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문서를 비움)
(태그: 비우기)
 
1번째 줄: 1번째 줄:
* ''' 법호·법명 : 퇴옹성철(退翁性徹 : 1912~1993) '''- 해인총림 초대·제3·4·5대 방장, 제7·8대 종정
 
* ''' 생애·업적 '''
 
성철 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지리산 골짜기의 깊은 산골 마을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스님은 젊은 시절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으면서 동서고금의 심오한 철학, 사상서를 독파하였지만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한 노스님이 우연히 권해 준 《증도가》를 읽고 마음의 눈이 열리면서 앞날에 대한 밝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 길로 스님은 대원사로 들어가 속인의 신분으로 밤낮으로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선, 동정일여(同靜一如)의 경지에 몰입했다. 이윽고 스님은 1936년 25세 때 해인사에 들어가 퇴설당에서 참선하다가 출가를 결심, 그 해 3월 하동산(河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했다. 그 후 용성 스님의 시봉을 드는 등 범어사 원효암, 통 도사 백련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사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하다 1940년 29세 때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중 오도송을 읊었다. </br>
 
</br>
 
<poem>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青山依舊白雲中
 
</poem>
 
</br>
 
금당선원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 스님은 8년 동안 그 유명한 장좌불와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스님은 당신의 깨달은 경지를 점검하기 위해 운수 행각하면서 송광사 삼일암, 수덕사, 정혜사, 서산 간월도의 만공 스님 토굴, 법주사 복천암, 선산 도리사, 문경 대승사, 대승사 묘적암, 파계사 성전(聖殿), 통도사 내원암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하다가 1947년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 아래 봉암사 결사를 이끌었다. 이 결사로 선종의 본지 종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런 즉 전국에서 젊은 납자들이 모여들어 청담(靑潭)·우봉(愚峰)·보문(門)·자운(慈雲)·향곡(香谷)·월산(月山)·종수(宗秀)·도우(道雨)·보경(寶鏡)·법전(法傳)·성수(性壽)·혜암(慧菴) 등 20여 명의 눈푸른 납자가 참여하게 된다. 성철 스님은 잠시라도 딴전을 피우는 스님이 발각이라도 되면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잡아 끌고가 봉암사 계곡에 머리를 쳐박아 빠뜨렸다고 한다. </br>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결사가 와해되면서 스님은 다시 여러 선원으로 행각하면서 안거에 들어갔다. 부산 월래의 묘관음사, 경남 고성의 문수암, 은봉암에서 안거하였으며, 경남 안정사의 앞 골짜기에 천제굴(闡提窟)을 지어 참선 정진하였다. 이 때부터 스님은 그곳으로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3천배를 시키기 시작 했다. 다시 마산 성주사, 경남 남해의 백련암에 안거하다가 1955년 44세 동안거 때 파계사 성전에 들어가 철조망을 치고 장좌불와하며 10년 동안 일절 바깥출입을 삼가고 정진했다. 이를 8년 장좌불와에 이은 또 하나 스님의 신화적 사건인 ‘십 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이라 한다. </br>
 
다시 스님은 부산 다대포, 서울 도선사, 문경 김룡사, 해인사 백련암에서 안거를 하다가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면서 사부대중들에게 100일 동안 법문을 베푸니, 그 것이 바로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이다. 스님은 해인총림 방장으로 지내며 해인사를 명실상부한 총림으로 가꾸면서 서릿발 같은 선풍을 드높였다. </br>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을 수락 하면서 내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취임 법어는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br>
 
</br>
 
<poem>
 
圓覺이 普照하니
 
寂과 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時會大衆은 알겠는가……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
 
</poem>
 
</br>
 
종정이 되어서도 스님은 산중을 떠나지 않았고 자신을 친견하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3천배를 시켰으며 법어를 내려 칠흑 같은 무명의 세계에 한 줄기 밝은 빛을 비추었다. 다음은 1982년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 법어이다. </br>
 
</br>
 
<poem>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 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 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스님은 1991년 제8대 종정에 재추대되어 열반에 들 때까지 해인사에서 두문불출한 채 조금이라도 한눈을 파는 수행자들에게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고 호통을 치면서 공부를 독려했다. 이렇게 철저한 산승이기를 고집한 스님은 1993년 11월 4일 퇴설당에서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적멸에 들었다. 법랍 59년, 세수 82세였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誑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poem>
 
</br>
 
스님의 저서로는 성철 스님 법어집 11권이 있다. 《백일법문》 상하, 《선문정로평석》 《돈오입도요문론강설》 《신심명·증도가 강설》 《영원한 자유》 《자기를 바로 봅시다》 《돈황본 육조단경》 《선문정로》 《본지풍광》 《한국불교의 법맥》 이 그것인데, 이 중에서 《선문정로》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한계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입각한 간화선(看話禪)의 사상적 기원과 실천론을 천명한 탁월한 논서이다. 그리고 돈오돈수론의 입장에서 한국선의 사상적 연원과 법맥을 천명한 것이 《한국불교의 법맥》이다. 이 밖에도 스님은 선수행에 꼭 필요한 선어록을 골라내어 우리말로 옮기게 하니 그것이 ‘선림고경총서’ 37권이다. </br>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117~121
 
 
[[분류 : 비구스님]]
 

2024년 3월 17일 (일) 11:13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