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장일스님(長一, 1916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8월 31일 (수) 20:18 판 (사찰)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도림(道林) 장일(長一)스님은 독립운동가 가족으로서 나라와 가족을 잃은 설움을 안고 출가하였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처럼 스님으로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수행정진 득도하여 후학 양성과 포교에 전념하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6 경북 대구 출생
1937 팔공산 부인사에서 오전(俉田)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9 동화사에서 청허(淸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2~1997 윤필암, 남해 기사굴, 태백산 백련암, 김룡사, 석남사, 대원사, 내원암 등 안거 성만(47년간)
1941 해인사에서 경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4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958 동화사 내원암 주석
1985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회장 혜춘스님과 청해 문도회 결성
1997.12.11 입적(세수 82세, 법랍 61세)
문중 청해(靑海)문중
수계제자 묘찬(妙璨)·벽해(碧海)·원명(圓明)·백연(栢演)·법종(法宗)·혜원(慧圓)·덕형(德衡)·태성(泰性)·정행(正行)·지도(智道)·정현(正現)·원종(圓宗)·주광·명안·정현(正現)·도명(道明)·휴심(休心)·명지(明智)·정근(正勤)·명성(明惺)·혜우·혜총·영진

활동 및 공헌

출가

도림(道林) 장일(長一)스님은 1916년 3월 15일 대구시 봉산동 11번지에서 아버지 강성윤 거사와 어머니 서연화심 보살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며, 이름은 강순득이다. 장일스님은 후학들이 좋은 말씀을 부탁드리면, “얘기는 무슨 얘기, 밥 먹고 똥 누면 되지. 사람이 사는 것은 한바탕 연극이나 같아.”하며 호탕하게 웃곤 했다. 그렇게 스님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는 생활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장일스님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로서 스님이 두 살 때 대구에서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위해 황해도로 피난을 가서 일제의 압제 하에 처절한 수난을 겪으셨다. 스님은 7세의 어린 나이에 비밀 서류를 전해주는 등 '꼬마 스파이'로 성장했고, 나라 잃은 아픔을 절실히 느끼면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1939년 스님의 세수 24세 되던 해, 세 분의 오라버니가 러시아로 망명한 후 돌아오지 않자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설움을 뼈저리게 경험한 스님은 '서산·사명대사처럼 이 나라를 구하리라.' 라는 실로 원대한 뜻을 품고 입산했다. 스님은 출가할 때, 세 아들의 생사조차 알 길 없어 비통함에 잠긴 어머니께 차마 출가의 뜻을 알리지 못하고, 집 앞에 있는 연못가에 고무신을 나란히 벗어놓았다. 스님이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려는 각별한 배려였다. 그 길로 스님은 며칠 밤 연이어 꿈속에서 선몽(先夢) 받았던 해인사 국일암을 찾아가 오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 후 1941년 청허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6년 청화 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기도와 감응

스님이 첫 방부를 들였던 당시의 국일암은 폐허에 가까웠고, 법당에 있는 촛대와 다기는 만지기만 해도 조각조각 떨어져 여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주민들과 산중 스님들은 보릿가루와 옥수수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스님은 희랑대의 나한님이 영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7일 기도에 들어갔다. 스님이 기도를 회향하고 부산 영도로 탁발을 나가니, 시주자(施主者)들이 이구동성으로 꿈속에 서 스님을 뵈었다면서 향로며 다기를 비롯하여 많은 곡물을 시주했고, 또 정부 당국이 '해인사 전 대중 380인의 식량을 6개월간 무상 배급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스님의 이러한 기도정진력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30대 초반에 능엄주 기도를 통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생리적 현상을 벗어나 오롯한 수행정진에만 힘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수행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인 장일스님은 공부 또한 뒤질세라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체 중생을 자비로 대하라.'는 향곡 큰스님 법문을 듣고, 남보다 일을 더 많이 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또 밤에는 신을 삼고, 낮에는 나무를 하면서 공양주와 부목 일을 겸했는데, 스님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내가 나를 찾아보리라.'하는 열의가 불타고 있었다. 해인사 국일암에서 칠성각 불사를 원만히 마치고 낙성식을 치르기 위해 장을 보러간 스님은 그곳에서 응민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윤필암으로 동안거 결제를 하러 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장바구니를 집어던지고 응 민스님을 따라 납자의 길에 올랐다. '이 생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 치고 꼭 나를 찾아보리라.'는 대원을 세우고, 무소유의 걸망을 지고 첫 결제에 들어간 것이다. 6·25전쟁으로 전국의 선방과 강원 등이 어수선하자 스님은 남해 금산 기사굴에서 홀로 정진 했다. 바닥에는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서 정진하노라면 밤마다 괴이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하루는 독을 품은 커다란 지네가 바위 구멍 속에서 기어 나와 정진하는 스님 앞에 떡 하니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었으나,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네는 경계심을 풀고 느긋하게 스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이에 스님은 “네가 먼저 성불하면 나를 제도하고, 내가 먼저 성불하면 너를 제도하리라.”하면서 하찮은 미물이라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이에 감응을 받았는지 지네는 며칠이 지난 뒤 몸을 벗었다.

용맹정진

때는 무더운 여름 장마철이라 한번 비가 오면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는데, 산의 모든 물은 이 바위굴을 통해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 자칫 휩쓸리기라도 하면 천길 만길 벼랑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럴 때면 스님은 바위 한 모퉁이에 몸을 바싹 붙이고 위법망구(爲法忘軀)해야 공부를 이룰 수 있다는 일념으로 버티며 처절한 한철을 보냈다. 스님은 '고악아암(高岳峩巖)은 지인소거(智人所居)요, 벽송심곡(碧松深谷)은 행자소서(行者所棲)니라.'라는 게송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 다니면서 수행했다. 스님이 팔공산의 깎아지른 벼랑 위 동굴에서 수행할 때의 일이다. 짚 30단을 준비하여 절반은 바닥에 깔고, 반은 주위에 병풍처럼 두르고 오직 생사를 해탈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 여러 마사(魔事)가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스님은 조금도 동하지 않았다. 오직 '일심불생(一心不生)이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하는 한 생각에 모든 경계가 일시에 사라지고 성성한 화두 하나만 남을 뿐이었다. 예로부터 도고마성(道高魔盛), 즉 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마장이 성한다고 했다. 스님에게도 그러한 인욕의 과정이 없지는 않았다.

득도 인연(得道因緣)

윤필암에서 3년 결사를 할 때의 일이다. 1955년, 스님의 나이 막 불혹을 넘긴 때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무릎 아랫부분에 습진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참을 수 없이 가려워서 돌로 문지르면 시커먼 피와 고름이 나왔다. 이때 스님은 성철 큰스님을 뵙고 기도 방법을 물었다. 큰스님은 같이 간 도반들에게는 기도의 방법을 제시해주셨으나, 유독 스님에게는 한 말씀도 해주지 않으셨다. 이에 스님은 분한 마음이 생겨 도반을 따라 만 배 기도를 시작했다. 신심일여가 되어 기도하다가 잠깐 조는데 꿈에 하얀 소복을 한 여인이 30여 명의 대의왕(大醫王)을 모시고 왔다. 그 대의왕이 파란 병에 들어있는 약을 스님에게 먹여주었는데 그 맛이 이 세상 그 어떤 맛과도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대의왕은 스님에게 향 두 개비를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로 그렇게도 심했던 습진은 허물이 되어 마치 나무껍질 벗겨지듯 떨어지고 그 자리에 뽀 얀 새살이 올라왔다. 색마(色魔)를 항복받고, 오랫동안 앓고 있던 위장병까지 모두 치료되었다. 이렇게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스님은 이후 더욱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은 설봉화상께 나아가 여쭈었다.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義)가 무엇입니까?" “오늘이 며칠인가?" “8월 24일입니다.” “바로 그것이라네.”

이에 스님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태백산 백련암 터의 거의 허물어진 집에서 겨우 비를 피하고 강냉이를 심어 3년 동안 두문불출 수행에 전념했다. 한 겨울 엄동설한에도 스님의 온 몸에 서는 정진의 불꽃이 번득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공을 초월하여 선정에 들어 비몽사몽간에 스님이 물을 길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 여인이 나타났다. 한 분은 문둥병에 걸려있고, 또 한 분은 아는 분을 모시고 와서 목욕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님이 여인들이 목욕하던 우물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숯 세 덩어리가 있었다. 이에 스님이 조심스럽게 한 여인께 물었다. “저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다. “본래 있는 것이니, 건드리지만 않으면 상관없네.” 여인의 말에 스님은 마음이 활연히 열리고 깨달음을 얻었다. '숯 세 덩어리는 무명(無明)으로 인한 삼업(三業)이라. 삼업은 망상분별(妄想分別)로 동(動)하는 것이니, 오직 망상분별심만 없으면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니라.” 그 후 스님은 선방이든 토굴이든 인연이 닿는 모든 곳에서 정진과 불사를 겸하면서, 복(福)과 혜(慧)를 함께 닦았다.

무쇠라도 뚫을 용맹심

한번은 경주의 한 암자에서 중창 불사와 추수를 끝내고 더 이상 그 암자에 있을 필요가 없음을 느껴 같이 공부하던 상좌에게 선방으로 가자고 했다. 마침 비가 내리는지라 하루만 더 머물다 가자는 상좌스님을 뒤로하고 빗속을 휘적휘적 걸어 선방으로 향했다. 장일스님은 한 평생 정진하는 동안 모든 물욕을 떠나 청빈한 생활을 했다. 길을 가다가도 굶주리거나 헐벗은 이가 있으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몇 십리 길을 걸어 다니기를 업으로 삼았다. 내원암에 인연처를 두고 석남사에서 인홍, 혜춘, 성우스님과 함께 3년 정진결사를 회향하고 돌아온 것은 1961년의 일이었다. 내원암은 조선 인조 4년 학찬(學贊)스님께서 창건한 사찰로서, 스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인 1958년에는 대들보와 기둥만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방과 요사채 불사를 하여 옛 선원의 위상을 바로 세웠다. 스님이 내원암의 원주 소임을 살면서 대중외호(大衆外護)를 하다가 1975년 동안거 첫 결제를 나기 위해 손을 걷어붙이고 김장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방부를 들이기 위해 몇몇의 납자들이 찾아왔는데, 입승 스님으로는 성우스님을 모시기로 했다. 그런데 납자들로부터 성우스님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석남사에서 입승을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춧가루로 빨갛게 물든 손을 대충 닦고 그 길로 걸망을 지고 성우스님을 모시고자 석남사로 떠났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지리산 대원사를 찾아 안거수선에 들 정도로 스님은 정진할 때만큼은 젊은이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무쇠라도 뚫을 만한 용맹심으로 도전했다.

불교정화운동 당시 성철스님과의 일화

『나의 행자시절』 작가 박원자에 의하면 장일스님은 불교정화운동 당시 많은 일을 하셨는데, 특히, 정화운동에 앞장 선 청담, 효봉스님 등을 도우면서 불사금을 모으는 일을 하셨다. 그 때 스님께서 종단에 헌신하셨던 일은 제방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불사금을 내놓을 만한 신도집에 가서는 수행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은 채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불교정화불사 때 장일스님은 성철스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했다고 한다. “내가 (성철)큰스님을 만나자 마자 대들다시피 퍼부었어요. 큰스님이라고 이름이 나신 분이 종단이 이렇게 어려울 때 산속에 들어 앉아 무얼 하느냐고, 당장 나오라고 소리 쳤지요. 그랬더니, 큰스님이 진노하셔서 ‘저 비구니 밖으로 내쫒으라’고 하시더군요. 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한밤중에 내쫓겼는데, 문밖으로 나오니 칠흑 같은 어둠속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더군요. 큰스님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호랑이를 보고 간담이 서늘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일스님처럼 당찬 분이 아니면 감히 당시 도인으로 제방에 이름을 떨치던 성철스님을 찾아가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님은 그만큼 대단히 의협심이 강하고 대담했던 분이다. [출처] 박원자, 『나의 행자시절』, 제3권, 2008. 중 장일스님에 관한 일화 “가슴 아프게 울었던 두 번의 울음”에 대하여 작가(박원자)가 비하인드 스토리로 다음카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https://cafe.daum.net/vajra)”에 게재된 내용

청해문중(靑海門中) 결성

무엇보다 중요한 스님의 공덕은 바로 비구니 문도인 청해문중(靑海門中)을 결성한 일이다. 스님은 비구니의 화합단결과 위상정립을 토대로 법륜상전의 소명을 후대에 길이 남기겠다는 취지로 1985년 10월 27일 당시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회장인 혜춘스님 등과 함께 청해문도회를 태동시켰다. 청해문도회는 현재 동화사 내원암, 김천 청암사 백련암, 경기도 의정부 석림사, 경북 상주 용흥사, 해인사 약수암 등 5개 사암의 계맥을 계승하는 대표적인 비구니 문중의 하나이다. 스님은 나이가 들면서 보름날 밤이면 경내를 거닐며 수심에 젖었다.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 허 공에 내뱉는 아쉬움은 납자들의 수행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었다. “보름날도 아무도 없고 열엿샛날도 아무도 없구나. 파거불행 노인불수인데…” 예전에는 달이 밝으면 달빛을 의지하며 공부하는 대중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토록 목숨을 건 수행자가 드물다는 스님의 절규요, 한탄이었다. 스님은 '수레가 부서지면 갈 수가 없듯이 몸이 늙으면 수행하기가 힘들다.'는 경구에 빗대어 납자들의 용맹정진을 몹시도 그리워했다.

입적

장일스님은 그렇게 한평생 참선 수행을 통해 나를 찾고 회향의 삶을 일구기를 갈망했으며, 그 자신 사바의 스승으로 우뚝 섰다. 그리고 1997년 12월 11일, 늦은 밤, 정진대중을 불러 한마디 일렀다. “남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 부지런히 갈고 닦아 견성회향의 주인공이 되거라.” 그것이 스님이 마지막 당부요, 유훈이 되고 말았다. 평생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던 자신의 구도 여정을 후학들에게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이렇게 스님은 고요히 우리 곁을 떠났다. 이때 스님의 세수 82세요, 법랍 61세였다. “다른 이가 귀하게 하는 것은 내 아니 귀히 여기고, 다른 이가 탐하는 것은 내 아니 탐하노라. 흐르는 물, 밝은 달, 맑은 바람 이것이 내 평생에 탐하는 것이로다.” '자기본성(自己本性)을 깨닫는 길은 바로 자기를 장식하고 있는 모든 미망(迷妄)의 옷을 훌훌 벗고 적나라하게 되는 것이 첩경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노스님의 언행은 현로당당(顯露堂堂)하고 적나라했으며, 일평생을 정진과 육바라밀의 첫째인 보시로 생활했다. 복과 혜를 함께 갖춘 노스님의 행적은 후세의 납자들에게 길이 표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수계제자로는 묘찬(妙璨)·벽해(碧海)·원명(圓明)·백연(栢演)·법종(法宗)·혜원(慧圓)·덕형(德衡)·태성(泰性)·정행(正行)·지도(智道)·정현(正現)·원종(圓宗)·주광·명안·정현(正現)·도명(道明)·휴심(休心)·명지(明智)·정근(正勤)·명성(明惺)·혜우·혜총·영진 스님 등이 은사의 유훈을 받들어 비구니 가풍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밖에 40여 명의 손상좌와 1백여 명의 문손이 스님의 선지를 계승하고 있다

박원자 저, 『나의 행자시절』 중 일부분

[특집]나의 행자시절 (다음카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behind story Re: 아, 장일스님! 이땅의 비구니 역사 산증인인 장일스님을 떠올리면서

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됩니다. 총무원 건물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등 분규가 극에 달했던 조계사 사태가 조금 수그러들고 있을 때, 비구니 선객 스님 한 분을 취재했습니다. 해인 지의 “호계삼소” 취재를 할 때였습니다. 동진출가하셔서 수십 년 선방에만 계셨던 스님은 신심이 얼마나 깊으셨는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었죠. 조계사 어느 한 방에서 인터뷰를 하는 도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습니다..” 뭐랄까요, 불법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단호함이 매우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자그마한 몸에 아주 깨끗한 인상의 미인이셨던 분... ‘아, 저런 단호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자신이 걷는 그 길에 저만큼의 확신과 단호함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게 했던 스님이셨죠. 그 비구니스님 인상이 하도 강렬해서 그 이야기를 나중에, ‘와... 대단하시던데요..’ 하면서 당시 편집장스님에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 “사지를 갈기갈기 찢긴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물어보지 그랬어요?” 당시 편집장스님의 그 말씀을 들을 땐, 꼭 저렇게 반응해야 하나? 속으로 불만이었는데, 지나 놓고 보니, ‘그만큼 어떤 경계에도 자신 있느냐?’는 물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거나 비구니 스님을 떠올릴 때면 그때 목숨을 걸고 수행하시던 그 비구니스님의 단호한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뵌 비구니 스님 중 가장 강렬한 모습이었다고 할까요?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당시 오십대 중반이었던 스님은 지금도 선방 입승으로 제방에서 수행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행자시절 취재를 시작하면서 비구스님들만 취재하다보니, 우리나라 스님들 중 반은 비구니스님이신데, 어째서 매일 비구스님만 만나고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수소문해서 찾아낸 첫 번째 노비구니스님이 장일스님이셨습니다. 스님을 만나기 전 자신의 은사를 소개한 젊은 비구니스님은 은사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몇 통을 복사해 보내주었습니다. ‘참고하세요’ 하는 메모와 함께.. 아.. 공부하는 제자에게 보낸 그 다정한 편지가 어딘가에 있을 텐데.. 삐뚤빼뚤 연필로 쓴 글씨.. 부처님을 ‘부천님’으로 쓰셨던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팔공산 동화사에 와 있던 가을도 물러갈 무렵이었을 겁니다. 장일스님을 뵈러 동화사 내원암으로 간 것은.. 마당에 떨어져 있던 낙엽들.. 그리고 정갈했던 암자가 떠오릅니다. 자그마한 키에 대장부모습을 한 스님은 얼핏 보면 비구니스님이라기보다는 비구스님 같았죠. 걸쭉한 음성도 그랬고..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표현도 그랬죠. “스님 출가하신 동기부터.. 행자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들려주세요..” 스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해놓듯 말문을 여셨습니다. 세수 여든이셨는데도 그렇게 자세히 지난 일을 기억하고 계신 게 놀라울 정도로 스님께선 마치 영사기로 필름 돌리듯이 자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시더군요.

취재 대상엔 세 부류의 인물이 있습니다. 너무 말씀이 생략적이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셔서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는 분, 원고지 15매에 넣고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말씀이 많은 분, 딱 쓰기 좋을 만큼만 말씀해주시는 분(이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이 계십니다. 장일스님의 경우는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데, 예를 들어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오는 장면만 해도 원고지 열 장이 모자랄 정도죠. 고향을 떠나는 열차를 타고 나서 누군가 고향사람이 보고 어머니에게 말할까봐 보자기로 얼굴을 덮고 서울로 왔다가 물어물어 비구니스님을 찾아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는 말씀, 처음 은사스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그분을 따라서 출가절이 된 부인사로 따라가는 장면을 어쩌면 그리도 리얼하게 말씀하시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보통은 1시간에서 길어야 두시간 걸리는 인터뷰 시간이 장장 여덟 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밤늦게 이야기가 끝나고 아침에 일어나시더니 저희들을 다시 찾으시더군요.. 전날 이야기에서 미진했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시 말씀하시더군요. 사진작가 작은아니님과 남녀평등에 대해서 설전(?)을 벌이셨죠? 아마... ^^^

노비구니스님들의 삶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근현대 여성역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총명하지만 여자라는 이름 하나로 배움의 길이 막혀 집에서 가사노동만 하고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해서 많은 분들이 두 종류의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出家)와 출가(出嫁).. 당시 절대 다수의 여성들이 후자의 길을 선택하지만, 장일스님을 비롯해 많은 비구니스님들은 평범한 길을 택하지 않고 절로 들어오게 됩니다. 스님들 중엔 불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뭔가 배우고 싶어서 절로 들어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장일스님의 경우는 더 극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을 놓아주실리 만무한 걸 아시고 연못가에 신발을 벗어 두고 도망나오셨다고 합니다. 내 신발을 보시면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리라.. 하고 말이죠.. 소녀적 오라버니들을 따라 독립운동을 돕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받던 이야기도 어찌나 실감나게 하시는지.. ^^ 당신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며 여자로 태어난 걸 무척 아쉬워하시더군요.

그런데 출가해 불가에 들어와 보니 여기도 남녀차별이 심하더라고, 비구니로서 도를 닦는 데엔 한계가 있더라고 하시면서 다음 생엔 꼭 남자 몸을 받아 헌헌장부로 출가의 길을 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선 지금 여성의 시대가 활짝 열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모든 고시에서 여성들이 수석합격하고, 최근의 외무고시에선 급기야 여성이 반수 이상 합격했다는 걸 아시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긍금합니다.^^

‘출가해서 도를 닦아 사명대사처럼 나라를 구해보리라’란 옹골찬 희망으로 절집에 들어와 스님은 오로지 선객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참선 하나로 깨치겠다는 일념은, 지독한 기도로 이어져 신체의 리듬까지도 바꾸어놓는 일을 발생하게 했고, 추운 겨울 동굴에서 홀로 참선을 한다고 앉아 있어 그때 바위에서 흘러내린 물이 머리를 적셨는데 그 바위독으로 머리가 벗겨지는 등 평생 고생을 하셨다는 말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장좌불와를 하는 등 깨달음에의 염원으로 내면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서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정화운동 참여를 권유받으면서 총무원의 부름을 받은 스님은 정화운동에 뛰어들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정화운동에 앞장 선 청담, 효봉스님 등을 도우면서 불사금을 모으는 일을 하셨다는데, 그 때 스님께서 종단에 헌신하셨던 일은 제방에 전설처럼 남아 있습니다. 불사금을 내놓을 만한 신도집에 가서는 수행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은 채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라밖의 다른 많은 나라를 다녀보진 않았지만, 인도나 중국 등 몇 나라를 순례하면서 ‘아, 우리나라 불교는 참 생명력이 있구나.’ 하는 것을 곳곳에서 느꼈습니다. 그 까닭을 저는, 장일스님 같은 드러나지 않은 수행자들의 헌신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화불사 때, 장일스님은 성철스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때의 기억을 스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큰스님을 만나자 마자 대들다시피 퍼부었어요. 큰스님이라고 이름이 나신 분이 종단이 이렇게 어려울 때 산속에 들어 앉아 무얼 하느냐고, 당장 나오라고 소리 쳤지요. 그랬더니, 큰스님이 진노하셔서 ‘저 비구니 밖으로 내쫒으라’고 하시더군요. 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한밤중에 내쫒겼는데, 문밖으로 나오니 칠흙같은 어둠속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더군요. 큰스님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호랑이를 보고 간담이 서늘했던 기억이 납니다.”

감히, 당시 도인으로 제방에 이름을 떨치던 성철스님을 찾아가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던 분은 장일스님처럼 당찬 분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대단히 의협십이 강하고 대담했던 분이죠. 조금 늦게 태어나 교육을 받으셨다면 여류정치가가 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효봉스님을 뫼시고 가다가 기차역 철로가에서 혼나시던 이야기는 마치 동화처럼 기억에 떠오릅니다.(그러나 생략...^^)

그러나 무엇보다 출가자인 스님에게 안타까운 것은 스승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의지하고 그분을 믿고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데, 그 스승 만나기가 무척 어려우셨던가 봅니다. 스님처럼 총기 있던 분이 출가 당시 비구니 강원 하나 없었으니, 불교의 요체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풀 길 없는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짐작이 됩니다. 우리 비구니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지요. 스승을 만나는 문제로 고생을 하시다가 천신만고 끝에 만난 분이 향곡스님이셨다고 합니다. 향곡스님은 자운스님, 성철스님과 도반으로 당대의 선지식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향곡큰스님께 새로 화두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 이제 되었구나.. 내 이 분을 스승으로 목숨바쳐 공부하리라.. 했죠.. 그랬는데, 얼마 안 되어서 스님께서 덜컥 돌아가시고 만 거예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스님께선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스님의 영정 앞에서 울부짖으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향곡이.. 니... 나와라.. 나 공부시켜준다더니.. 그렇게 빨리 가면 나는 어떻게 해... 빨리 일어나!!” 아.. 그때 그대로를 재현하셨던 스님의 절박한 표정은 그대로 비구니역사 명장면의 하나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렇게 공부하시려고 몸부림치셨던 선배님들이 있기에, 지금 비구니스님들은 따로 선방을 가지고 계시면서 선원장 또한 당당하게 비구니스님들이 차지하고 계십니다. 국내 대학원은 물론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이 많으며, 동국대학교에 교수로도 비구니스님들이 계시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일스님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 근현대 비구니사였고 우리나라 여성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해서 그분의 이야기를 정리해 놓아야겠다 싶어서 그분 상좌들께 일대기 정리하는 일을 타진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드러내기를 조심스러워하는 그분들의 사려깊음(?)으로 인해 불발로 그치고 말았죠. 아까운 불교역사가 묻혀 있다고 늘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게 인연의 씨앗이 되어서일까요? 장일스님과 함께 공부하셨던 다른 비구니 스님 한 분의 평전을 쓰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씨앗을 묻어 놓고 물주는 일을 잊지 않으면 언젠가 싹이 나고 꽃을 피우게 된다는 진리를 실감합니다. 아.. 저를 이렇게 수다스럽게 만든 장일스님..

행자시절을 취재하고 한 일년 뒤 다시 동화사 내원암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을 졸라서 전기를 하나 씁시다. 우리 비구니사를 정리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사진작가 작은아니(김민숙)님과 의기투합해서 다음해 추운 겨울 눈보라치던 날 다시 스님을 찾아뵈었더니 그동안 많이 수척해지셨더군요. 그리고 말씀도 전처럼 많이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얼마 후,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아마도 그 겨울,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동화사 내원암을 증축하다가 무너진 석까래 어디에 ‘비구 장일이 짓다’라는 글씨를 발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글쎄, 내가 이 암자에 살았던 비구였지 뭐예요..’ 하셨던 스님... 장타령을 기막히게 잘 부르셨다는 스님! 아마 스님은 당신의 숨결과 발걸음이 곳곳에 서려있는 한국 땅 내원암으로 다시 오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스님을 처음 찾아갔던 다음 날, 마침 해인사 국일암에 볼일이 있다시면서 행장을 잘 차리시고 잠시 내원암 마당가에 망연히 서 계시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평생을 쉼없이 걸었던 그 길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간밤 겨울바람에 수북히 떨어진 뜰앞 나뭇잎에서 무상(無常)을 들을 뿐이다. "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저는 스님의 행자시절 마지막 멘트를 이렇게 썼습니다. _()_

장일스님 행장에 관한 자료별 차이 대조

※ 수행담록 출가이력에는 1939년 청허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했다고 되었으나 수행담록 본문에는 1941년 청허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했다고 되었으며,

출가이력에는 1941년 해인사 경하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했다고 되었으나, 본문에는 1946년 청화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고 되어 있음

※ 법보신문에는 39년 동화사에서 김청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41년 해인사 백경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고 되어 있음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4714)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장일(長一)스님 본항목 장일스님(長一, 1916~1997) 長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장일스님(長一,_191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장일(長一)스님 청해(靑海)문중 ~의 일원이다
장일(長一)스님 오전(俉田)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장일(長一)스님 팔공산 부인사 ~에서 출가하다
장일(長一)스님 청허(淸虛)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장일(長一)스님 경하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