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하경스님(荷景, 193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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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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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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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결심===
은공(恩空) 정안(淨岸)스님은 1951년 강릉 연곡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진경희이다.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던 1970년, 스님도 콜레라에 걸려 심하게 앓던 중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내 갈 길이 따로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트여 이듬해인 1971년 2월 1일 오대산 지장암(강원 평창)에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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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인(梅印) 하경(荷景)스님은 1937년 3월 22일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며, 이름은 황학분이다.
[[파일:431-01.jpg|섬네일]]
 
  
===수학과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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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다니곤 했는데, 절에 갈 때마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국민학교 때 절에 소풍가는 날이면 마냥 신났고, 절집 벽에 그려진 불화를 보면 의미도 모르면서 두고두고 마음에 여운이 남았다고 했다.
출가 후 스님은 [http://www.unmunsa.or.kr/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http://xn--q20bm8bgy1a0fc8wd.kr/ 오대산 지장암]으로 돌아와 재무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라남도 장성 [http://www.baekyangsa.com/ 백양사]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천진암]에서 사찰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스님은 중국 유학과 천일지장기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의 많은 대중스님들이 발우를 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스님에게 누군가가 스님 자리라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법석을 여는 꿈을 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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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수원 용주사로 소풍갔는데, 용주사의 한 스님께 대뜸 “스님, 도는 어떻게 깨쳐요?”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노스님한테 여쭤보아라.” 하고 대답했다. 다시 이렇게 여쭈었다. “어디에 가면 여자스님이 있어요?”하니, “충남 마곡사에 가면 여자스님이 있다.”고 대답했다.
  
스님은 꿈이 천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감하고 천진암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 천진암으로 내려가 불사에 혼신을 다하였다. 천진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당시에는 낡은 법당과 허물어져가는 요사채만으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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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스님은 얼마 후 마곡사를 찾아 길을 나섰고, 1945년 나이 9세에 마곡사 은적암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천일지장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보수하고 부족한 생활용수를 보충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이용했던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었으며, 천진암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후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를 보수하여 천진암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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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암에 도착한 날 밤 스님은 꿈을 꾸었다. 키가 구 척 장신인 세 사람이 불쑥 공양간에서 나오더니 마루에 걸터앉은 하경스님에게 “네 스승이 될 사람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세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스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인 줄 알고 무조건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네 스승이 될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구멍만 파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호남에 비구니 선원이 거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워 파도처럼 밀려오던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10월 15일 삼천일 지장기도 불사 회향을 하면서 호남에 첫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 백암선원(白岩禪院)을 개원하고 해 첫 동안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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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어른스님께 꿈 내용을 말씀드리자 세 분이 바로 조왕님, 산신님, 칠성님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은사와 상좌의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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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재공스님과의 만남===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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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스님은 재공(在空)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는데, 은사스님은 정말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 는 분이셨지만 참으로 자애롭고 사상이 반듯하여 무엇 하나라도 처신을 잘못하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늘 온화하여 함께 지내는 사중스님들이 의지처로 여기며 믿고 따르는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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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은사스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서 근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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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되려면 무조건 은사스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어렵다고 들어서 스님은 굳은 결심을 했는데 은사스님은 딸처럼 잘 대해주셔서 모든 면에서 서투른 행자 시절에도 스님은 은사스님에게 꾸지람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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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은적암에는 순희스님, 성노스님, 재공스님이 함께 지내셨는데, 재공스님만 상좌가 없는 상황이었다. 보살피던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병이 나서 절 밖으로 나가더니 그대로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오대산 지장암 면모 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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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은 노스님의 제사를 모실 때 사중의 물건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이 손수 탁발해서 정성들여서 제를 올렸다. 곡식도 반드시 노스님이 남기신 산자락에서 나는 것을 썼고, 사중의 양념 하나, 기름 한 방울, 소금 한 숟가락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때 스님은 은사스님의 모습을 보고 ‘참 바르신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파일:431-03.jpg|섬네일|지장암의 모습]]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와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처가 다 배움터요, 행하는 모든 일이 공부 아님이 없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이에 스님은 지장암으로 돌아왔고 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화두와 직면하게 되었다.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화두, 곧 육신을 죽일 것인가, 설자리를 버릴 것인가, 마음을 죽일 것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공동체 삶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에피스드를 수행의 재료로 삼아 어려움을 통해 겸손을, 가난한 살림살이를 통해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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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스님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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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스님은 마곡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68년 다시 마곡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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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광덕사에서 정진을 했고, 범어사 대성암에서 6안거를 성만했으며, 팔정사에서도 안거를 성만했다.
  
또한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라는 명성에 조금이라도 부응할 있도록 지장암 내 기린선원을 정비하여 많은 대중이 살 수 있게끔 조건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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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대성암에서 동안거를 날 때의 일이다. 당시는 어느 절이든 안거를 나려면 자신이 먹을 양식을 들여놔야만 공부를 할 있었는데, 하경스님은 겨우 여비만 마련하여 대성암에 도착한 터라 즉시 탁발을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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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 저집 탁발을 다니노라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스님이 첫날 무서운 개들을 무릅쓰고 하루 종일 탁발을 하고 다니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니 만성 노스님께서 “그래, 처음이더냐? 애썼다.” 하고 웃으며 맞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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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님은 하경스님이 대성암에 방부를 들이려고 찾아왔을 때 “여기는 늙은이들만 사는 양로원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데 가서 공부하는 게 낫다”며, 노스님은 구참 납자들이 공부하는 데서 신참이 힘들까봐 걱정을 하셔서 거절했다. 그때 스님은 '안 재워주면 밥은 여기 와서 먹고 잠은 바위 위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공부하겠다.'며 노스님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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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과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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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별좌 소임을 살던 지관 노스님께 김치 담그는 법부터 밥하는 법까지 많은 것을 배우며, 점차 절집 살림을 익혀나갔다. 추운 날씨에 채공 소임을 사느라 스님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만성 노스님은 독감에 걸린 하경 스님에게 털실로 만든 속고의를 주셨다. 그 옷은 노스님의 시봉스님이 만들어서 드린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아주 귀한 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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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경스님은 감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탓에 폐렴에 걸리게 되었고, 폐렴은 다시 결핵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그때는 열 명 중 여덟 명이 죽을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착하고 고지식한 은사스님은 도지쌀을 받으면 하경스님의 건강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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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은사스님께서 무척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내복이 귀하던 시절 은사스님이 광목 속고의에 솜을 넣어 주셨는데, 그것이 너무 뻣뻣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스님이 몰래 솜을 뺀 것을 알고 은사스님은 매우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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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은 제가 추위를 많이 타니까 걱정이 되서 일부러 솜을 넣어 만들어주신 건데, 그 속도 모르고 솜을 뺐으니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어른이 해준 것을 멋대로 뺐다고 야단을 많이 맞았지요. 제가 은사스님을 평생 모시고 사는 동안 야단을 맞은 것은 그때 딱 한 번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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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결국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내가 스스로 병을 인정하고 굴복하면 그것이 곧 죽는 길이다. 병한테 지지 않고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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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모든 염려를 기도로 극복하며 지내던 어느 날 스님은 꿈을 꾸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신장님이 다가와 “재공스님 상좌지? 부지런히 염불해. 몸은 좀 약하지만 기도하면 나을 테니까.” 하고 말하더니 스님의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과연 스님은 빠르게 회복을 했고, 예상보다 일찍 퇴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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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과 노스님 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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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스님은 마곡사 은적암에서 여자아이 몇 명을 키웠는데, 산 속 깊은 곳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늘 염려가 되어서 공주에 월인사를 창건하여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스님의 마음에 깃든 깊은 자비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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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은적암에서 사중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시생을 받아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언제나 정성을 다해 노스님들을 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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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성호·석산스님이 있다
  
 
==사찰==
 
==사찰==
* 보덕사(☎ 041-353-9306):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2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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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인사(☎ 042-825-2658):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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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 pp. 459~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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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 pp. 611~616.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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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07.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
 
* 월정사 지장암 감원 정안스님 입적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475
 
* 佛心도 반해버린 산 병풍과 계곡 물소리, 백암산 천진암 [자비화 카페],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시맨틱 데이터==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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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경스님(荷景, 1937生, 비구니) | 하경(荷景)스님]] || [[석암(昔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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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9일 (화) 23:21 판



정의

하경스님은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은사스님을 잘 시봉했으며, 당시 죽음의 병인 결핵과 사투하여 발원과 기도의 힘으로 완치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7 경기 화성 출생
1945 마곡사 은적암에서 재공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5 마곡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8 [http://www.magoksa.or.kr/?asdf=home/ 마곡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 광덕사에서 정진
1968 범어사 대성암에서 6안거 성만
1968 팔정사 1안거 성만
2004 현재 은적암 주석

기타사항

문중 육화(六和)
수행지침 견성성불(見性成佛)
특기 꽃가꾸기, 나무가꾸기(조경)
취미 붓글씨
수계제자 성호·석산

활동 및 공헌

출가 결심

매인(梅印) 하경(荷景)스님은 1937년 3월 22일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며, 이름은 황학분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다니곤 했는데, 절에 갈 때마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국민학교 때 절에 소풍가는 날이면 마냥 신났고, 절집 벽에 그려진 불화를 보면 의미도 모르면서 두고두고 마음에 여운이 남았다고 했다.

한번은 수원 용주사로 소풍갔는데, 용주사의 한 스님께 대뜸 “스님, 도는 어떻게 깨쳐요?”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노스님한테 여쭤보아라.” 하고 대답했다. 다시 이렇게 여쭈었다. “어디에 가면 여자스님이 있어요?”하니, “충남 마곡사에 가면 여자스님이 있다.”고 대답했다.

하경스님은 얼마 후 마곡사를 찾아 길을 나섰고, 1945년 나이 9세에 마곡사 은적암에서 출가했다.

은적암에 도착한 날 밤 스님은 꿈을 꾸었다. 키가 구 척 장신인 세 사람이 불쑥 공양간에서 나오더니 마루에 걸터앉은 하경스님에게 “네 스승이 될 사람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세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스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인 줄 알고 무조건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네 스승이 될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구멍만 파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날 어른스님께 꿈 내용을 말씀드리자 그 세 분이 바로 조왕님, 산신님, 칠성님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은사 재공스님과의 만남===

하경스님은 재공(在空)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는데, 은사스님은 정말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 는 분이셨지만 참으로 자애롭고 사상이 반듯하여 무엇 하나라도 처신을 잘못하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늘 온화하여 함께 지내는 사중스님들이 의지처로 여기며 믿고 따르는 분이셨다. 처음에는 은사스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서 근심이 많았다. 스님이 되려면 무조건 은사스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어렵다고 들어서 스님은 굳은 결심을 했는데 은사스님은 딸처럼 잘 대해주셔서 모든 면에서 서투른 행자 시절에도 스님은 은사스님에게 꾸지람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당시 은적암에는 순희스님, 성노스님, 재공스님이 함께 지내셨는데, 재공스님만 상좌가 없는 상황이었다. 보살피던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병이 나서 절 밖으로 나가더니 그대로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노스님의 제사를 모실 때 사중의 물건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이 손수 탁발해서 정성들여서 제를 올렸다. 곡식도 반드시 노스님이 남기신 산자락에서 나는 것을 썼고, 사중의 양념 하나, 기름 한 방울, 소금 한 숟가락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때 스님은 은사스님의 모습을 보고 ‘참 바르신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만성스님과의 인연

하경스님은 마곡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68년 다시 마곡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이후 광덕사에서 정진을 했고, 범어사 대성암에서 6안거를 성만했으며, 팔정사에서도 안거를 성만했다.

1962년 대성암에서 동안거를 날 때의 일이다. 당시는 어느 절이든 안거를 나려면 자신이 먹을 양식을 들여놔야만 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하경스님은 겨우 여비만 마련하여 대성암에 도착한 터라 즉시 탁발을 시작해야 했다. 이집 저집 탁발을 다니노라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스님이 첫날 무서운 개들을 무릅쓰고 하루 종일 탁발을 하고 다니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니 만성 노스님께서 “그래, 처음이더냐? 애썼다.” 하고 웃으며 맞아주셨다.

노스님은 하경스님이 대성암에 방부를 들이려고 찾아왔을 때 “여기는 늙은이들만 사는 양로원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데 가서 공부하는 게 낫다”며, 노스님은 구참 납자들이 공부하는 데서 신참이 힘들까봐 걱정을 하셔서 거절했다. 그때 스님은 '안 재워주면 밥은 여기 와서 먹고 잠은 바위 위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공부하겠다.'며 노스님을 설득했다.


결핵과의 사투

스님은 별좌 소임을 살던 지관 노스님께 김치 담그는 법부터 밥하는 법까지 많은 것을 배우며, 점차 절집 살림을 익혀나갔다. 추운 날씨에 채공 소임을 사느라 스님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만성 노스님은 독감에 걸린 하경 스님에게 털실로 만든 속고의를 주셨다. 그 옷은 노스님의 시봉스님이 만들어서 드린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아주 귀한 옷이었다.

그런데 하경스님은 감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탓에 폐렴에 걸리게 되었고, 폐렴은 다시 결핵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그때는 열 명 중 여덟 명이 죽을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착하고 고지식한 은사스님은 도지쌀을 받으면 하경스님의 건강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한번은 은사스님께서 무척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내복이 귀하던 시절 은사스님이 광목 속고의에 솜을 넣어 주셨는데, 그것이 너무 뻣뻣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스님이 몰래 솜을 뺀 것을 알고 은사스님은 매우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은사스님은 제가 추위를 많이 타니까 걱정이 되서 일부러 솜을 넣어 만들어주신 건데, 그 속도 모르고 솜을 뺐으니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어른이 해준 것을 멋대로 뺐다고 야단을 많이 맞았지요. 제가 은사스님을 평생 모시고 사는 동안 야단을 맞은 것은 그때 딱 한 번뿐이었어요.”

스님은 결국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내가 스스로 병을 인정하고 굴복하면 그것이 곧 죽는 길이다. 병한테 지지 않고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염려를 기도로 극복하며 지내던 어느 날 스님은 꿈을 꾸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신장님이 다가와 “재공스님 상좌지? 부지런히 염불해. 몸은 좀 약하지만 기도하면 나을 테니까.” 하고 말하더니 스님의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과연 스님은 빠르게 회복을 했고, 예상보다 일찍 퇴원하게 되었다.

보육과 노스님 시봉

하경스님은 마곡사 은적암에서 여자아이 몇 명을 키웠는데, 산 속 깊은 곳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늘 염려가 되어서 공주에 월인사를 창건하여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스님의 마음에 깃든 깊은 자비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스님은 은적암에서 사중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시생을 받아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언제나 정성을 다해 노스님들을 시봉했다.

수계제자로는 성호·석산스님이 있다

사찰

  • 월인사(☎ 042-825-2658):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50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11~616.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07.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하경(荷景)스님]] 본항목 하경스님(荷景, 1937~) 荷景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하경스님(荷景, 1937生, 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하경(荷景)스님 육화(六和) ~의 일원이다
하경(荷景)스님 재공(在空)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하경(荷景)스님 [[마곡사 은적암] ~에서 출가하다
하경(荷景)스님 금오(金烏)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하경(荷景)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