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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7774 불교신문(2005.08.27)] <172>소천스님 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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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7979 불교신문(2005.09.03)]〈173.끝〉소천스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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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비구스님]]

2024년 2월 22일 (목) 05:43 판

  • 법호·법명 : 소소소천(簫韶韶天,1897~1978)
  • 생애·업적

소천스님은 1897년 2월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131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신봉운(申奉雲) 선생이고, 모친은 김성녀(金性女) 여사였다. 스님의 어려서 이름은 세순(世淳)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선의 망국(亡國)을 슬퍼한 스님은 자연스럽게 조국 독립을 갈망했다. 스님은 독립운동에 나서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찾던 와중에 여러 종교와 학문을 두루 만났다. 1914년(14세)에 기독교 정동교회에 나가 국권회복을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으나 같은해 8월 한일강제합병의 국치(國恥)를 보게 됐다.
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기록한 〈소천선사문집〉에는 당시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그간의 간절한 기도에 감응이 없음을 크게 아쉬워한 나머지 기도 이외의 방법으로 국권회복을 모색코자 ‘주님, 저는 주님 곁을 떠납니다. 나라 찾는 길을 찾지 못하였을 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하는 최후의 기도를 하고 교회를 떠나 여러 종교ㆍ학문ㆍ신비술 등을 광범하게 섭렵함.” 스님은 이듬해 서울 종로에 있던 한남(翰南)서림 주인에게서 〈금강경(金剛經)〉을 받았다. 불교와 처음 인연이 닿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뒷날 다시 〈금강경〉을 읽은 스님은 금강경에 ‘길’이 있음을 알고 전심전력을 쏟았다.
1919년 23세의 나이로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입대했다. 북로군정서는 무장 항일독립군 부대로 본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였는데, 1919년 12월 중국 만주 왕칭현(汪淸縣)에서 개편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의 대표적인 전과이다.
1924년 고국으로 돌아온 스님은 다시 〈금강경〉을 읽고 불법(佛法)에 뜻을 두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토굴을 짓고 홀로 정진하는데 전념했다. 출가한 뒤에도 〈금강경〉 가르침의 소중함을 역설한 스님은 이를 기반으로 ‘각운동(覺運動)’을 성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금강경〉이 각운동의 근본이 되는 경전이라며 중요성을 지적했다. 각운동이란 구심(求心) 구신(求身) 구족(求族) 구인류(求人類) 구국(救國) 구세(救世)이다. 소천스님의 생전 육성이다. “각운동은 실물훈련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실물의 제반내용은 〈금강경〉에서 볼 수 있지만, 이를 운전하는 훈련법칙과 운전원리는 불(佛)께서 가슴에 지니고 나오신 만자(卍字)에서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924년부터 1935년까지 10여 년간 금강경을 독파(讀破)하고 깊이 있게 공부한 스님은 〈금강경강의(金剛經講義)〉를 펴내고 중생구제에 적극 나섰다. 전국 각지를 만행하면서 중생들을 직접 만나 불법(佛法)을 설한 스님은 1941년 경기도 파주에 토굴을 짓고 정진에 전념했다. 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담은 〈소천선사문집〉에는 “토굴에 머물며 불교포교와 민중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진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8ㆍ15 해방을 맞이한 스님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국토의 분단과 좌ㆍ우익의 대립으로 민족이 누란의 위협에 처해 있다”면서 이를 막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스님은 〈바른정신〉 〈독립의 넋〉 〈인류업행개조운동〉 등의 원고를 집필했지만 출판되지는 못했다.
1952년 부산 범어사에서 용성스님을 은사로 동산스님을 계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엄격한 은사 밑에서 용맹 정진한 스님은 1953년 57세의 나이로 국민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출가 이전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금강경〉을 번역 출판해 24곳에 이르는 전국 각지에서 130여 차례의 강연과 법회를 개최했다. 특히 〈금강경〉 등 포교서적을 3만3000부나 간행하면서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를 조직해 구국구세(救國救世)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전개했다.
스님은 1958년부터 불교정화운동에도 적극 투신했다. 1959년 정화교단의 초대 교무부장 소임을 맡았으며, 서울 대각사와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주지 등을 맡으며 정화불사에 헌신했다. 불교정화와 국민자각운동을 펼치는 와중에도 〈활공원론(活功原論)〉 〈근본진리에서 본 구세방략(救世方略)〉 〈금강경과 각운동(覺運動)〉을 간행했다. 1964년 통합종단 출범으로 종단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스님은 1965년부터 인천 보각사에 주석하면서 참선과 교화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고희를 두해나 넘긴 1968년에는 〈반야심경 강의〉 〈원각경 강의〉 등을 간행했으며, 1970년에는 〈전쟁 없는 새 세계 건설의 원리와 방법〉이란 제목의 저술을 펴냈다. 소천스님은 1978년 4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는 82세. 스님의 법구는 다비 후 사리를 거둬 범어사 부도전에 모셨다.
광덕(光德)스님은 〈소천선사문집〉의 간행사에서 “조국이 위태롭고 겨레가 어육(魚肉)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며 세계가 전쟁의 물결 속에 표류하는데, 이 때에 구경각(究竟覺)의 종교로서의 불법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를 노사(老師)는 몸으로 보여주셨다”고 밝혔다.
※ 출처 :
불교신문(2005.08.27) <172>소천스님 ①
불교신문(2005.09.03)〈173.끝〉소천스님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