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선스님(喜善, 192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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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암에서 피난을 나올 때 쓸 만한 옷가지나 그릇 등을 땅에 묻어 두었는데, 피난을 나오다가 월정사 거리에서 돌아보니 누군가가 불을 질러 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불로 인해 월정사와 지장암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산에는 불을 못 붙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암 큰스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었는데, 마침 그 일을 담당한 사람이 예전에 한암 큰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던 분이었다. | 지장암에서 피난을 나올 때 쓸 만한 옷가지나 그릇 등을 땅에 묻어 두었는데, 피난을 나오다가 월정사 거리에서 돌아보니 누군가가 불을 질러 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불로 인해 월정사와 지장암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산에는 불을 못 붙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암 큰스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었는데, 마침 그 일을 담당한 사람이 예전에 한암 큰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던 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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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장암에 머물던 인홍스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희선스님은 노스님을 평창읍에 있는 포교당까지 업고 왔다. 그러나 노스님의 병환이 위중하여 '호삼월 꽃 필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뒤 혼자 윤필암까지 걸어갔다. 결국 노스님은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 당시 지장암에 머물던 인홍스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희선스님은 노스님을 평창읍에 있는 포교당까지 업고 왔다. 그러나 노스님의 병환이 위중하여 '호삼월 꽃 필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뒤 혼자 윤필암까지 걸어갔다. 결국 노스님은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
2022년 6월 28일 (화) 08:49 판
희선(喜善)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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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희선(喜善) |
법호 | |
속명 | 임순옥(金貞淑) |
출생 | 1929. 6. 10 |
출가 | |
입적 | |
사찰 |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희선(喜善)스님은 다수의 사찰과 암자를 다니면서 참선 수행정진에 매진하신 스님이다.
생애
1929 강원 평창 출생 1949 오대산 지장암에서 진오(眞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漢巖)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1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2~1999 관음사, 김룡사, 계조암, 홍제암, 천은사, 삼선암, 윤필암, 내원사, 견성암, 흥륜사, 위봉사 등 안거 성만 2000 대구 유가사 수도암 정진 2004 현재 수도암 주석
- 문 중 : 육화(六和)
- 수계제자 : 계연(啓然)·원공(圓空)·의현(義賢)
활동 및 공헌
출가
희선(喜善)스님은 1929년 6월 10일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에서 아버지 임석근과 어머니 이원화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예천이며, 이름은 임순옥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오빠가 농사를 지어 월정사 말사인 금수암에 불공을 올리곤 했는데, 몰래 따라갔다가 매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스님은 서산대사, 사명당 등의 책을 읽는 아버지와 불교 관련 책을 읽는 오빠를 보면서 성장했다. 두 분은 책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는 슬픔의 눈물을, 공부하는 대목에서는 감격의 눈물을, 성공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가정환경은 마침내 스님을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희선스님은 21세 때인 1949년 10월 5일 오대산 지장암으로 출가했다. 당시 지장암 입승 소임을 보시던 진오(眞悟)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같은 해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23세이던 1951년에는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6·25전쟁(한국전쟁) 피난
스님이 행자 생활을 하던 지장암에는 30여 명의 스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아침공양은 강냉이로 먹고, 점심공양은 꿀밤(도토리)을 갈아서 먹었다. 소금보다 짠 것이 지장암 김치라고 말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이었다. 스님이 지장암에 갔을 때 지장암에서는 천일기도 중이었고 스님은 한 철 동안 공양주를 살며, 새벽 3시에 예불을 모시고 마지를 올리고 기도를 했다.
오대산 지장암에서
오대산 지장암에서
은사스님은 한암 큰스님 밑에서 입승을 보면서 공부를 하고 계셨다. 그러나 1950년 스님이 22세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하여 그해 겨울 엄동설한에 오대산을 비워야 했다. 당시 스님의 노스님이신 금률(錦律)스님께서는 병환 중이셨다. 다리가 불편하신 은사스님 대신 스님이 노스님을 업고 피난을 나왔는데, 이불과 피난 보따리는 가지고 올 수 없어 절에 두고 와야 했다. 피난길은 장장 21일 동안 계속되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이불도 없이 바깥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만 움직였다.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풀숲에 숨어 있는데, 비행기가 날아가며 기름을 뿌리고 곧이어 총알이 쏟아진 일도 있었다. 지장암에서 피난을 나올 때 쓸 만한 옷가지나 그릇 등을 땅에 묻어 두었는데, 피난을 나오다가 월정사 거리에서 돌아보니 누군가가 불을 질러 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그 불로 인해 월정사와 지장암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산에는 불을 못 붙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암 큰스님이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었는데, 마침 그 일을 담당한 사람이 예전에 한암 큰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던 분이었다.
수도암 극락전
수도암 극락전
당시 지장암에 머물던 인홍스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희선스님은 노스님을 평창읍에 있는 포교당까지 업고 왔다. 그러나 노스님의 병환이 위중하여 '호삼월 꽃 필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뒤 혼자 윤필암까지 걸어갔다. 결국 노스님은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구사일생
희선스님은 추운 겨울 노스님을 업고 피난길에 올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고생한 것이 원인이 되어 윤필암에 온 뒤 6개월 동안 음식을 넘기지 못할 만큼 심각한 병고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을 서성였다. 스님이 한 달 넘게 밥을 먹지 못하자 보다 못한 은사스님과 당시 윤필암의 도감스님이 스님을 부축하여 십 리를 걸어서 한의원에 데려가셨다. 맥을 짚어본 의원은 '여기서 죽으라고 데려왔느냐. 이미 손에는 맥이 잡히지 않고 목 쪽에 맥이 조금 남아 있다.'고 말하고, 약 한 첩을 지어주면서 '변화가 있으면 다시 오고 없으면 포기를 해야 한다.'는 기가 막힌 말을 덧붙였다. 윤필암은 대중이 기거하는 처소이기에 아무리 죽을 병에 걸린 스님일지라도 편하게 지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절로 올라가는 도중 마을 보살 집에서 약을 달여 먹었는데, 먹는 것마다 토하는 것이었다. 마늘을 구워서 숟가락에 얹어 입안으로 넘겼더니 그제야 구토 증세가 가라앉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던 밥 냄새가 별 거부반응 없이 들어오고 식욕도 생겼다. 스님은 그날 누룽지를 채에 걸러서 먹고, 그 다음 날은 걸어서 절에 올라왔다. 은사 진오스님은 다 죽은 제자를 살려주었으니 법복 입고 절을 하시겠다며 장삼을 입고 의원을 찾아가서 절을 했다. 의원은 몇 년 만에 보는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 희선스님이 윤필암에 처음 왔을 때는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해서 은사스님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여주는 데도 받아먹지 못했다. 희선스님은 훗날 은사스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 대중의 본보기가 된다 하여 병이 낫고 나서 대중 참회를 했다.
생활 및 수행
윤필암에서 상주읍으로 나온 스님은 사람들에게 절이 있는 곳을 물었다. 그러다가 충청도에서 피난 나온 스님들이 상주 남장사 관음암에 머물면서 탁발을 다닌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남장사 관음암에서 입승을 보시는 스님이 도반의 상좌라며 희선스님을 거두어주셔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스님은 병색이 완연했다. 어느 날 입승스님이 일주일 동안 외출을 하시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관세음보살 염불만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입승스님은 약을 지어 스님을 살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주일 탁발을 나가신 것이었다. 입승스님이 나가시고 며칠 뒤 의원이 와서 스님의 맥을 짚어 보더니 스님의 맥이 너무 약하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후 희선스님은 상주 남장사를 나와서 오대산으로 돌아와 노스님의 입적을 지켜보았다. 스님은 나무를 깎아 푯말을 해놓고 은사스님께 노스님의 입적을 알렸다. 그로부터 3년 뒤 노스님의 다비를 모시기 위해 다시 오대산을 들른 스님은 김룡사나 설악산 계조암으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당시 신흥사의 주지스님께서는 피난 가서 비워둔 절에서는 살지 못한다며 한사코 만류하셨다.
수도암 후원
그러나 스님은 계조암에 올라가 하룻밤을 세웠다. 이튿날 한 나절이 지나자 신흥사 주지스님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공양주와 상좌스님을 데리고 계조암으로 오셨다. 그리고 '이곳에 혼자 있으면 큰일 난다.'고 하시면서 '큰절도 모두 피난을 가서 대중이 적으니 큰절에 가서 일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간청을 하셨다. 스님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스님은 계조암에서 내려와 간성을 들렀다가 낙산사에서 하루 쉬고 홍제사로 향했다.
비슬산 유가사의 부도전
다시 홍제사를 나와 지리산 천은사 뒤의 상선암이라는 암자로 간 스님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곳에서 3년을 지냈다. 그런데 '은사스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스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뜻밖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김룡사로 떠났다. 김룡사에 도착해 보니 은사스님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중상이란 것은 거짓이었고 다행히 경상이었다. 희선스님을 찾기 위한 은사스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김룡사 나한전에서 한 철을 나고 다시 길을 떠났다. 64세 되던 1992년 윤필암에서 하안거를 나고 견성암에서 철을 난 뒤, 66세에 내원사에서 동안거 등 3철 안거를 났다. 그리고 범어사, 대승사 선원, 흥륜사, 위봉사 등 선방을 두루 다녔다. 청암사에서 안거를 난 뒤 '수도암에 족보를 맡겼으니 찾으라.'는 은사스님 말씀에 수도암으로 가게 되었다. 수도암의 산세는 스님의 마음에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스님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수도암에 머물게 되었다. '평생 일종식(一種食)을 지킨다'를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희선스님은 2004년 현재 대구 유가사 수도암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계연(啓然)·원공(圓空)·의현(義賢)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91~96.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