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약수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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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5일 (화) 04:56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서울 약수사(藥水寺)
- 주소 : 서울 관악구 신림동 318
서울의 관악산에 위치한 약수사(藥水寺)는 약수암으로도 불리며 비구니 도량이다. 약수사는 조선 초인 1421년(세종 3)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김(金) 처사가 초가삼간을 짓고 수행한 것이 절의 시초였다고 되어있다. 18세기 말 정조의 명에 의해 전국사찰의 현황을 조사한 『범우고(梵宇攷)』에도 관악산의 사찰로 관악사(冠岳寺), 관음사(觀音寺)는 나오지만 약수사는 보이지 않는다. 작은 암자였던 약수사가 사세를 키우게 된 것은 1880년(고종 17) 명성황후가 법당을 건립하면서부터이다. 1923년에 화재가 나서 법당을 중건하였고 1934년에는 칠성각이 지어졌으며 1960년대와 1990년대에도 중창 불사가 있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수사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세종대왕 3년(1421년) 무명대사가 창건하여,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었던 것을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김처사(金處士)라는 사람이 초가삼간을 짓고 수도하던 것이 절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후 1880년(고종 17)에 명성황후가 법당을 건립하면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성왕후가 이곳에 법당을 건립하였던 연유는 아마도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속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기도처로 삼은 듯하다. 이는 1880년 법당 건립 후 8년 후인 1888년(고종 25)에 약수암에서 멀지 않은 관악산 연주암에 일만오천냥을 시주하여 극락전과 용화전, 그리고 괘불을 조성하였던 데서도 그러한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1923년 무렵 화재로 초가집이 완전히 타고 법당은 반쯤 남게 되자 주지 최영원(崔永源)스님이 중건했고, 1934년 칠성각을 중건했다. 1969년에는 혜초(慧草)스님이 대웅전 석가모니 후불탱과 법당을 보수하여 그 맥을 이어갔다. 이어 1970년대 초에 주지 [[묘희스님(妙喜, 1937生, 비구니)|이묘희(李妙喜)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잠시 승가대 소속의 비구니 사찰로서 운영되었다. 1995년 광옥(光玉)스님에 의해 설법전 중창 불사를 다시 시작해서 1998년에 회향(回向), 다시 조계종 직할 사찰이 되었으며, 당시 칠성탱을 비롯해 독성탱이 조성되었다.
현재의 도량은 1995년 시작된 중창불사의 노력으로 1998년 대웅전을 비롯한 삼성각, 그리고 무량수전이 보수ㆍ중창되어, 신림동 일대의 신심 깊은 불자들의 기도도량으로서 또는 시민선방으로서 기틀을 마련하였다. 2005년 주지로 부임한 범운(梵雲) 주지스님의 포교활동으로 기도,수행도량으로서의 면모와 휴일 관악산을 찾는 불자들에게도 편안한 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관련문헌] 『太古寺寺法』 '在京畿道始興郡東面(今康城府上道町)冠岳山 大本寺奉恩寺末寺' 『奉恩寺本末志』 '其初也 有金處士者 建茅屋三間而修道 朝鮮高宗十七年(庚辰)明成皇建法堂 一九二三年頃 失火 草葺全燒 法堂半焚 住持催永源 重建 一九三四年(甲戌)重建七星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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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스님
사진 자료
- 지도 : 약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