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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명감』에 수록된 스님 중 여러 스님이 당 시대의 '보산(普山)'에게 사미니계를 수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산(普山)'이라는 이름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ref>출처 :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p.117(명안(明岸)), 260(성관(性觀)), 309(수진(守珍)), 318(승우(承祐)).</ref> </br>
 
『한국비구니명감』에 수록된 스님 중 여러 스님이 당 시대의 '보산(普山)'에게 사미니계를 수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산(普山)'이라는 이름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ref>출처 :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p.117(명안(明岸)), 260(성관(性觀)), 309(수진(守珍)), 318(승우(承祐)).</ref> </br>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예산읍내의 한 보살이 오대산 상원사의 보산스님을 향천사로 피신 시켰고 이로 인해 보산스님으로 예산 상천사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게 되었다. </br>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예산읍내의 한 보살이 오대산 상원사의 보산스님을 향천사로 피신 시켰고 이로 인해 보산스님으로 예산 상천사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게 되었다. </br>
향천사는 신라 효소왕 7년(698)에 백금을 하사받아 동관음전, 서노전, 동선당, 서선당, 향적전, 향설루, 서운암, 관음암, 부도암, 타라암 등 400여 칸의 전각과 암자가 금오산에 들어서 호서 제일의 명찰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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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천사는 신라 효소왕 7년(698)에 백금을 하사받아 동관음전, 서노전, 동선당, 서선당, 향적전, 향설루, 서운암, 관음암, 부도암(현재는 서래암), 타라암(陀羅庵)<ref>창건당시 본래 이름은 탈해암(脫解庵)이었으며, 현재는 탈해사(脫解寺)</ref> 등 400여 칸의 전각과 암자가 금오산에 들어서 호서 제일의 명찰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br>
 
한국전쟁 이후 보산스님이 10여 년간 향천사에 주석하면서  향천사를  중건하였고 그 뒤 1971년에 극락전, 1982년에 서선당과 단월당을 지었고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의 향천사가 되었다. </br>
 
한국전쟁 이후 보산스님이 10여 년간 향천사에 주석하면서  향천사를  중건하였고 그 뒤 1971년에 극락전, 1982년에 서선당과 단월당을 지었고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의 향천사가 되었다. </br>
 
'내(박경훈)가 대한불교신문(지금 불교신문의 전신)의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보산(寶山)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설봉 스님이 현토한 염송을 출판하기로 하였는데, 설봉 스님의 염송<ref>『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慧諶)스님이 역대 선사들의 공안(公案) 및 그에 대한 후인들의 염(拈)·송(頌)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을 후배인 몽여(夢如)가 증보한 불교 공안집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문염송')</ref>강의를 받은 인연으로 그 일을 맡게 되었다. </br>
 
'내(박경훈)가 대한불교신문(지금 불교신문의 전신)의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보산(寶山)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설봉 스님이 현토한 염송을 출판하기로 하였는데, 설봉 스님의 염송<ref>『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慧諶)스님이 역대 선사들의 공안(公案) 및 그에 대한 후인들의 염(拈)·송(頌)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을 후배인 몽여(夢如)가 증보한 불교 공안집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문염송')</ref>강의를 받은 인연으로 그 일을 맡게 되었다. </br>

2024년 6월 5일 (수) 08:58 판

  • 인물명 : 보산(寶山, 普山)스님

보산(寶山)스님은 평창 월정사와 예산 향천사와, 말년에 월정사 산내암자인 상원사에서 주석하셨던 스님으로 한암(漢巖)스님의 수계제자이다.
『한국비구니명감』에 수록된 스님 중 여러 스님이 당 시대의 '보산(普山)'에게 사미니계를 수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산(普山)'이라는 이름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1]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예산읍내의 한 보살이 오대산 상원사의 보산스님을 향천사로 피신 시켰고 이로 인해 보산스님으로 예산 상천사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게 되었다.
향천사는 신라 효소왕 7년(698)에 백금을 하사받아 동관음전, 서노전, 동선당, 서선당, 향적전, 향설루, 서운암, 관음암, 부도암(현재는 서래암), 타라암(陀羅庵)[2] 등 400여 칸의 전각과 암자가 금오산에 들어서 호서 제일의 명찰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한국전쟁 이후 보산스님이 10여 년간 향천사에 주석하면서 향천사를 중건하였고 그 뒤 1971년에 극락전, 1982년에 서선당과 단월당을 지었고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의 향천사가 되었다.
'내(박경훈)가 대한불교신문(지금 불교신문의 전신)의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보산(寶山)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설봉 스님이 현토한 염송을 출판하기로 하였는데, 설봉 스님의 염송[3]강의를 받은 인연으로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판(組版)을 하는 사이에 설봉 노스님이 입적(入寂)하셨다. 노스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원고정리를 하면서 의심이 나는 부분은 노스님에게 직접 물어서 원고정리를 할 수 있었으나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는 물을 곳이 없게 되어 교정을 보는 일이 막막하였다. 그래서 보산스님과 상의하여 제방(諸方)의 선지식(善知識)에게 묻기로 하였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학식과 인품이 돋보인다.
향천사 부도전에는 4기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보산대선사지탑(寶山大禪師之塔)으로 되어 있는 보산스님의 부도이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선재길의 중간에는 연화탑이 있다. 이 연화탑은 1965년7월10일, 고려대 불교학생회 구도자 10명이 갑작스런 폭우로 희생을 당하였다. 당시 상원사 보산스님의 다비식 후 월정사로 돌아오는 도중 참사로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이 탑은 그들의 숭고한 구도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해 1주기인 1966년 건립되었다. 탑의 비문은 고려대학교 김영두 교수가 짓고, 글씨는 탄허스님이 쓰신 것을 탑으로 옮겼다.

[참고자료]
- 길은골 아낙의 일상 향천사와 메타세콰이어길과 메밀꽃
- 밀라의 맛있는 이야기 예산 여행 눈 내린 겨울여행 향천사 백송공원 예산시장 선봉국수 사과당
- 고궁사랑 고즈넉한 산사 향천사
- 돌구름 [100대 명산] 불교의 성지 오대산 비로봉~상왕봉, 그리고 월정사 천년숲 선재길

- 주간불교 계곡물에 휩쓸려간 청춘 그곳엔 '홍련'이 피어나고...

  1. 출처 :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p.117(명안(明岸)), 260(성관(性觀)), 309(수진(守珍)), 318(승우(承祐)).
  2. 창건당시 본래 이름은 탈해암(脫解庵)이었으며, 현재는 탈해사(脫解寺)
  3.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慧諶)스님이 역대 선사들의 공안(公案) 및 그에 대한 후인들의 염(拈)·송(頌)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을 후배인 몽여(夢如)가 증보한 불교 공안집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문염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