 출가한 사람은 맏딸인 경희였다. 1940년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자 했으나 어머니는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직 공부만 하고 싶어 외할아버지인 추금스님에게 가서 자문(諮問)했다.

"그야, 스님이 되면 되지."

이 한마디에 아무도 모르게 출가하여 금강산 법기암에서 대원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응민(應敏)'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맏딸 다음으로 출가한 사람은 일타스님의 형인 사열, 곧 월현(月現)스님이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면 풍운조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는 외할아버지의 한 말씀에 팔만대장경을 배운다며 해인사로 출가했다.

맏딸과 맏아들이 출가하고 친정식구들 모두가 해인사로 들어가자 일타스님의 어머니도 출가를 결심했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인 아들 사의(일타스님)가 걱정이었다. 1941년,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마칠 때까지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마련한 다음 막내딸 명희(쾌성스님)를 데리고 문경 윤필암으로 들어갔다.

1942년 일타스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김봉수)는 수덕사 만공선사를 찾아가 출가했고, 사의(일타스님) 역시 외할아버지 추금스님의 손을 잡고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일타스님의 친가와 외가 41명은 출가의 길로 떠났다.


[주요행장]

외할아버지인 추금스님이 비록 늦게 출가했지만 젊은 수좌들의 귀감이 될 만큼 열심히 정진하여 견성했고, 말년에는 전라도 태고사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스스로 장작을 쌓고 불을 붙인 다음 올라가서 자화장을 하는 이적을 보이기도 했다.

큰외삼촌인 법안스님 또한 오직 발우 하나, 누더기 한 벌로 살면서 10여 년 동안 용맹정진했고, 35세가 넘자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9년 동안의 지장기도를 통해 오도를 하신 분으로, 1955년 서울 삼각산 도선사 석불 뒤의 바위에 앉아 입적했다.

둘째 외삼촌 영천스님은 속리산 경업대 토굴에서 7일동안 선정삼매에 들어 걸림 없는 경지를 이루었고, 셋째 외삼촌 보경스님은 세속에서도 살림을 잘 살았지만 출가 후에도 역시 살림을 잘 살아서 부산 감로사 창건 및 사찰 중건 등 많은 불사를 행했고, 기도정진과 함께 선방살림을 맡아 수좌들을 돌보는 소임을 헌신적으로 행했다.

막내 외삼촌 진우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전전하면서 도를 닦아 운봉(雲峰), 경봉(鏡峰), 전강(田岡)선사 등 여러 고승들로부터 정진력을 인정받았고 스스로 지은 오도송을 전국의 선방에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일타스님의 아버지 자응당(慈應堂) 법진스님은 1986년 입적하는 날까지 그야말로 '깜깜한 어둠속에서 만져보아도 스님' 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묵묵하면서도 깊은 자비심을 품었던 분이다.

누나 응민스님 역시 '중노릇' 잘하여 만공선사로부터 '정진제일 수좌'로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비구니스님의 귀감'으로 살다가 1984년 12월 15일에 7일간의 용맹정진을 마치고 앉은 채 입적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