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보명스님(寶明, 194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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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황사 창건)
(서울 봉황사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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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령일일(吾寧一日) 지계이사(持戒以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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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령일일(吾寧一日) 지계이사(持戒以死)'''
    불원백년(不願百年) 파계이생(破戒以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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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원백년(不願百年) 파계이생(破戒以生)'''
  
 
     내가 차라리 하루 날에 계를 가지고 죽을지언정
 
     내가 차라리 하루 날에 계를 가지고 죽을지언정
 
     백년동안 계를 파하고 살기를 원치 않으리.
 
     백년동안 계를 파하고 살기를 원치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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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4일 (목) 10:07 판



정의

신각(信覺) 보명(寶明)스님은 어린이 포교에 전념하시고   서울 동작구 소재한 봉황사를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6 경남 합천 출생
1954 태백산 홍제사로 가족 출가
0 불교정화운동 시 선학원에서 상인(相仁)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6 석남사에서 『초발심자경문』 수학
0 석남사 동안거 성만
1971 해인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3 동학사 강원 졸업
0 해인사 약수암 하안거 성만
1974~ 1985 흑석동 감로사에서 어린이 포교 (천자문)
1983 중앙승가대학교 제3회 졸업
1987 봉황사 창건
1989 노량진경찰서 경승 위촉(제4호)
1996~1998 동학사 동문회 총무
2004 현재 봉황사 주지

기타사항

문중 청해(靑海)
수행지침 성실, 바른생활
취미 사진
수계제자 형문(亨門)

활동 및 공헌

출가동기

신각(信覺) 보명(寶明)스님은 1946년 음력 3월 20일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지리에서 아버지 진준이(陳俊伊)와 어머니 표복례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양이며, 이름은 진정유이다. 항상 자상하고 매사에 철두철미한 아버지는 성장하는 자식들의 교육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셨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시자 독실한 불자이신 종고모께서 돌아가신 영가와 자손을 위해 절에서 49재를 지낼 것을 권유하셨다. 종고모님의 뜻에 따라 가족들은 성철 큰스님께 부탁을 드려 아버지의 49재를 모셨다.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법문은 장남 천제 스님이 성철 스님의 맏상좌로 출가하게 이끌었고, 이어서 어머니는 나머지 남매들을 데리고 태백산 홍제사로 출가하였다. 한 가족을 부처님 품으로 이끄는 커다란 전환점이 된 것이다.
2남 4녀 형제자매 모두가 출가했다. 혜근, 천제, 적조, 보명, 삼소, 본각스님이다. 큰언니 혜근스님은 법기문중 묘경스님을 은사로, 둘째언니 적조스님은 삼현문중 성우스님을 은사로, 보명스님은 청해문중 상인스님을 은사로, 막내인 본각스님은 법기문중의 육년스님을 은사로 하여 각기 다른 문중으로 출가를 하였다. 이것은 혈육조차 멀리하여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참다운 수행자로 성장시키려는 큰스님의 뜻이었고, 승가의 출가자 정신이 표출된 것이었다. 보명스님은 8세, 막내 본각스님은 3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형제를 떠나 서울로 보내졌다.

출가

보명스님은 1954년 8세 때 선학원에서 상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55년 출가 직후 불교 정화운동으로 은사 상인스님이 선학원에 참여하여 보명스님도 잠시 머물게 되었다. 당시 선학원과 조계사는 대처승과의 마찰로 어린 사미니가 있기에는 적당하지 못해서 마산 왕고모집에 맡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보명스님은 출가자란 생각에 마산 왕고모집을 떠나 은사스님을 찾아 서울로 상경했다. 고암스님이 계시는 대각사를 찾았고, 고암스님은 어린 보명스님을 데리고 은사 상인스님을 찾기 위하여 남산에 있는 모든 사찰을 돌아다녔다.
10여 일이 지나 범어사 청련암에서 원주소임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마침내 은사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가 1956년 음력 8월 20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1955년 태백산 홍제사 보살계 산림에서 자운 율사스님에게 출가를 앞두고 ‘성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았으나 뜻밖의 병을 얻어 출가의 뜻까지는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잠시 속가에 맡겨둔 어린 자식 보명스님이 걱정되어 만나러 가는 길에 한 여름 장대비를 만나 장티푸스 병을 얻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님 제사는 늘 보명스님이 맡아서 지냈다.
보명스님은 은사 상인스님을 따라 범어사 청련암에서 대성암을 거쳐 서울의 승가사와 성북동 청룡사에서 지냈으며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가 당시 가사 불사를 할 때 은사스님의 솜씨가 좋아 편수로 동참하게 되자 보명스님도 함께 동행 하였다. 그곳에서 최원효 주지스님으로부터 '신각(信覺)' 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하동산 스님으로부터 10세 때 사미니계를 수지하였으며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화두를 받았다. 그 이후 범어사 청련암 선원에서 만성스님이 입승으로 대중스님을 제접할 때 상인스님은 원주 소임을 맡게 되었고, 보명스님은 어린나이에 대중 공양주를 살게 되었다. 이때 대중스님은 30여 명에 달하였다. 하안거와 동안거 두 철을 사형스님과 함께 지냈는데, 당시에 자민스님의 은사스님도 계셨다.

수행

보명스님은 1960년 15세에 흑석동 감로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은사스님이 상도동 백운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어느 날 흑석동의 한 보살이 찾아와 출가를 원하였다. 본인 소유의 절을 갖고 있었던 보살은 상인스님의 둘째 상좌가 되었고, 보명스님의 사형이 되었다. 그 절을 고암 큰스님께서 '감로사' 라고 이름 짓고 그 보살에게는 '보택' 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셨다. 보명스님은 감로사에서 부전으로 법당 소임을 보았다.
21세 되던 1966년 석남사에서 『초발심자경문』을 수학하면서 동안거를 성만하였다. 『초발심자경문』을 배울 때 처음에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책을 덮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적조스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22세 되던 1967년 운문사 강원에 들어가서 묘엄스님께 『치문』을 배웠으며, 성도재일 밤새도록 『치문』의 면학을 읽고 공부가 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23세 1968년 동학사 강원에서 해성 강사스님께 서장과 도서를 배우고, 호경 강백스님께 능엄경을 배웠다. 함께 수학한 도반스님은 법홍, 일초, 정문, 용운, 혜안, 성월, 지형스님 등이었고, 명법, 법영, 탄형, 상인스님은 같은 반으로 편입하여 대교를 마쳤다.

어린이 포교의 시작

그 후 스님은 1973년 동학사 강원에서 7년간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마치고, 흑석동 감로사에서 어린이 포교의 선두자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동네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스님에게 한자를 배운 아이들이 무려 300여 명에 달하였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련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경북 청암사 백련암까지 학생들을 인솔하여 내려갔다.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기차 한 칸을 통째로 빌려 70~80여 명의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였다. 아이들이 차지한 기차 안은 웃음과 노래 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면 다른 칸에 있던 할머니들이 함께 하고 싶어서 억지로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한바탕 놀다 가시기도 했다.
또한 오빠 천제스님이 계시는 부산 청사포 혜월정사에서도 6박 7일간씩 청소년 수련대회를 개최하였다. 아이들은 해운대 바닷가에서 마음껏 물놀이를 즐기는데 스님은 바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해수욕장은 수영복을 입은 사람만 가는 줄 알았던 것인데, 그만큼 세상 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스님은 '지금 같으면 아이들 짐이라도 지키며 바다 구경을 했을 텐데..........'하며 옛날 생각에 미소 짓는다.
돈이 부족할 때는 멀리 가지 않고 대신 가까운 수락산 계곡이나 도봉산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는데, 그럴 때면 야외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중앙승가대학교 입학

1981년 36세에 중앙승가대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학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 3회 졸업생이 된 스님은 여러 과목 가운데 영어가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청해문중 계보 정리

스님은 감로사에서 청해문중 계보를 만드는 원력을 세웠다. 은사스님께서 삼선암의 법성스님 이 상노스님이라고 일러주었는데, 청암사 백련암에서 주지스님이 해인사 약수암의 성주스님을 상노스님으로 축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유를 알아보니 1차 계보에 오류가 있었다. 늘 고심을 하던 스님은 청해문도 2차 계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법성 노스님의 잘못 기재된 계보를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자료를 모으는 데 1~2년 가량 걸렸으며, 사찰에 여러 차례 모여서 정리를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청해문도는 청암사의 '청’ 자와 해인사의 '해' 자를 따서 부른 것인데, 스님은 이후에 만들어질 문도계보에는 입적한 분들을 다시 정리하여 기재하고 빠진 분들도 보충하여 계속 이어가길 바라고 있다.

서울 봉황사 창건

1988년 43세 때 감로사 보택스님의 입적으로 스님은 적조스님과 화주를 하여 지금의 봉황사를 어렵게 창건하였다. 봉황사와 인연을 맺기 전, 어느 날 스님은 선몽을 하였다. 대문에서 금돼지가 졸졸 쫓아나오고, 입적하신 영암 큰스님이 통장을 갖고 와서 돈을 달라고 하는 보살들에게 몇 차례 돈을 나눠준 후 나머지는 모두 보명스님에게 주셨다. 영암 큰스님은 돌아갈 때 커다란 강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스님에게는 더 이상 따라오면 안 된다고 하고 강을 건너셨다. 나중에 보명스님은 봉황사 대웅전에서 한강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 이곳이 인연터인가.' 하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 애송하는 게송


오령일일(吾寧一日) 지계이사(持戒以死)
불원백년(不願百年) 파계이생(破戒以生)

     내가 차라리 하루 날에 계를 가지고 죽을지언정
     백년동안 계를 파하고 살기를 원치 않으리.

이것은 스님이 평소 애송하는 게송이다.

입적

봉황사 창건 이후 스님은 그간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병고를 겪기도 했다. 스님은 기도를 하다보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스님은 이 모든 것을 부처님 가피라고 믿는다. 또한 부처님께 기도하며 살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발심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골수에 맺히듯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황사 주지로 수행 정진했고 2015년에 입적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형문스님이 있다.


4. 참고문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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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寶明)스님 본항목 보명스님(寶明, 1946~) 寶明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보명스님(寶明,_194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보명(寶明)스님 청해(靑海)문중 ~의 일원이다
보명(寶明)스님 상인(相仁)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보명(寶明)스님 선학원 ~에서 출가하다
보명(寶明)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보명(寶明)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보명(寶明)스님 봉황사 ~의 주지를 역임하다
보명(寶明)스님 봉황사 ~을(를) 창건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