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표스님(圓表, 195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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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8일 (목) 08:02 판
원표(圓表)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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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원표(圓表)스님 |
법호 | 무견(無見) |
속명 | 서미향(徐美香) |
출생 | 1951. 3. 21 |
출가 | 1972 |
입적 | 2014년 |
사찰 | 다선암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287 ) |
특이사항 |
정의
원표스님은 한국 전통차와 서각을 통하여 수행과 포교에 공헌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51 | 경남 고성 출생 |
1972 | 청암사에서 법천(法泉)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73 | 해인사에서 지관(智冠)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7 |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2 | 응송스님으로부터 다(茶)법제 전수받음.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
1987 | 한국 철제각연회 전시 (매년) |
1988 | 무견 서각연구실 개원 .영봉다원 개원 |
1990~1991 | 일본 동경 한국문화원 주최 서각전시회 출품 |
2004 | 현재 다선암 주지 |
인적사항
문중 | 육화문중 |
수행지침 | 보는 것을 다시 보고, 듣는 것을 다시 듣는다.(자성반조(自性返照)) |
생활신조 | 항상 아는 데로 살 줄 알아야 한다. |
저서 및 작품 | ‘진주 죽헌서실 회원전’ 찬조 출품 2회 |
특기 | 다(茶)법제, 서각 |
수계제자 | 석호(石虎) 원표(圓表)스님 |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불심 깊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세 자매가 모두 출가하다 무견(無見) 원표(圓表)스님은 1951년 3월 21일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337번지에서 아버지 서보훈과 어머니 하덕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서미향이다. 스님의 집안은 불심 깊은 할머니의 영향으로 속가의 세 자매가 모두 출가할 만큼 불연이 지중하였다. 일본 리쇼(立正) 대학의 유식학 박사를 취득한 탁연스님과 석남사로 출가한 도관스님은 원표스님의 속가 자매이다. 원표스님은 21세 때인 1972년 7월 12일 불연을 따라 경북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에서 법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특별한 신심이나 남다른 사정이 있다기보다는 그야말로 시절 인연이 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밟기 시작했다. 스님은 출가 다음해인 1973년 사미니계를 받았지만 스스로 출가자답게 열심히 살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방황하였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부터 스님은 대금에 매력을 느꼈는데, 마침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김동표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성격인 스님은 내친 김에 대금산조까지 모두 배우기를 마쳤다.
10.27 법난을 겪으며 심리적 갈등을 느끼다
원표스님은 몇 번의 안거를 마친 후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그 해 가을 10.27 법난이 일어났고, 사건을 지켜보며 스님은 엄청난 심적인 갈등을 겪었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6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고 수많은 대덕고승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법난을 겪을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 많은 역대 선지식들이 인연 따라 이 땅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불국토가 되어 있어야 하거늘, 과연 역대 조사들이 주(住)한 곳은 어디인가?’스님의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화두에 의심이 생기지 않아 고생하다
그 즈음 스님은 붓글씨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재주를 타고난 데다 아침에 시작하면 저녁에 붓을 놓을 만큼 끈기가 있어 주위 도반스님이나 붓글씨 선생님의 격려와 찬탄 속에 기대를 온몸에 받고 있었다. 1982년 32세 되던 해, 스님은 중앙승가대 제 2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즈음 스님은 역대 조사의 주처(住處)에 대한 의심을 품고 선방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토록 해보고 싶은 붓글씨를 계속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였다. 그러다가 결제가 임박할 즈음 ‘승려가 되어 역대 조사의 주처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뭘 하겠단 말인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선방으로 향했다. 스님은 음성 미타사에서 걸망을 풀었다. 그런데 반 철이 지나도록 큰스님께 받은 마삼근 화두에 도무지 의심을 일으킬 수 없었다. ‘왜 의심이 안 일어나는가?’, ‘그러면 내가 아는가?’, ‘모른다.’, ‘모르면 당연히 의심이 일어나야 되지 않는가?’ 스님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간절한 의심이 생기지 않아 회의를 느끼고 급기야 공부를 그만두어야겠다는 극단적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울 가면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의심도 나지 않는 화두를 들고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가.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두 번 다시 선방에 오지 않겠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도무지 공부가 되지 않아 포행을 나가 길가에 앉아 있는데 도반스님이 다가와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천만 번 생각해도 의심이 나지 않는 화두를 붙들고 있으면 뭐 하노. 의심이 나야 공부를 하지. 이제 안 할 거라.” “큰스님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서 큰스님이 되셨듯이 원표스님도 열심히 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공부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스님은 도반스님과의 대화 끝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해제 무렵에도 간절한 의심은 갖지 못했지만, 하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의심이 안 난다고 하는 이놈이 무얼까?’를 물고 늘어지다
스님은 해제 후 바로 세등선원으로 산철 결제를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왜 의심이 안 날까?’ 자문하고 있는데, 문득 ‘의심이 안 난다고 하는 이놈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전강 큰스님의 ‘이뭣고’ 법문을 듣고 나서 비로소 화두가 정립되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나름대로의 수행 수칙을 정해 대중에 나가지 않게 될 때까지 촌보도 물러서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스스로의 신체 리듬에 맞는 수면 시간을 파악했다. 필요한 만큼 자고, 정진할 때는 항상 깨어 있으며, 낮에 졸고 밤에 앉아 있는 일은 하지 말 것! 과식하거나 간식을 먹어 정진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할 것! 산책을 하지 말 것! 도반을 사귀어 공연히 구업을 짓지 말 것! 지대방에 가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스님은 위와 같은 수칙을 세워 놓고 철저히 공부에 몰두하였다. 스님이 불영사에서 정진하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불국사 조실 월산 큰스님이 반 살림 법문을 하셨는데, 저녁에는 대중들이 개인 면담을 했다. 원표스님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역대 선지식이 주한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 참 괜찮은 질문이네. 너 화두가 뭐꼬?” 조실스님의 질문에 스님은 처음에는 마삼근 화두부터 시작했다가 전강 큰스님의 법문 테이프를 듣고 ‘이뭣꼬?’ 화두를 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조실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제대로 들고 있네. 하면 되겠어. 한번 해봐. 3년, 6년, 9년 넘어가면 어려워. 해 넘기지 말고 해봐라.” 조실스님은 ‘알음알이는 공부에 걸림이 된다.’고 덧붙이며 역대 선지식의 주처에 대한 말씀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셨다.
“너의 집에 불이 붙었으니, 이 덕숭산에서 태우든지 끄든지 한번 해봐라.”는 말을 듣다
이후 스님은 해인사, 수덕사, 오대산, 범어사, 불영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을 거듭했다. 스님은 어느 산중이든 걸망을 지고 들어설 때는 ‘이 산중에서 공부 한번 실컷 해봤구나.’하는 생각을 가질 만큼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공부가 순조롭게 되지 않아 공부에 대한 갈증으로 객기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한 순간도 참구의 고삐를 놓은 적이 없었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정진할 때였다. 어느 순간 모든 경계가 일시에 끊어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들이닥쳤다. ‘이 경계에 속으면 안 되고, 공부가 잘 된다는 생각조차도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경책하며 정진하던 중 불현듯 ‘없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심이 일어났다. 이에 원표스님은 당시 견성암 조실이었던 원담 큰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없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참 맹랑한 말이네. 우리 대중이 외국 스님 17~18명과 매일 자자를 하는데, 이런 질문은 처음이다.” 그러면서 큰스님은 원표스님의 화두가 무엇이냐 물었고, 원표스님은 그때까지의 공부 과정을 말씀드렸다. “화두는 바로 들고 있네. 그렇게만 들고 하면 돼.” 큰스님은 격려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때 스님이 다시 큰스님께 ‘역대 선지식이 주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着)의 의지(意旨)’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참구하라고 하셨다. 스님은 수덕사 큰절에서 견성암으로 돌아오면서 ‘왜 문밖의 찰간대를 꺾으라 했을까?’라는 의심에 몰두하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도 잃어버린 채 계속 주위만 돌다가 문득 찰간대 화두에 대한 의심이 풀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큰스님을 뵙고 말씀을 올렸다. “너의 집에 불이 붙었으니까, 이 덕숭산에서 태우든지 끄든지 한번 해봐라.” 큰스님 말씀에 스님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어느 비구니 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무릎을 치다
이후 스님은 쉼 없는 정진 중에 공부를 많이 하신 어느 비구니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그 노스님께도 역대 조사들의 주처를 여쭈었다. 그러자 노스님께서는 고려말 삼정승이 국사로 모실 도인스님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삼정승이 전국을 뒤져도 국사로 모실만한 도인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 스님이 ‘저 북대에 짚신을 짜고 있는 늙은이가 있는데, 그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이에 정승이 스님 말씀대로 노인을 찾아가 ‘최초 불(佛)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그 노인은 ‘삼성반원(三星半月)이오.’하고 답했다고 한다. 비구니 노스님의 이야기를 듣던 중 원표스님은 곧 바로 ‘삼세제불의 주(住)한 곳과, 역대 선지식의 주한 곳과, 원표의 주한 곳을 알았다.’하며 무릎을 치게 되었다. 이후 원표스님은 토굴로 내려와 서각을 하고 차 농사를 지으며, 동중(動中)에 정(靜)을 익혀 보는 것을 다시 보고, 듣는 것을 다시 듣는 자성 반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봉녹차(靈鳳綠茶)’와 자하청다(紫河淸茶)를 제작·보급하며 차문화 발전에 일조하다
스님은 ‘앞으로 나의 인생은 작설차의 맛과 같이 담백하게, 난초의 향과 같이 은은하게, 무궁화 꽃과 같이 깨끗하게 삶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차가 귀하여 좋아하는 작설차를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던 스님은 직접 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한 후 원표스님은 한 스님으로부터 해남 대흥사에 가면 초의선사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분이 바로 초의스님 열반 30년 뒤에 출가하여 초의스님의 다법(茶法)을 이어온 계승자이자 독립 운동가이신 응송(應松)스님이다. 스님은 응송스님을 찾아뵙고 차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표스님은 백화사 응송스님으로부터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등 차에 대한 이론을 배웠고, 무음자(無飮子)라는 다호(茶號)를 받았다. 매년 찻잎을 딸 때가 되면 스님이 계시는 곳에 가서 차를 만들었다. 응송스님은 초의스님의 다법을 원표스님에게 전해주고 1991년에 입적하셨다. 원표스님은 철마다 도반스님들과 야생차를 덖어 차를 만들었는데, 스님의 차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야생차로는 수요가 한정될 수밖에 없으니 차를 직접 재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영봉사지에 처음 차 종자를 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영봉다원이다. 영봉다원에서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초의선다(草衣禪茶) 무음자(無飮子) 영봉녹차(靈鳳綠茶)’라는 이름의 증제차 및 발효차인 자하청다(紫河淸茶)을 만들고 있다. 자하청다는 거듭된 연구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완전 발효차이다.
서각을 배워 인간문화재 이수자로 활동하다
원표스님은 인간문화재 각자장 오옥진 선생에게 서각을 배운 후 인간문화재 이수자로 활동중이다. 해인사 일주문 현판, 위봉사 일주문 현판, 석남사 금당 현판, 미국 보스턴 서광사 후불탱화, 운문사 문수선원 후불탱화 등 원표스님의 작품이 여러 사찰에 걸려 있다. 원표스님은 한국철제각연회 전시회와 일본문화원 주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했고, 1988년부터 ‘무견(無見)서각연구실’을 개원하여 후배를 양성하였다.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원표스님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알기에, 삼라만상 우주만물이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만물과 더불어 존재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2004년 현재 원표스님은 다선암 주지로 수행정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석호(石虎)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7~48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44.
- 다선암 원표스님, “서각은 참선 수행이자 포교의 길”(국제뉴스 2019.6.10.)
https://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0204
- 여름 향기 가득한 사천 다선암 스님들 (네이버블로 2018.7.24.)
https://blog.naver.com/sacheoncity/221325263265
- 다선암 원표스님의 순수 유기농 草衣禪茶 (다음블로그 2010.3.28.)
https://blog.daum.net/samhang61/1705891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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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표(圓表)스님 | 본항목 | 원표스님(圓表, 1951) | 圓表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원표(圓表)스님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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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표(圓表)스님 | 법천(法泉)스님 | ~을 은사로 출가하다 |
원표(圓表)스님 | 지관(智冠)스님 | ~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하다 |
원표(圓表)스님 | 고암(古庵)스님 | ~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하다 |
원표(圓表)스님 | 응송스님 | ~으로부터 초의스님의 다법을 전수받다 |
원표(圓表)스님 | 영봉다원 | ~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 발효차 다원을 개원하다 |
원표(圓表)스님 | 무견(無見) | ~ 서각연구실을 개원하다 |
원표(圓表)스님 | 일본 동경 한국문화원 | ~ 주최 서각전시회 출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