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공스님(法空, 147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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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스님은 1471년(성종2년) 경기도 광주 평창 이씨 가문 6남매 중 다섯째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다섯 살에 출가하게 되었다.  
 
법공스님은 1471년(성종2년) 경기도 광주 평창 이씨 가문 6남매 중 다섯째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다섯 살에 출가하게 되었다.  
 
1495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498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시작된 무오사화, 1504년 어머니 윤씨 복위 문제의 갑자사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정치가 불안한 상황이 되었다. 자신을 비방하는 투서를 보고, 언문구결을 불태우고 언문교습을 중지시켰으며, 원각사를 폐하고 장악원을 두어 기녀를 양성하고, 성균관을 폐하고 유흥장을 만드는 등 폭정이 심했다. 연산군의 폐사훼불이 청룡사에까지 닿아, 1501년 (연산군 7년) 청룡사를 폐사시켰고, 법공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495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498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시작된 무오사화, 1504년 어머니 윤씨 복위 문제의 갑자사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정치가 불안한 상황이 되었다. 자신을 비방하는 투서를 보고, 언문구결을 불태우고 언문교습을 중지시켰으며, 원각사를 폐하고 장악원을 두어 기녀를 양성하고, 성균관을 폐하고 유흥장을 만드는 등 폭정이 심했다. 연산군의 폐사훼불이 청룡사에까지 닿아, 1501년 (연산군 7년) 청룡사를 폐사시켰고, 법공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폐사된 청룡사 복구===
 
===폐사된 청룡사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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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스님은 다시 청룡사로 돌아갔지만, 당시 청룡사는 폐허가 되어 산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빈터 모퉁이에 움막을 짓고, 청룡사를 다시 일으킬 원력과 계획을 세우고 7년을 권선모연하였다. 법당·승당·명부전·산신각·우화루 등 1백여칸의 건물을 다시 일으켜 1512년(중종 7년) 청룡사를 완전히 복구하였다. 이후 계속 청룡사에 주석하다 1538년(중종 33년) 세수 68세, 법랍 63세로 입적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스님은 다시 청룡사로 돌아갔지만, 당시 청룡사는 폐허가 되어 산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빈터 모퉁이에 움막을 짓고, 청룡사를 다시 일으킬 원력과 계획을 세우고 7년을 권선모연하였다. 법당·승당·명부전·산신각·우화루 등 1백여칸의 건물을 다시 일으켜 1512년(중종 7년) 청룡사를 완전히 복구하였다. 이후 계속 청룡사에 주석하다 1538년(중종 33년) 세수 68세, 법랍 63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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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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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는 예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의 기도처로 삼기도 하였으며, 특히 상근(祥根)노스님을 통해 민중전(민비)와 후궁에 대한 일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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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광화당 항아님이 잉태를 하여 법륜사 뒷채에 몰래 숨어 지냈는데,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 초립동을 꿈에 만났다고 한다. 기도 덕분인지 하루는 궁에서 가마를 보내 항아님을 데려오게 하였다. 항아님은 민비의 해(害)를 입을까 두려웠지만 나한님의 가피로 결국 왕자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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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기’에 의하면 청룡사는 922년(고려 태조5년)에 도선(道詵)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어져서 청룡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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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스님의 수행도량이었다. 1036년(고려 정종2년)에 만선(萬善)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고려 의종12년)에 회정(懷正)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승방’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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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년(고려 충렬왕25년)에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知幻)스님이 중창하였고,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5년(태종5)년에 무학(無學)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또 1512년(중종7년)과 1624(인조2년)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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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영조47년)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定順)왕후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서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 때 절 이름을 잠시‘정업원(淨業院)’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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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순조1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스님과 수인(守仁)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1923년(순조23년)에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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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고종6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祥根)스님이 중창하였다. 1954년에서 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스님이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이룩하였고 1973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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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말의 명신(名臣)인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청룡사에 거주하였고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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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 의해서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은 유배를 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와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고 왕비는 스님이 되어 영월방향의 동쪽 언덕에 올라서 단종의 무사 귀환과 넋을 달랬다고 한다. 그 장소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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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봉은 청룡사 동쪽앞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숭인공원(일명 동망산공원)이 있다. 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후까지 채석장으로 쓰여 산의 반쪽은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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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송씨는 단종과 이별을 한 후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 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송씨는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세조 3년(1457년) 10월 4일, 헤어진지 4개월만에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날아 들었다. 그 이후부터 송씨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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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47년(1711년),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인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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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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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동망봉 정상 주위에 까지 주택이 밀집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데 정순왕후가 단종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곳에는 동망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산신각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세웠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5세기경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심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산제(山祭)를 지내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이 산신각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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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법공스님.jpg|섬네일|[청룡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C%B2%AD%EB%A3%A1%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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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0~41)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0~41)

2022년 6월 28일 (화) 16:58 판



정의

법공(法空)스님은 조선의 비구니로, 연산군 즉위시절 폐사된 청룡사를 일으킨 제5 중창주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471 (성종 2년) 경기도 광주 출생/ 평창 이씨 가문
1475 청룡사 지안스님을 은사로 출가
1501 연산군의 폐사훼불 정책으로 청룡사 폐사
1512 (중종 7년) 청룡사 완전히 복구
1538 (중종 33년) 세수 68세, 법랍 63세로 입적

활동 및 공헌

출가와 당대 조선 정치 상황

법공스님은 1471년(성종2년) 경기도 광주 평창 이씨 가문 6남매 중 다섯째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다섯 살에 출가하게 되었다. 1495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498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시작된 무오사화, 1504년 어머니 윤씨 복위 문제의 갑자사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정치가 불안한 상황이 되었다. 자신을 비방하는 투서를 보고, 언문구결을 불태우고 언문교습을 중지시켰으며, 원각사를 폐하고 장악원을 두어 기녀를 양성하고, 성균관을 폐하고 유흥장을 만드는 등 폭정이 심했다. 연산군의 폐사훼불이 청룡사에까지 닿아, 1501년 (연산군 7년) 청룡사를 폐사시켰고, 법공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폐사된 청룡사 복구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스님은 다시 청룡사로 돌아갔지만, 당시 청룡사는 폐허가 되어 산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빈터 모퉁이에 움막을 짓고, 청룡사를 다시 일으킬 원력과 계획을 세우고 7년을 권선모연하였다. 법당·승당·명부전·산신각·우화루 등 1백여칸의 건물을 다시 일으켜 1512년(중종 7년) 청룡사를 완전히 복구하였다. 이후 계속 청룡사에 주석하다 1538년(중종 33년) 세수 68세, 법랍 63세로 입적하였다.

청룡사

청룡사는 예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의 기도처로 삼기도 하였으며, 특히 상근(祥根)노스님을 통해 민중전(민비)와 후궁에 대한 일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당시 광화당 항아님이 잉태를 하여 법륜사 뒷채에 몰래 숨어 지냈는데,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 초립동을 꿈에 만났다고 한다. 기도 덕분인지 하루는 궁에서 가마를 보내 항아님을 데려오게 하였다. 항아님은 민비의 해(害)를 입을까 두려웠지만 나한님의 가피로 결국 왕자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청룡사는 922년(고려 태조5년)에 도선(道詵)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어져서 청룡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스님의 수행도량이었다. 1036년(고려 정종2년)에 만선(萬善)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고려 의종12년)에 회정(懷正)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승방’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고려 충렬왕25년)에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知幻)스님이 중창하였고,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5년(태종5)년에 무학(無學)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또 1512년(중종7년)과 1624(인조2년)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47년)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定順)왕후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서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 때 절 이름을 잠시‘정업원(淨業院)’으로 바뀌었다.

1813년(순조1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스님과 수인(守仁)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1923년(순조23년)에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6년)에 정기(正基)와 창수(昌洙)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祥根)스님이 중창하였다. 1954년에서 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스님이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이룩하였고 1973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고려말의 명신(名臣)인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청룡사에 거주하였고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기도 했다.

세조에 의해서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은 유배를 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와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고 왕비는 스님이 되어 영월방향의 동쪽 언덕에 올라서 단종의 무사 귀환과 넋을 달랬다고 한다. 그 장소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동망봉은 청룡사 동쪽앞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숭인공원(일명 동망산공원)이 있다. 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후까지 채석장으로 쓰여 산의 반쪽은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과 이별을 한 후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 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송씨는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세조 3년(1457년) 10월 4일, 헤어진지 4개월만에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날아 들었다. 그 이후부터 송씨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영조 47년(1711년),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인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동망봉 정상 주위에 까지 주택이 밀집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데 정순왕후가 단종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곳에는 동망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산신각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세웠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5세기경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심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산제(山祭)를 지내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이 산신각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청룡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C%B2%AD%EB%A3%A1%EC%82%AC)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0~41)
  • 성종·중종실록
  • 연산군 일기
  • 청룡사지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공(法空)스님 본항목 법공(法空, 1951~2014) 法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공스님(法空,_147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법공(法空)스님 지안스님 ~의 제자이다
법공(法空)스님 서울 청룡사 ~에서 출가하다
법공(法空)스님 청룡사 ~을 정비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