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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잔글 (탄허스님의 청룡사 중창 사적비기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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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999년(1972) 임자 4월 초파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은 기록하다.
 
불기 2999년(1972) 임자 4월 초파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은 기록하다.
  
*당시 청룡사 주지 윤호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1972년에 글을 받았으나 미치 비를 건립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이에 현 주지 진홍스님이 불기 2564년(2020) 겨울에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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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룡사 주지 윤호 스님이 탄허 스님으로부터 1972년에 글을 받았으나 미처 비를 건립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이에 현 주지 진홍 스님이 불기 2564년(2020) 겨울에 비를 세웠다.
  
 
번역문 출처: 문명대(2010), 『청룡사-청룡사의 역사와 문화』, (사)한국미술사연구소 pp 128~130
 
번역문 출처: 문명대(2010), 『청룡사-청룡사의 역사와 문화』, (사)한국미술사연구소 pp 128~130

2023년 10월 21일 (토) 11:16 판

  • 사찰명 : 승인동(서울) 청룡사(靑龍寺)
  • 주소 :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

청룡사

청룡사

[청룡사 소개 1}

[청룡사]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청룡사(靑龍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현재 숭인동)에 위치한 절로, 고려 태조 5년(불기 1466년, 서기 922년, 단기 3255년) 도선국사의 유언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져서 ‘청룡사’라 하였다.고려 태조 17년(불기 1478년, 서기 934년) 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 비구니스님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스님들만이 주석(住錫)하고 있다.

그 예로 고려 말기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였으며, 태조 이성계의 제2왕비 강씨 소생이며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도 이곳에서 아버지 태조의 지시를 받아 스님이 되어 정진(精進)하였다고 전해진다.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곳에서 법호를 허경(虛鏡)이라고 하고, 17세에서 82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65년간을 일념으로 정진하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그 후 세상을 떠난 지 178년이 되는 숙종 24년에 비로소 정순왕후(定順王后)로 추복(追復)되고, 또 251년이 되는 영조 47년(불기 2315년, 서기 1771년) 영조대왕은 어명을 내려, 청룡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문과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이라는 비각 현판의 어필(御筆)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정순왕후가 매일 오르던 청룡사 앞 높은 산봉을 동망봉(東望峯)이라는 표석(標石)을 세웠다. 청룡사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1호)이 있으며, 이 보물 외에도 1868년(고종 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가 있으며, 1898년(광무 2년)에 제작된 감로도(甘露圖), 1902년에 제작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숭인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청룡사는 대부분의 전각 배치는 조선 중기 사찰의 전형적인 구성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의 배치이다. 산지중정형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후면에 중심 불전을, 좌우에 승려들이 기거하거나 대중을 받는 요사(寮舍)를, 전면에 사찰로 진입하는 입구가 되면서 법회 등을 여는 우화루(雨花樓)를 배치하는 형식이다. 청룡사는 우화루 우측에 다포형식의 일주문(一柱門)을 두어 사찰 안으로 진입하도록 했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곳에 우화루를 두고, 좌우에 심검당과 명부전을 배치하여 조선 중기 산지사찰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대웅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산신을 모신 산령각을 둔 것은 다른 사찰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 내용출처: 본 청룡사 소개 자료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132)의 "청룡사" 내용 중 일부 오류를 수정하여 현 청룡사 주지 진홍 스님이 2023년 10월 16일에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 제공한 자료입니다.

{청룡사 소개 2}

[청룡사 일주문]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171
[정업원구기(비석)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hsykms.tistory.com/1212

청룡사는 예로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가 기도처로 삼기도 하였으며, 특히 상근(祥根) 노스님을 통해 민 중전(민비)과 후궁에 대한 일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당시 광화당 항아님이 잉태를 하여 법륜사 뒷채에 몰래 숨어 지냈는데, 나한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꿈에 초립동을 만났다고 한다. 기도 덕분인지 하루는 궁에서 가마를 보내 항아님을 데려 오게 하였다. 항아님은 민비의 해(害)를 입을까봐 두려웠지만 나한님의 가피로 결국 왕자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청룡사는 922년(고려 태조 5년)에 도선(道詵)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어져서 청룡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스님의 수행 도량이었다. 1036년(고려 정종 2년)에 만선(萬善)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고려 의종 12년)에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다. 이때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時) 창건 이후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1]을 은사로 출가 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고려 충렬왕 25년)에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스님이 중창하였고, 그 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05년(태종 5년)에 무학(無學)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또 1512년(중종 7년)과 1624년(인조 2년)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년)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定順)왕후가 머물렀다고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라는 글을 내려서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이 잠시 ‘정업원(淨業院)’으로 바뀌었다. 1813년(순조 1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스님과 수인(守仁)스님이 다시 중창하였고, 1923년(순조 23년)에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년)에 정기(正基)스님과 창수(昌洙)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祥根)스님이 중창하였다. 1954년에서 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스님이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이룩하였고, 1972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고려말의 명신(名臣)인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청룡사에 거주하였고,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기도 하였다. [2]


세조에 의해서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단종은 유배를 갈 때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 송씨와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고, 왕비는 스님이 되어 영월 방향의 동쪽 언덕에 올라서 단종의 무사 귀환과 넋을 달랬다고 한다. 그 장소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한다. 동망봉은 청룡사 동쪽 앞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현재 숭인공원(일명 동망산공원)이 있다. 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이후까지 채석장으로 쓰여 산의 반쪽이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과 이별을 한 후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成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송씨는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세조 3년(1457년) 10월 4일 헤어진 지 4개월 만에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이 후부터 송씨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영조 47년(1711년),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인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 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 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동망봉 정상 주변까지 주택이 밀집하여 바위산 봉우리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데, 정순왕후가 단종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곳에는 동망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산신각은 언제 누가 세웠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5세기경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심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산제(山祭)를 지내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이 산신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46-49

탄허스님의 청룡사 중창 사적비기 번역문

[청룡사 중창 사적비기] 삼각산 한 줄기 맥락이 십여리 떨어져 내려오다가 우람하게 일어선 곳이 곧 서울의 외청룡이다. 삼각산 중턱 기슭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그곳이 청룡사이다. 산자락이 두루 감싸 안고서 나름대로 하나의 형국을 이루고 있으니, 서울에서 가장 으뜸가는 곳이라 하겠다.

이 절의 개창은 신라 경명왕 6년(992)에 있었으며, 고려 태조가 도선국사의 유언으로 서울 청룡 기슭에 절을 세우고, 혜원(慧圓) 비구니를 주지로 임명하여 조석으로 종을 울려 삼국통일을 축원하게 하였다. 이는 “쇠는 나무를 이긴다.”라는 원리를 취한 것이며, 또한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가장 으뜸가는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상전벽해의 세월과 풍운무상의 변태로써 정종 2년(947)에 만선(萬善)비구니가 퇴락한 사원을 중창하였고, 의종 12년(1158) 회정(懷正) 선사가 국태민안을 위해서 어명을 받들어 중창하였고, 충렬왕 25년(1299)에 지환(知幻)비구니가 몽고의 병란으로 인한 것을 중창하였다.

이조에 들어서는 태조가 즉위하자 고려 말 공민왕의 혜바(惠妃)가 나라를 잃고서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또한 태조 즉위 7년에 세자 책봉에 불평을 가져 왕자의 난이 크게 일어나자 계비 강씨(康氏)가 낳은 경순(慶順)공주는 부왕의 지시에 따라서 이 사원에 들어와 삭발하였고, 태종 5년(1405)에 무학대사의 주청에 의해 어명으로 중창하였고, 세조 2년(1457)에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송씨는 후궁 2인 시봉 3인과 함께 이 절에서 삭발한 채 백년의 한을 품고 일생을 보냈으며, 중종 7년(1512)에는 연산군의 폐사와 훼불을 법공(法空)비구니가 중창하였다.

인조 2년(1624)에는 예순(禮順)비구니가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고 또 다시 이어 중창을 하였으며, 영조 47년(1771)에 이르러서는 영조가 단종과 정순왕후를 위하여 옛 사원터에 새롭게 종창하도록 명하였고, 또한 왕비가 일생 거처했던 곳은 일반 사원의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이에 청룡사를 정업원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옛날 궁중의 비빈과 궁녀들이 출입하였던 내불당의 명칭을 취한 것이다. 또한 정업원이라는 비문을 쓰고, 옛 터전에 “앞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는 뜻의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峰後巖, 於千萬年) 이라는 현판 액자를 하사하였다. 이는 모두 어필로 기록하여 비석과 누각을 세운 것인데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국가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순조 13년(1813)에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어 그 이듬해에 묘담(妙湛), 수인(守仁) 두 비구니가 협력하여 중창하였고, 23년(1823)에는 순조왕비에게 때마침 생각지 않은 병환이 있어 그의 생부(生父)인 김조순(金祖淳)이 정업원을 찾아가 기도하자 병환이 곧 회복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김조순이 주청하여 다시 어명으로 정업원을 청룡사로 환원하여 부르게 되었다.

고종 광무 6년(1902) 정기(正基), 창수(昌洙) 두 비구니가 함께 발심하여 창수의 회갑 기념으로 이를 중수하였고, 일제치하 무오년(1918)에는 상근(祥根) 비구니가 사재를 내어 요사채 1동을 창건하였고, 임신년 회갑을 맞이하여 전 사원의 건물을 하나같이 새롭게 중수하였다. 을유 해방 이후 경자년(1960)에는 현 주지 윤호(輪浩) 비구니가 옛 터전을 확장하여 시왕전·심검당·우화루·극락전 등을 하나같이 새롭게 중창하였다. 창건시의 절터는 모두 299평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근 비구니가 주지를 할 때 대지 180평을 매입하여 현재는 절터 299평에 대지 453평, 임야 12평에 이르고 있다.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일을 일으켜 세우면 자식이 이를 전승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사원을 처음 개창한 이후로 고려, 조선 두 조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창과 중수를 거듭한 것은 모두 11회이며, 몇 년이 안 되는 사이에 단청과 새로운 누각과 법당이 위엄스럽게 높고 빼어난 것은 하늘의 힘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주석한 스님들이 이에 선정으로써 뼈를 삼고, 경전을 보는 것으로써 살을 삼고, 죽과 밥으로써 가죽을 삼고, 행실과 지혜가 구족한 것으로써 안목과 수족을 삼는다면 한 사람의 안에 의젓한 법왕의 몸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법왕의 몸이란 텅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하고 밝아서 일만 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도 변하지 않으며 고금이 다하도록 하나인 즉, 어찌 가을 털끝을 크다 하지 않을 것이며, 태산을 작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은 마치 오늘날의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며, 후대의 사람이 후대를 보는 것 또한 후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도선국사의 개창과 윤호 주지의 중창은 같은 일일까, 다른 일일까? 만일 같다고 한다면 소뿔을 있다고 할 수 없고, 다르다고 말한다면 토끼의 뿔도 없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필경 어떠한 것인가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으면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 사원을 찾는 이들이 항상 자신의 몸이란 한낱 물거품과 같고 사람의 운명이란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등불과 같이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또한 법성은 비어있으며 지혜의 태양은 길이 밝음을 항상 생각하여, 이와 같이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고, 이와 같이 깨우쳐 들어간다면 중대한 네 가지 은혜를 일시에 모두 보답할 뿐 아니라, 또한 오늘날 외호의 공덕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불기 2999년(1972) 임자 4월 초파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은 기록하다.

  • 당시 청룡사 주지 윤호 스님이 탄허 스님으로부터 1972년에 글을 받았으나 미처 비를 건립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이에 현 주지 진홍 스님이 불기 2564년(2020) 겨울에 이 비를 세웠다.

번역문 출처: 문명대(2010), 『청룡사-청룡사의 역사와 문화』, (사)한국미술사연구소 pp 128~130

사진자료



  • 2023년 10월 16일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 청룡사 주지 진홍스님은 '새절 승방'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함
  • 2023년 10월 16일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 청룡사 주지 진홍스님은 이 문장을 "혜비가 청룡사에서 출가하였고, 조선태조 딸 경순공주가 출가하였다."로 보아야 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