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오스님(眞悟, 1904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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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487-03.jpg|섬네일|[수도암 극락전]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288]] | ||
+ | [[File:487-04.jpg|섬네일|[유가사의 부도전]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2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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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松月) 진오(眞悟)스님은 1904년 음력 7월2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에서 아버지 전주 이씨 와 어머니 청원 황씨 사이의 여섯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즐겼고 부모님 밑에서 풍요로우면서도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유복하게 지냈다. | 송월(松月) 진오(眞悟)스님은 1904년 음력 7월2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에서 아버지 전주 이씨 와 어머니 청원 황씨 사이의 여섯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즐겼고 부모님 밑에서 풍요로우면서도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유복하게 지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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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 수도암== | ==유가사 수도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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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암은 유가사에 속한 비구니 수행처로 극락전, 천태각, 산령각, 요사 두 채가 있는 아담한 암자이다. 유가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시대때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유가사에서 북서편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내 암자로 암자 주변에는 낙암 선사의 비문이 있다.극락전 앞뜰에는 옛 전설을 간직한 거북바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지가 4미터 정도 뻗은 꽤 큰 떡갈나무가 있다 | 수도암은 유가사에 속한 비구니 수행처로 극락전, 천태각, 산령각, 요사 두 채가 있는 아담한 암자이다. 유가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시대때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유가사에서 북서편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내 암자로 암자 주변에는 낙암 선사의 비문이 있다.극락전 앞뜰에는 옛 전설을 간직한 거북바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지가 4미터 정도 뻗은 꽤 큰 떡갈나무가 있다 | ||
*출처:한국관광공사 http://data.visitkorea.or.kr/page/1610789 | *출처:한국관광공사 http://data.visitkorea.or.kr/page/16107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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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지도== | ||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 |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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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주석== | ||
<references/> | <references/> |
2022년 7월 27일 (수) 09:10 판
진오(眞悟)스님 | |
---|---|
법명 | 진오(眞悟) |
법호 | 송월당(松月堂) |
속명 | |
출생 | 1904. 7. 23. |
출가 | 1930년 |
입적 | |
사찰 | 유가사 수도암(대구 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양리 11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진오(眞悟)스님은
생애
연도 | 내용 |
---|---|
1904 | 경남 마산 출생 |
1930 | 윤필암에서 금률(金律)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33~1944 | 윤필암, 견성암, 간월암, 지장암, 김룡사, 청암사, 수도암 등 안거 성만 |
1955~1964 | 운달산 김룡사 주지 역임 |
1964~1990 | 김천 청암사 극락암 주석 |
1990 | 비슬산 유가사 수도암 주석 |
1994 | 수도암에서 입적(세납 91세, 법납 64세), 다비후 사리 31과 나옴 |
1999 | 수도암에 부도 세움 |
문중 | 육화(六和)문중 |
수계제자 | 희선(喜善)・수정(修淨)・보원(普願)・성운(性雲) |
활동 및 공헌
출생
송월(松月) 진오(眞悟)스님은 1904년 음력 7월2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에서 아버지 전주 이씨 와 어머니 청원 황씨 사이의 여섯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즐겼고 부모님 밑에서 풍요로우면서도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유복하게 지냈다.
출가
16세 때 우연히 우연히 팔상록(八相錄)을 접하고 불법(佛法)에 해탈의 길이 있음을 깨닫고 하동산(河東山) 스님 법문을 듣고 진여화(眞如華) 불명으로 보살계를 수지한 뒤 곧바로 삭발을 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재가자로 공부하다가 삭발할 수 있는 인연 터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문경 대성사 윤필암이었다. 그곳에서 참선하시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고 재발심하여 금률스님을 은사로 동산(東山)큰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마침내 출가를 하였다. 이 때가 1930년 스님의 세수 27세 때의 일이었다. 그때 본 사찰에서 입승 소임을 맡고 계시던 본공스님께서“스스로 발심하여 출가한 신심 깊은 사람이니 뒷바라지 해 주리라”고 하시면서 선배로서 도반으로서 참으로 크나큰 힘이 되어 주셨다.
수행
그 후 진오스님은 제방의 선방을 돌며 가행정진에 돌입했다. 윤필암에서 입승 소임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오대산 지장암, 덕숭산 견성암, 서산 간월암, 조계산 선암사, 윤달산 김용사, 불영산 청암사 등지에서 스님이 실천한 정진의 삶은 출가자의 수행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보여주었다.
일제시대인 1940년대 초 서산 간월도 만공 큰스님 회상에서 공부하실 때의 일이다. 3년 결사로 용맹정진을 하시던 어느 날, 큰 스님께서“아무래도 이러다 우리나라를 잃을 것 같으니 산중(山中)공사를 하여 기도에 들어가자”고 제의하셨다. 이에 대중들은“일본인을 이 땅에서 쫓아내자”라는 발원으로 백일 관음기도 정진에 들어갔다. 그런데 기도 회향 바로 전날, 일본 총독의 지배 아래 사찰령으로 인하여 사찰의 진면목을 잃어가는 수난 시대가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당시 스님께서는 큰스님 이하 대중스님을 위하여 만성스님과 후원 일을 자원하여 전담하시고, 바닷물이 빠질 때에는 간월리에 나가서 나물을 뜯어 기도 대중 외호에 힘을 기울이시며 기도에 임하였다. 또한 스님께서는 오대산 지장암 방한암 큰스님 회상에서 9년간 정진을 하는 동안 6·25 한국전쟁을 만나 어려운 시대를 넘기셨는데, 이때 그 곳에 수행 중이던 성철 큰스님, 향곡 큰스님, 탄허 큰스님 등과도 교류를 하였다. “앞으로 행자를 받을 때에는 진오 같은 사람만 받으라.” 한암 큰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스님의 수행정신이 철두철미하여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문경 김룡사 주지로 부임
1955년 무렵 스님께서 문경 김룡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속인들에 의해 소작되던 사찰소유의 많은 토지가 대처승의 잘못으로 속인 명의로 모두 변경되어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은 땅을 되찾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였다. 모내기 대중 운력을 하던 날, 어느 스님이 모심는 방법을 모르셔서 호미를 들고 모내기를 하는 것을 보고 한바탕 웃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토지를 40여 명의 대중스님이 자작(自作)하기란 힘에 겨웠고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선농일치의 삶을 몸소 실천하면서 스님은 대중에게“중은 첫째도 둘째도 신심이 있어야한다. 달리 중노릇을 잘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산 혜연스님의 발원과 같이 정신출가(正信出家)하여 동진입도(童眞入道)하기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발원하면서, 부처님 말씀 잘 행하며 대중 속에서 수순하고 파계(破戒)치 않으며 항상 보시하는 마음으로 정진해 가는 것이 중노릇 잘 하는 길이다”또한 선교(禪敎)가 둘이 아니니 어느 하나만이라도 치우쳐서 안 된다. '세존(世尊)이 삼처전심자(三處傳心者)는 위선지(爲禪旨)요,일대소설자(一代所說者)는 위교문(爲敎門)이라고(故)로 왈(曰)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니라'하였다. 이는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가 되고,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는 뜻이다. 이렇듯 둘 다 여윌 수 없으니 현 시대에 맞춰서 참선과 포교의 일익이 되어 주도록 하라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신심 있는 단월들이 불법을 알고자 찾아오면 초발심의 동기가 된 『팔상록』과『불교입문』의 경전을 직접 주었는데, 이는 참선하는 가운데 포교에도 또한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또'불법은 허공경계와 같아서 호호탕탕(浩浩蕩蕩)하여 본래 거래(去來)가 없으니 거기에는 한마디도 붙일 수 없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부처님의 진리(眞理)인데 내가 새삼스레 말을 덧붙일 것이 없다.'하시며 일소(一笑)하였다.
비슬산 유가산 수도암으로 옮기다
계행 청정을 으뜸으로 생활에 임하시는 스님은 세랍 85세,, 법랍 50세로도 발우를 폈고, 밤이 되면 호롱불을 밝히고 참선에 들었다. 1990년 그해 음력 3월 스님께서는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비슬산 유가산 수도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4년이 흐른 어느 날 시자에게 삭발과 목욕을 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입적
진오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호롱불을 켜고 참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점심(點心)을 마친 스님께서는 의자에 앉아 숨결을 고르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대중들이 스님을 자꾸 쳐다보자,‘쳐다보지 말라’고 이르신 뒤에 방으로 들어가신 뒤 그대로 입적에 들었다. 1994년 3월 7일, 음력 정월 스무 엿새 오후 3시 30분경이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앉으신 그대로 여전히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다. 스님의 세납 91세, 법랍 64세였다.
다비를 마치니, 청옥색을 띠는 사리가 나왔는데 마치 생전의 스님의 눈망울을 보는 듯 했다고 한다. 사리 31과는 이후에 1999년 4월 24일(음력 3월 9일)에 수도암에 원형의 부도탑에 봉안 되었다. 그리고 한암스님 회상에서 스님과 함께 공부했던 비구 동성스님이‘송월당(松月堂)’이란 당호를 내렸다. 스님의 육신은 비록 사바세계를 떠나갔지만, 스님의 유지는 희선(喜善)・수정(修淨)・보원(普願)・성운(性雲)스님에게 이어져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 운문회보 발취
불기 2532년 (1988년 7월 25일) 제 25호
유가사 수도암
수도암은 유가사에 속한 비구니 수행처로 극락전, 천태각, 산령각, 요사 두 채가 있는 아담한 암자이다. 유가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시대때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유가사에서 북서편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내 암자로 암자 주변에는 낙암 선사의 비문이 있다.극락전 앞뜰에는 옛 전설을 간직한 거북바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지가 4미터 정도 뻗은 꽤 큰 떡갈나무가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284~289)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487)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9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진오(眞悟)스님 | 본항목 | 진오스님(眞悟, 1904~1994) | 眞悟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진오스님(眞悟,_1904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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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오(眞悟)스님 | 육화(六和)문중 | ~의 일원이다 |
진오(眞悟)스님 | 금률(金律)스님 | ~의 제자이다 |
진오(眞悟)스님 | 윤필암 | ~에서 출가하다 |
진오(眞悟)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진오(眞悟)스님 | 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진오(眞悟)스님 | 문경 김룡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지도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