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해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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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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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File:혜해스님1.jpg|4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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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혜해(慧海)
 
|법명=혜해(慧海)
|속명=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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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호=보주당(寶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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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박성일(朴聖一)
 
|본관=밀양
 
|본관=밀양
 
|출생=1921. 4. 27
 
|출생=1921. 4. 27
|입적=202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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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1944년
|주소=경주시 흥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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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202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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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대한불교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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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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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현대 금강산 선수행의 마지막 주자로 불리는 혜해스님은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br/> 이 페이지는 연습으로 시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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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말사 신계사에서 출가하, 남하후 신라시대에 이차돈 순교성지이자 흥륜사 터가 있는 천경림에 천경림선원을 개원하여 구도정진과 후학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북한의 신계사 복원에 기여하였으며, 현대 금강산 선수행의 마지막 주자로 꼽히는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수행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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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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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해스님은 1921년 4월 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 수역리 안의동이라는 농촌 마을에서 1남 3녀 중 셋째 딸 간혹 맏이로 표현된 보도자료가 있으나, 제자들의 확인 결과 셋째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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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평북 정주 출생
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출가 전 이름은 박성일(朴聖一)이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 pp.576-577, 한국비구니연구소 (서울, 2007, 뜨란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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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
  5살 때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19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와 살면서 가난한 살림을 책임지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의 전쟁 막바지로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 애써 농사 지는 작물들을 모두 공출로 빼앗기는 힘들고 지친 일상이었다. 출가 전 어린 성일의 금강산에 관한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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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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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에서 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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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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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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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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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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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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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
  
“지금 생각하면 기특한 생각이긴 해. 내 집이 신의주 부근에 있었어. 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늙어 죽은 후에 저 산과 바다만 남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이불을 쓰고 펑펑 울었지. 왜 그토록 울었는지는 몰라. 그런데 한없이 슬프다가도 금강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금세 웃음기가 돌았어. 숙연인가 봐.” 출처: https://m.blog.naver.com/gigangbo/140197389663 (검색일자 202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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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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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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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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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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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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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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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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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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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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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의 신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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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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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스님은 잠깐의 이별이 은사스님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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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
  
라고 금강산의 인연을 되뇌곤 했다. 성일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치면서 지나가는 탁발승을 보면 ‘나도 따라가면 참 좋을 텐데. 이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 스님들을 하대하던 현실과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하여 쉽사리 출가를 엄두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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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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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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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5세에 향곡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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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香谷)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성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남동생을 결혼시키자마자 홀가분하게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 위의 책, p.577.
 
성일은 어릴 적부터 중국인들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에서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고, 금강산에서 수행했던 사명대사의 일화들을 귀동냥으로 들으면서 자랐지만, 출가자의 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일제 식민지의 민중으로 자라면서 느낀 서러움을 출가하여 사명대사처럼 신통 자재한 힘을 얻어 나라를 구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열차를 타고 외금강역 일제강점기에 기차로 금강산 유람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경성역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철원역에서 하차 후 금강산행 전차로 환승하여 내금강역에 내리면 장안사 입구에 도착하는 경로이다. 조선철도는 1898년 시작하여, 1919년 금강산 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 1923년 철원~금화간 개통으로 시작하여 1931년 7월 금강산전기철도가 완전개통되었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철원역을 출발하여 … 병무 등 27개 역을 통과하여 종착역 내금강역까지 4시간이 소용되었다. 개통 당시 여객 운임은 쌀1가마와 맞먹는 7원 56전이었다. 두 번째는, 양양에서 출발하는 동해북부선을 타고 고성을 거쳐 외금강역에 내리면 금강산 입구에 도착하는 방법이다. 출처: 종걸·혜봉 공저, 󰡔석전 박한영󰡕 (2016, 전주시, 신아출판사), pp.309-311.; https://bestan.tistory.com/1014 (검색일자 : 2022.03.31)
 
에서 내려 수구넘어재를 넘어서 금강산에 들어갔다. 밤이 깊어서야 극락고개를 넘자 아름드리 소나무로 울창한 숲에 곧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성일은 내금강 세존봉 아래에 있던 신계사 암자 법기암에서, 1944년 음력 7월 초하루, 삭발염의하고 은사 대원 스님에게서 ‘묘련(妙蓮)’이라는 법명을 받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행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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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
묘련이 행자 생활을 한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大願)스님을 비롯하여 사숙님들과 사형들, 그리고 은사 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 20명의 대중이 모여 살았다. 그때, 세수 예순이었던 은사 스님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출가 전에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가사 선생님을 한 적이 있는 당시 보기 드문 지식인으로, 항상 관음기도로 수행 정진하셨으며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곤 했다. 󰡔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 위의 책,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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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
  묘련은 엄격한 은사 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 스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하며 지냈다. 때로는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다.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던 짚신이 하루에 한 켤레씩 떨어지곤 했다. 은사 스님은 끊임없이 사중 일을 하시는 한편으로, 무명천에 분홍 빨강 등 색색의 물을 들여서 밤새 다듬이질을 하고 기르는 아이들의 옷을 재봉틀로 지어 입혔다. 그런 은사 스님 밑에서 묘련의 일상은 낮에는 부엌일, 밭일, 빨래 등을 하고 밤이 되어야 󰡔천수경󰡕 등을 외우는 고된 날들이었지만 부처님 전에 나아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간절하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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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해 처음 맞은 겨울인 이월 초엿새 날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묘련은 절 앞마당에 언 눈을 모조리 두드려 깨고 나서 24명분의 빨래를 시작했다. 태산 같은 빨래는 하루 일거리가 아니었다. 묘련은 도랑에 솥을 걸어놓고 옷을 삶고 건져 낸 옷은 다시 겨울 도랑의 찬물에 헹궜다. 한 벌의 옷을 몇 번에 걸쳐 헹궈서 잿물을 뺀 후에 다시 먹물을 들이는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한 묘련은 정작 본인의 빨래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다 깨끗하게 씻고 빨래해도, 묘련은 어지간히 땀이 나도 그저 냇가에 가서 쓱쓱 닦아내는 것으로 빨래하는 것을 대신했다. 남들과 같이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어보지 못했다. 겨울이면 한 달에 한 번 따뜻한 물을 데워서 대중이 목욕할 때도, 본인은 그저 물을 뒤집어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시간과 물을 아끼는 습관은 원적에 들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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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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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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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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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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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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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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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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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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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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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
  
==스님의 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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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
혜해 스님은 구두선(口頭禪)을 경계하고 직접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계율에 철저했고, 수좌 5계를 철저하게 지키고 늘 제자들을 근기에 맞게 가르쳤으며, 스스로는 하심과 검소함으로 일관했다. 혜해 스님은 스스로 수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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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
  “(화두가) 안 끊어지지. 아무리 잠을 자려고 애를 써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참 어렵기는 하지. 말쑥하게 화두가 들리면, 다른 생각이 나는 법이 없는데, 그렇게 하기를 근 3년을 했지만, 그래도 깨닫지는 못했어요. 화두가 놓쳐지지 않고 오직 화두뿐이었는데, 어째 그래 깨달아지지를 않았어요.… 아무래도 잘하지 못했으니까 못 깨달았겠지요.
 
</pre>
 
출처 : 2008 <부처님오시날> 특집 동영상 중에서
 
  
 
   
 
   
라고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피력하곤 했다. 그저 스님의 법을 듣고자 찾아오는 납자에게는, ‘나에게 들을 말이 없어요.’라고 애써 겸손하게 말했지만, 가르침이 필요한 이에게는 그의 근기에 맞게 늘 가르치신 선지식이었다.
 
 
 
==연관검색어==
 
==연관검색어==
  
 
==관련 자료==
 
==관련 자료==
* 유정의 논문 "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 (발표 : 2022. 5. 27, 중앙승가대학 학술대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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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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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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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
 +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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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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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

2022년 6월 12일 (일) 18:06 기준 최신판



정의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말사 신계사에서 출가하, 남하후 신라시대에 이차돈 순교성지이자 흥륜사 터가 있는 천경림에 천경림선원을 개원하여 구도정진과 후학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북한의 신계사 복원에 기여하였으며, 현대 금강산 선수행의 마지막 주자로 꼽히는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1921 평북 정주 출생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금강산에서 남하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

활동 및 공헌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

은사스님의 신통력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스님은 잠깐의 이별이 은사스님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 그리고 25세에 향곡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香谷)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

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

입적

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

혜해스님의 사리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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