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용덕왕자, 태허 선종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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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일보,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8816&sc_serial_code=SRN359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016년.</br> | - 경북일보,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8816&sc_serial_code=SRN359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016년.</br> | ||
- 강원도민일보,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57107 (新궁예평전 - 2) 역사는ㆍㆍㆍ ′복수′를 위한 반란을 거부했다] 2001년. </br> | - 강원도민일보,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57107 (新궁예평전 - 2) 역사는ㆍㆍㆍ ′복수′를 위한 반란을 거부했다] 2001년. </br> | ||
− | - | + |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r-XH5emmIKA KBS 역사스페셜 –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2020년. |
2024년 3월 3일 (일) 07:52 판
- 이름 : 궁예(용덕왕자, 태허 선종스님)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다.
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여 한 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세력을 떨치며,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했지만 후반에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다가 호족들,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했다.
- 출처
- 위키백과, 궁예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예
- 경북일보,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016년.
- 강원도민일보, (新궁예평전 - 2) 역사는ㆍㆍㆍ ′복수′를 위한 반란을 거부했다 2001년.
- 유튜브, KBS 역사스페셜 –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