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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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0일 (목) 13:48 판




정의

명안(明岸)스님은 견성암에서 현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음성 미타사를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1 대전 출생
1962 견성암에서 현행(賢行)스님을 은사로 출가
보산(普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3 무량사, 개심사 강원 수학
1964 미타사 대웅전 불사
1975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천일기도 정진-묵언 및 산문 밖 출입을 금함)
1979 기도 회향, 대웅전 및 요사채 건립
1980 미타사 선원 건립
1992 일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분봉받아 대광명 사리탑 조성
1998 동양 최대 지장보살 성지 조성 기공식
1999 성지도로 개통식
2006.8.27. 미타사에서 입적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



  • 문중 : 실상(實相)문중
  • 수행지침 : 청정하고 청빈한 수행 생활
  • 수계제자 : 희원(喜圓)·희찬(喜燦)·희성(喜性)·희문(喜文)·허응(虛應)·희운(喜雲)·수진(秀眞)·희경(嘉鏡)·정범(正梵)·청곡(靑谷)·희묵(喜默)·희철(希喆)·희유(希有)·석진(昔眞)·재홍(才弘)·희권(熹權)·희공(希空)·동찬(東煥)·석호(釋護) 외

활동 및 공헌

출가

명안(明岸)스님은 1941년 1월 12일 대전에서 아버지 이순필과 어머니 양용분 사이의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이며, 이름은 이정애이다.

물을 길어 돌아오시던 어머니의 발가락을 황룡이 무는 예사롭지 않은 태몽을 꾸고 태어난 스님은 장차 효도할 줄 알았던 부모님의 기대와 는 달리 5살 되던 해에 당시 8살인 오빠의 죽음을 보고 일찍이 생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9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는 번민거리였다. 눈앞에 이제까지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까닭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체험은 두려움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생사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싶은 의지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고, 스님은 21세 되던 1962년 석헌 큰스님으로부터 불교사상과 생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향천사에서 보산 대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0


수행과 수학

스님은 출가한 뒤 석헌 큰스님과 비구니 만성스님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금생에 꼭 성불해야겠다는 일념을 세웠다. 1962년 간월도에서 선객스님 10여 명과 함께 정진을 하게 되었는데, 성불을 하려면 일주일에 삼만배는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밤새워 절 기도를 하였다. 오로지 참선하여 성불할 생각만 했기 때문에 염불은 익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염불을 못하여 은사스님께 걱정을 끼치자 20일 만에 모든 염불을 다 익히기도 하였다. 그만큼 스님은 영민함을 타고난 데다가 또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집념이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몸이 몹시 허약했던 스님이지만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하루 육천 배씩 일주일 동안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아픈 몸을 생각지 않고 자신을 호되게 몰아붙이던 스님은 은사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여에 있는 무량사 강원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뜻과 상관없이 시작한 강원 생활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개심사 강원으로 옮겨 사집을 보다가 걸망을 꾸려 만행 길에 올랐다.


만행 중 미타사로 오다

그렇게 여러 곳을 만행하던 중 우연히 미타사에 발길이 닿게 되었다. 미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8년(630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던 고찰이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 무학대사, 조선시대 사명대사 등 대덕스님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었고,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항마군)을 모집하여 청나라 병사를 물리친 공로로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조선 영조 18년에 여러 차례의 화재와 이후 일어난 전란으로 소실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던 황량한 폐사지였다.

스님은 미타사에서 잠시 걸망을 풀고 수행하다가 떠날 생각으로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법회를 볼 수 있는 장소마저 없어 야단법석으로 법문을 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1


미타사 불사를 시작하다

그 당시 미타사에는 조선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석불이 비바람만 겨우 가린 채 허술하게 모셔져 있었다. 부처님을 편히 모실 수 있도록 절 한 채만 지어주고 가라는 신도들의 염원은 스님의 발길을 묶었는데, 절 한 채만 지어주고 떠나겠다던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오늘날의 미타사를 만드는 시초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불사는 절 주변의 땅 30평을 시주받고 20만 원의 예산으로 시작하여 1965년 사월초파일에 기와 불사를 하여 원만히 성취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7년 스님은 걸망을 지고 만행의 길에 오르지만 무슨 인연인지 다시 미타사에 오게 되면서 첫 인연부터 마지막 삶까지 현몽을 꾸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은 이곳이 자신의 인연 터임을 인정하고 평소 걷고자 했던 수좌의 길은 아니지만 이생에서의 삶은 대중 외호와 포교를 위한 불사의 원력으로 살 것을 결심하였다.


천일기도를 시작하다

1975년 고암 대화상을 계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한 명안스님은 같은 해 5월 묵언과 산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한 채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잠도 잊은 채 매진하였던 이 기도를 통하여 스님은 비록 간절히 원하였던 성불은 하지 못하였지만 대신 법당을 지어주겠다는 시주자(施主者)가 나타나 그해 법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때의 기도는 후일 미타사에서 21년 동안 천일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스님은 선원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서암 큰스님의 지도 하에 일주일씩 장좌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다.


과수원을 운영하다

스님이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는 어떤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원이 생기고 대중 외호를 하다 보니 사찰의 경제를 신도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나무 과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납골당 건립

10년 동안 농사를 짓다 보니 모든 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즈음 스님의 속가 집안에서도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로 인하여 스님은 장례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수원 운영 문제도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그곳에 납골당을 건립하여 기도처로 활용한다면 사찰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원력을 세우고 곧바로 일을 추진하였다.

납골당은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되 혐오감이 없고, 후손들이 아무 때나 찾아와 기도하고 참배 할 수 있는 편안한 휴식공간이어야 했다. 스님은 이런 점을 인식하고 주불(키 108척)을 중심으로 좌우 6분의 지장보살을 겸한 7지장보살을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1인 1불 모시기 운동’으로 만 불의 원불을 함께 모실 계획이다.


대광명사리탑 조성

1992년 일타 큰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분봉 받아 대광명(大光明) 사리탑을 조성하였고, 1998년에는 동양 최대 지장보살 성지 조성 기공식을 가진 뒤, 다음해 12월 22일 성지도로 개통식을 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불사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 10월 4일 조성 중이던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점안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후 납골당이 원만히 회향되고 그 운영이 정상화되면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복지관과 양로원을 운영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스님은 부처님의 사상에 입각하여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으로 마지막 생을 회향하고자 한다. 살아생전에 이 불사가 끝날지는 모르지만 회향은 걱정하지 않는다. 시작은 했으니 나머지 반은 후학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불사의 원력으로 살아온 스님은 그동안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청정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마음에 때를 묻혀서는 안 되며, 죽어서 설사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청정해야 함을 강조하는 스님은 이 모든 불사의 원력이 청정한 삶에서 오는 힘이었다고 말씀한다.

다음 생에는 선 수행하여 꼭 성불하고 싶다는 명안스님. 이곳 미타사가 지장보살의 성지로 우뚝 서서, 외롭고 힘든 중생들에게 영원한 귀의처가 되는 날은 스님의 원력과 지장보살님의 원력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이다.

명안스님은 2006년 8월 27일 미타사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법구에서 연꽃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

수계제자로는 희원(喜圓)·희찬(喜燦)·희성(喜性)·희문(喜文)·허응(虛應)·희운(喜雲)·수진(秀眞)·희경(嘉鏡)·정범(正梵)·청곡(靑谷)·희묵(喜默)·희철(希喆)·희유(希有)·석진(昔眞)·재홍(才弘)·희권(熹權)·희공(希空)·동찬(東煥)·석호(釋護) 등이 있다.



[미타사]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3

[미타사 세존진신 사리탑]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4

[명안스님] 사진출처: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음성신문, 기획/미타사 자연 가정납골 공원 (2001년)

http://www.u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89

법보신문, 음성 미타사 주지 명안 스님 입적 (2006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

충청투데이, 연꽃모양 사리 '눈길' 음성 미타사 명안스님 입적후 발견 (2006년)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716

트래블아이,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을 품은 천년도량, 음성 ‘미타사’ (2018년)

http://www.traveli.co.kr/read/contentsView/183/0/26/1

BBS, 음성 미타사, '템플스테이 운영사찰' 지정…충북 8번째 (2020년)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4932

충북일보, 충북도SNS서포터즈 - 음성 미타사 (2020년)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607294

유튜브, 충북 음성 미타사 “詩” 그림자 부처 되어

https://www.youtube.com/watch?v=V-FHTZTNhMc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mitasa.or.kr/bod/index_true.php


미타사(彌陀寺)는 법주사의 말사로서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가섭산 동남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의 준령이, 남쪽으로는 괴산군 감물면 성불산(成佛山)이 아득히 보이는 곳이다.

이 절은 진덕여왕 8년(630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고, 헌강왕 2년 도선국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고종 1년 (1192년) 이원신 스님이 중수 한 뒤 1370년 무학대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조선 선조 38년(1584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으며,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각성(覺性)대사가 항마군(의승군) 3천 명을 모집하여 출정한 공로로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영조 18년(1742년)에 화재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1964년에 명안스님이 폐사지였던 이곳에서 중창의 원력을 세우고, 1965년 8칸의 당우를 다시 세우면서 불사를 시작했다. 당시 금오(金烏)스님과 혜암(惠庵)스님은 ‘수도자가 도를 깨칠 만한 도량’이라 찬탄했다고 한다.

1979년 법당 앞에 대광명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1998년 경내지 농지 터에 지장보살 성지 조성불사에 착수하였다. 중창불사를 시작한 이래 11년 동안 임야 30정보를 매입하고 사찰 유지를 위해 약 1만여 평을 매입하였으며, 스님들이 직접 개간하였다. 개간지에는 사과와 배나무를 가꾸어 과수원으로 활용하다가 일부를 지장보살 성지로 조성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극락전, 미타선원, 자임당, 적운당, 서원당, 삼성각 등의 당우로 구성되어 있다.

미타사의 원불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아미타불이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좌상이 현몽을 하여 절을 중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 아래쪽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인 마애불(높이 230cm)이 있다. 자연 암벽에 양각한 것으로 신라 말엽 불상 양식을 계승,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타사 전경] 사진출처 : 티스토리 https://kokyu.tistory.com/657

[미타사 납골당] 사진출처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V-FHTZTNhMc

[동양 최대 지장보살상]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servan/6349781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陰城 彌陀寺 磨崖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불신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머리와 어깨 부분을 깊이 새겨 상반신의 입체감을 부각시켰다. 양손과 허리, 하반신부분은 음각의 선으로 윤곽만 나타내었다. 전체 높이 4.05m, 어깨 넓이 1.24m이며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높은 머리묶음, 머리에는 두건형의 관모를 썼으며, 얼굴은 자비로우며 풍만하게 표현하고, 네모난 얼굴에 눈, 코, 입, 귀 등의 선은 뚜렷하나 약식화되어 정교함을 볼 수 없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어깨는 수평을 이루어 당당하지만 사실감이 적은 편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이며,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다. 수인(手印)은 아미타불의 손모양 가운데 한 형식을 표현한 듯 오른손은 밑으로 내렸고, 왼손은 들어 가슴 앞에 댄 모습으로 당시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판적인 신체, 직선적인 윤곽, 여기에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옷자락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거구의 불상양식을 계승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 사진출처 :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brd/board/242/L/CATEGORY/337/menu/246?brdType=R&thisPage=33&bbIdx=9021&searchField=&searchText=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18~125.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1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41, 434


미타사 음성군 소이면 소이로61번길 164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043-873-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