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용덕왕자, 태허 선종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
* 이름 : 궁예(용덕왕자, 태허 선종스님)
 
+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다. </br>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庶子)였다.
+
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다. </br>
 
+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br>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br>
 
+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여 한 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세력을 떨치며,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했지만 후반에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다가 호족들,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했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
* 출처<br/>
 
+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6%81%EC%98%88 궁예]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 참고자료<br/>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789 궁예]  </br>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여 한 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세력을 떨치며,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했지만
+
- 경북일보,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8816&sc_serial_code=SRN359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016년.</br>
 
+
- 강원도민일보,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57107 (新궁예평전 - 2) 역사는ㆍㆍㆍ ′복수′를 위한 반란을 거부했다]  2001년. </br>
후반에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다가
+
- 유투브, [https://www.youtube.com/watch?v=r-XH5emmIKA KBS 역사스페셜 –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2020년.
 
 
호족들,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하고 만다.
 
 
 
 
 
♦출처<br/>
 
 
 
위키백과,  궁예  https://ko.wikipedia.org/wiki/%EA%B6%81%EC%98%88
 
 
 
 
 
♦참고자료<b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예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789
 
 
 
경북일보,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016년.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8816&sc_serial_code=SRN359
 
 
 
강원도민일보,  [新궁예평전 - 2] 역사는ㆍㆍㆍ ′복수′를 위한 반란을 거부했다  2001년.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57107
 
 
 
유튜브, KBS 역사스페셜 –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2020년.  https://www.youtube.com/watch?v=r-XH5emmIKA
 

2024년 3월 3일 (일) 07:52 판

  • 이름 : 궁예(용덕왕자, 태허 선종스님)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다.
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여 한 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세력을 떨치며,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했지만 후반에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다가 호족들,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했다.

  • 출처

- 위키백과, 궁예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예
- 경북일보,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016년.
- 강원도민일보, (新궁예평전 - 2) 역사는ㆍㆍㆍ ′복수′를 위한 반란을 거부했다 2001년.
- 유투브, KBS 역사스페셜 – 선각대사비의 증언, 궁예는 폭군인가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