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육문스님(六文, 194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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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7일 (월) 11:03 판



정의

육문스님은 1962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해 1969년 경북 양진암서 수선 안거 이래 25안거를 성만했다. 백흥암 도감으로 가람 신축불사를 10년간 하고 전국비구니회 선문회 회장, 11대 종회의원, 제11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엮임한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6 충남 서산 출생
1962 문수사에서 성태(聖太)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2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1980 양진암 등 제방 선원에서 11하안거 성만
1974 법주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9~1982 동화사 양진암, 백흥암 입승 역임
1981 백흥암 도감
1982~1998 가람 신축 불사

(극락전 개금 불사, 설선당, 향적당 불사, 무이당, 요사채 개축 불사)

1994 대한불교 조계종 개혁회 의원 및 상임의원, 대한불교 조계종 11대 종회의원
200 백흥암 선원장
2004 현재 군위 법주사 주지
2004~2014 전국비구니 선원 선문회 회장
2015 제11대 전국비구니회 회장
2019 군위 법주사 회주 , 은해사 백흥암 회주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 청정수행정진(淸淨修行精進)
상훈 총무원장상(1987) 외 다수
취미 서예
수계제자 범준·무진·대원·원경·경호·보덕·대운·선휴·경원·정현·자선·인선·지엄·현상·도연·지양 외 19명

활동 및 공헌

출생및 출가동기

여운(旅雲) 육문(六文)스님은 1946년 12월 10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장리에서 아버지 이준과 어머니 김순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이며, 이름은 이수남이다. 16세 되던 1962년, 스님은 조카의 죽음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그해 4월 10일 충청북도 문수사로 입산하였고, 10월 15일 수덕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그 뒤 1964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뒤, 동화사 양진암에서 동안거를 시작으로 구도 정진에 전념하였다. 스님이 29세 되던 1974년 9월 3일 속리산 법주사에서 석암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경북 영천 은해사 창건 원찰 백흥암 부처님의 눈물

육문스님의 나이 서른여섯이던 1981년 4월 제방 선원을 물과 구름처럼 떠돌다가 백흥암에 들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해우소 바닥에서 대변을 주워 먹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 다음날 새벽 걸망을 지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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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사도 못 여쭙고 떠나온 것이 뒤늦게 생각나 다음해인 1982년 1월 20일 백흥암 감원이란 직분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뜻밖에도 눈물을 보이시는 것이 아닌가! 경북 영천 팔공산의 동쪽 자락에 자리한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 혜철국사의 발원으로 창건한 절이다. 조선조 때에는 인조의 태를 수호하는 사찰로서, 오늘날까지도 백흥암에는 명종 당시에 간행된 여러 가지 불서와 문서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창건 당시 근처에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이를 따라 절 이름을 백지사(柏旨寺)라고 불렀다. 백흥암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명종 원년 천교대사에 의해서다. 백흥암은 본사인 은해사의 창건 원찰이기도 하다.

극락전 수미단,극락전 개금불사

지금까지 보전해온 극락전 건물은 영조 때 중건된 것으로서, 아미타 삼존불을 떠받드는 수미단은 사실적이고 화려한 목조 새김이 돋보이며,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미단은 조각 기법과 구성이 뛰어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목각 부조이다. 5단으로 구성된 각 단마다 천녀와 동자 그리고 갖가지 동물을 입체적으로 조각해 넣은 걸작으로 그 조화로운 배열과 나무를 투조한 기법은 보는 이의 감탄을 저절로 자아내게 한다. 또한 백흥암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추앙받고 있는 추사 김정희가 쓴 ‘산해숭심(山海崇深)’이란 글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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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육문스님을 맞아준 것은 이런 화려한 역사의 흔적을 상흔처럼 간직하고 있는 낡고 퇴락한 사찰이었다. 당시 극락전, 방장실, 심검당, 명부전, 나한전 등이 있다고는 하나 이름뿐이고, 실제로는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금이 떨어져 얼룩덜룩해진 부처님 얼굴이 스님에게는 눈물로 보였던 것이다. 스님은 지체없이 극락전 개금불사를 하여 1982년 12월 부처님 용안에 자비로운 미소를 되찾아드렸다. 1983년 요사채 개축 불사, 1992년 설선당과 향적당 불사 등 스님은 지칠 줄 모르고 불사를 거듭하였다. 십년 불사의 길이 하도 고되고 힘이 들어 ‘이제 그만 나 떠날랍니다.’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부처님은 눈물을 보이며 스님을 붙드셨다고 한다.

극락전해체복원, 십년불사와 노동울력

스님은 다 지어 놓은 절에 나비처럼 곱게 날아들어 산 것이 아니었다.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는데 실측 기간만 무려 한 달이 걸렸다. 복원 불사란 신축의 몇 곱절 되는 비용과 품이 드는 일이었다. 극락전 앞에 있는 두 당우도 본 기둥 중간중간에 새 나무로 쐐기를 박아 땜질을 하는 등 옛 모습 그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지키려고 성심을 다하였다. 스님은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공양간을 무시로 드나들며 채공 노릇을 하며 초심자의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스스로 주지의 격을 낮추는 일이 스님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또한 몇 천 평이나 되는 밭의 울력뿐 아니라 봄이면 나물 캐는 일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손을 놓아두는 법이 없는 것도 스님의 천성이다. 천성이 그러하기에 절 앞까지 이어지는 길 닦기에도 돌을 손수 등짐으로 져 나르고, 깨진 기와로 빗살무늬를 해 박은 낮은 토벽을 쌓는 일까지 거드는 도량 안팎으로 스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스님은 필요하면 용처를 밝히고 돈을 타 갈 뿐 안살림은 모두 젊은 스님들에게 일임해두었다.십 년 불사를 원만히 이룬 것은 부처님 법을 의지해서 바르게 살았더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팔공산 호랑이

남하고 시비는 물론 얼굴 한번 붉히는 일 없이 살아온 스님이 ‘팔공산 호랑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은, 그간의 어려움이 어떠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자그마한 몸에 얼굴 또한 고우나 언행이 분명한 모습은 스님의 성정을 짐작하게 한다. 경우에 어긋나는 꼴은 절대로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지적하여 바로잡는다. 10.27 법난(法亂) 때 절에 들이닥쳐 수선을 피웠던 무리의 우두머리가 도무지 말을 삼갈 줄 모르는 스님의 대범함에 놀라 뒷날 다시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는 일화가 있다. 아마도 스님의 가장 든든한 배경은 부처님이기에 그러한 힘이 솟아난 듯하다. 법난 이후 석 달을 미행하고 다녔다는 기관원에게 스님은 오히려 ‘고맙다’고 말했다. 살아온 길이 여법하면서도 청정하여 거리낄 바가 없었으나 알아주는 이 없었는데, 그 모습을 다 확인했을 터이니 고마운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종회의원으로 자주 서울에 드나들어야 할 형편이지만 수원에서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스님은 지난 개혁불사 때 비구니스님들이 참종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몫을 하는 등 다방면에서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수행

스님은 세수 33세부터 십 년 이상 동화사 양진암, 내원사, 해인사 삼선암 등 제방 선원에서 한 철도 거르지 않고 수행을 하였다. 안거 때만이 아니라 내원사에서 머물 때는 산철 결제까지 도모 했으니, 그 일은 아마 비구니 최초의 산철 결제였을 것이다. 백흥암에서도 좌복을 걷는다는 생각 없이 처음 몇 년 동안은 마음을 안 도반스님들이 죽비를 들려 입승을 시켜 놓았다. 그러나 땟거리도 없는 가난한 절 살림을 꾸려야할 스님에게는 지나친 일이었다. 좌복 위에 앉지 못하는 아쉬움은 백흥암을 온전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수행처로 만들겠다는 스님의 각오로 이어졌다. ‘부모에게 큰 빚을 지고 스님이 되었으니, 문 잠가 놓고 가난하게 살지언정 잘 먹고 잘 입는 편안한 수행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백흥암 행자 교육

스님은 백흥암으로 출가한 행자들에게 남다른 각오로 가르친다. 13년 동안 허락 없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몇 번을 덧대어 기운 헌옷에 짝이 다른 양말과 행전 차림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초발심을 지키게 한다.행자들은 절문 앞에 성처럼 쌓아 놓은 나무로 불을 때서 이십 분 만에 밥을 지으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신심과 정성을 다하도록 훈육을 한다. 또한 큰방 스님들은 깨진 기와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좌복을 지켜 산철에도 결제가 끊어진 적이 없도록 한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수행 정진에 힘쓰면 뭇사람의 심금을 자연스레 울리리라

30여 명의 상좌들 가운데 공부하는 스님이 절반이 넘는데, 세속으로 나가서 포교하는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에게는 맵게 이른다. “경전만 달달 외워 전할 일이 아니라 수행과 정진에 힘쓰면 그 끝에 저절로 얻어지는 바가 필연 있을 터이니, 그 여법한 행과 산소리야말로 뭇사람의 심금을 자연스레 울릴 것이다.” 육문스님의 포교 방식과 중노릇하는 방식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씀이다. 스님은 1994년 3월 대한불교 조계종 개혁회 의원 및 상임의원, 같은 해 11월 대한불교 조계종 11대 종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04~14년 전국비구니 선원 선문회 회장 역임. 2015년 전국비구니회 제11대 회장으로 선출된 지낸 육문스님은 2019년 현재군위 법주사와 은해사 백흥암 회주로 있으며, 문하에는 상좌인 범준·무진·대원·원경·경호·보덕·대운·선휴·경원·정현·자선·인선·지엄·현상·도연·지양 외 19명이 있다.

백흥암

백흥암(百興庵)은 은해사(銀海寺)의 산내 암자로 팔공산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은해사의 북서쪽 골짜기 치일 저수지를 지나 깊숙이 들어앉은 조용하고 소박하며 정갈한 비구니 도량이다. 이 암자는 신라 경문왕 9년(869년)에 세워졌는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백지사(百旨寺)라는 이름으로 혜철(惠哲)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조선 명종 1년(1546년) 천교(天敎)스님이 중창하여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조선 말기에 몇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이루어졌지만 사세는 날로 퇴락해 갔다. 1981년 육문(六文)스님이 도감으로 부임하여 극락전(보물 제790호)을 해체 복원하면서 중창 불사를 시작해 오늘날 비구니 도량으로서 면모를 굳게 다져 나가고 있다. 현재 당우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우측에 선원 심검당과 좌측에 진영각이 있고, 문루 보화루(寶華樓), 극락전 좌측에 차례대로 입승실, 무위전,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밖에 요사와 신설당이 있다. 백흥암은 비구니 선원 중에 유일하게 산문을 닫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도량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수행 분위기가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어 결제와 해제가 따로 없이 열심히 정진할 수 있다.

참고문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육문(六文)스님 본항목 육문스님(六文, 1946~ ) 六文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육문스님(六文,_1946生,_비구니)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육문(六文)스님 삼현(三賢)문중 ~의 일원이다
육문(六文)스님 성태(聖太)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육문(六文)스님 충북 문수사 ~에서 출가하다
육문(六文)스님 수덕사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육문(六文)스님 속리산 법주사에서 석암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육문(六文)스님 은해사 백흥암 ~의 회주 주지를 역임하다
육문(六文)스님 군위 법주사 ~의 회주 주지를 역임하다
육문(六文)스님 제11대 전국비구니회 ~의 회장을 역임하다
육문(六文)스님 전국 비구니선원 선문회 ~의 회장을 역임하다

사찰

  • 군위 법주사 :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 773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