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심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6번째 줄: 6번째 줄:
 
[출처 및 참고자료]</br>
 
[출처 및 참고자료]</br>
 
- [https://blog.naver.com/hyewonlove71/222961457637 혜원의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 강서구 화곡6동 사찰 성심사</br></br>
 
- [https://blog.naver.com/hyewonlove71/222961457637 혜원의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 강서구 화곡6동 사찰 성심사</br></br>
 +
<gallery>
 +
File:20201025_140105.jpg|[극락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4220.jpg|[극락전 부처님]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4230.jpg|[극락전 부처님]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4302.jpg|[극락전 감로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4342.jpg|[극락전 산신도와 독성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4718.jpg|[극락전 신중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4901.jpg|[극락전 칠성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114.jpg|[극락전 단청]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323.jpg|[대웅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72534.jpg|[대웅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457.jpg|[대웅전 내부]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517.jpg|[대웅전 석가모니불]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530.jpg|[대웅전 감로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614.jpg|[대웅전 신중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622.jpg|[대웅전 지장시왕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55935.jpg|[관세음보살]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72519.jpg|[관음전]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72635.jpg|[관음전 내부]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72705.jpg|[관세음보살]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72729.jpg|[달마대사]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40010.jpg|[성심사 일주문]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File:20201025_140051.jpg|[사천왕] </br> 사진촬영: 김은희 2020년
 +
 +
</gallery>
 +
 +
  
 
* ''' 지도 ''' : [https://map.kakao.com/?q=강서구_곰달래로35길_64 성심사]</br></br>
 
* ''' 지도 ''' : [https://map.kakao.com/?q=강서구_곰달래로35길_64 성심사]</br></br>
  
 
[[분류 : 사찰]]
 
[[분류 : 사찰]]

2024년 10월 25일 (금) 06:54 판

  • 사찰명 : 서울 성심사(首尔 誠心寺)
  • 소재지 : 서울 강서구 화곡동 456-18 (서울 강서구 곰달래로35길 64)

서울 비구니 명우스님(明又)이 창건한 사찰이다. 현대불교신문에 명우스님이 성심사 창건 당시에는 이곳은 주택이 없어서 멀리 인왕산, 관악산이 보였다고 한다.[1]

[출처 및 참고자료]
- 혜원의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 강서구 화곡6동 사찰 성심사


  • 현대불교신문에서 이 기사를 찾을 수 없는데, 이 당시 기사 내용을 보관하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