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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자인·자용·자우·자적·자경스님 등이 있다.  
 
수계제자로는 자인·자용·자우·자적·자경스님 등이 있다.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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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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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64~66.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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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84.

2022년 6월 3일 (금) 17:30 판

도성(道成)스님


  • 법 명 : 도성(道成)
  • 속 명 : 김운태(金雲泰)
  • 본 관 : 김해(金海)
  • 출생년도 : 1922. 4. 5
  • 주 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수덕사 견성암

1.. 정의

도성(道成)스님은 평소 은사 일엽스님의 수행정신을 본받아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이다.

2. 생애

1922 경기 양주 출생

    금곡보통학교 졸업 

1949 견성암에서 일엽(一葉)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0 정혜사에서 춘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2004 수덕사에서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승가사, 청룡사, 내원사, 삼선암 등 선원 안거 성만 
     간월도 간월암 주지 역임 

2004 현재 수덕사 견성암 주석 및 정진

  • 문 중 : 성혜(惺慧)
  • 수계제자 : 자인·자용·자우·자적·자경

3. 활동 및 공헌

출가 도성(道成)스님은 1922년 4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율성리에서 아버지 김종화와 어머니 창녕 조씨 조관암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이름은 김운태이다. 스님은 견성암에서 개화기의 여류시인으로 이름난 김일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 후 힘든 일을 많이 해서 몸은 괴로웠지만 출가한 것에 대한 후회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일이 힘들수록 신심이 났다. 출가 다음해인 1950년 정혜사에서 춘성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70년 예산 수덕사에서 일타 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삶과 수행정진

수덕사 서편 산중턱에 있는 견성암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원래는 정혜사 동쪽에 초가집으로 지어져 있었다. 1930년 만공 큰스님의 뜻에 따 라 도흡스님이 창건한 이래 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법당을 현대식 2층 석조 건물로 이전 건립하고, 서선당(西禪堂), 동선당(東禪堂) 등의 요사채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 은사이신 일엽스님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중 울력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엽스님은 평소 신장님께 공심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원을 하셨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도성수좌를 만나고부터 마음이 흐뭇하다. 하시며 대중 울력을 부탁하고 기뻐하셨다. 일엽스님은 늘 꼬챙이를 가지고 계시다가 졸음이 오면 뾰족한 꼬챙이 끝으로 스스로를 찔러 잠을 쫓곤 하셨다. 스님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꼬챙이로 스스로를 찌르는 것을 보면 눈물도 나오고 발심도 더 일어나곤 하였다. 이렇듯 스님은 은사스님의 철저한 수행 정진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신심을 다졌다.

은사 일엽스님 시봉

스님은 은사스님의 말씀이라면 조금도 어김이 없이 실천하였다. 6·25전쟁 당시 예산에 있는 교각을 폭파하는 포성이 들리면, 일을 하다가도 뛰어 들어와 은사스님의 곁을 지킬 만큼 지극정성으로 20년 동안 일엽스님을 시봉하였다. 도성스님은 환희대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다가 입적하시기 3개월 전에 다시 견성암으로 모셔와 변함없는 마음으로 정성껏 시봉을 하였다. 일엽스님은 1971년 정월 초이틀 새벽 4시에 입적하셨다. 늘 은사스님 옆을 지켰던 도성스님은 은사스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방 선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견성암을 벗어나지도 않았었다. 은사스님이 입적하신 뒤에야 승가사를 비롯하여 청룡사와 통도사 등 제방을 두루 다니며 정진을 하였다. 해인사 삼선암에서 정진할 당시 부재중인 입승스님을 대신해 아픈 몸으로 입승을 살기도 하였고, 벽초 노스님과 덕산스님, 춘성 큰스님의 시자를 살기도 하였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스님 이 옷을 지어드리면 큰스님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도성스님은 1970년 간월도 간월암 주지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수덕사 견성암에 주석하고 있다.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간월암은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외딴섬에 위치하고 있다. 간월도는 1980년대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물이 된 섬이다. 천수만 한가운데 떠 있던 바위섬 간월도는 어쩌다 드물게 굴양식 배만 드나들던 외딴섬이었으나 지금은 관광지로 변모했다.

수계제자로는 자인·자용·자우·자적·자경스님 등이 있다.

4.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64~66.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