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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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0일 (토) 13:03 판



정의

생애

연도 내용
1918 경남 울산 출생
1936 [운문사 청신암]]에서 수인(守仁)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8 덕숭산 정혜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0~1984 정혜사, 견성암, 간월암, 윤필암, 동학사, 해인사, 통도사, 대성암 등 40안거 성만
1942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5 범어사 대성암 입승
1984 대성암에서 입적(세수 67세, 법랍 49세)

기타사항

문중 보운(普雲)문중
수계제자 명희(明熙) · 신원(信源) · 휴철(休徹)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전(慧田) 창법(昌法)스님은 1918년 음력 2월 24일 경남 울산군 상북면 등억리에서 아버지 김성윤(金成潤)과 어머니 정봉순(鄭封順) 사이의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묘숙 이다. 스님의 속가는 고향을 떠나 호거산 아래 오진동 마을로 이사를 하였으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는 불운을 겪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덕한 인품 덕분에 어렵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홀로 된 아버지를 위해 어린 나이에도 손수 옷을 지어드리는 등 봉양에 정성을 다했고, 어린 동생을 잘 보살펴 이웃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던 중 스님은 1936년 19세에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 청신암의 수인(守仁)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38년 사미니계를 수계하고, 1942년 3월 15일 해인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구족 계를 수지하였다.

철저한 수행

구족계를 수지하기 전인 1940년부터 수덕사 견성암 등 각지의 선방에서 수선안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역시 1940년 은사스님께서 부산 수영의 금련산 옛터에 서운암을 창건하고 그 이듬 해 주석처를 옮기기까지 맏상좌로서 효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뒤 정혜사, 수덕사 견성암, 대성암, 동학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제방선원에서 불철주야 정진하였으며, 토굴에 살면서도 결제를 하지 않은 적이 한 철도 없었다. 해제 철이 되면 어김없이 만행을 떠나 회향의 삶을 몸소 실천하였다. 근세 한국불교사에서 경허선사와 선불교 중흥의 유업을 이어받아 그 전통을 뿌리내린 인물로 역사는 만공월면(滿空月面)을 기록 에 남기고 있다. 또한 이부중(二部衆)의 한 축으로서 만공선사와 비견되는 비구니승의 한 분으로 근세 비구니 선풍을 정립한 인물로는 만성(萬性)스님이 있다.

서로의 스승이 되어 준 도반들: 만성스님, 광호스님, 혜춘스님, 영오스님, 성우스님

창법스님은 근세 비구니사에서 철두철미하게 용맹정진의 구도자로 그 이름을 남긴 만성스님 과 가장 오랫동안 수행정진의 인연을 맺은 분이다. 만성스님과 함께 8·15광복을 맞았으며 6. 25전쟁 당시에는 전란의 와중에서도 풀뿌리로 육신의 명을 이으며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렇듯 평생을 선객으로 화두참구에 몰두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 삶' 을 갈구했던 창법스님에게 세수로 20여년을 앞섰던 만성스님은 은사 같은 경책의 도반이었다. 부산 보덕사 광호스님, 해인사 보현암 혜춘스님, 부산 구포 보광사 영오스님, 마포 석불사 성우 스님 등이 당시 서로 수행의 정도를 경책해주며 납자로서의 위의(威儀)를 채찍질해주던 도반이었다. 이와 같이 정진하는 도중 몸이 불편해도 개의치 않고 게으름 없이 모두 40안거를 성만하였다. 스님은 범어사 대성암에서 만성선사를 모시고 정진하다 1975년 5월 9일 만성스님이 입적하신 후 대성암 선원에서 입승을 살며 항상 정진함에 게으름이 있어서는 아니 되며 사대가 성할진대 남에게 수고로움을 끼쳐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으로 후학들을 정진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비군 큰스님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다

부산 구포 보광사에서 10년 화엄산림을 개설할 당시인 1966년, 당대의 고승 통도사 경봉 큰스님과 구미 금강사 철우 큰스님이 교대로 법좌에 올라 화엄경 법문을 설하였다. 마침 그때 창법스님이 산림법문을 듣고자 법회도량에 나타났다. 이를 본 큰스님께서 설법 도중에 이르시기를, ‘저기 도인이 온다. 저기 도인이 온다!' 라고 감탄하셨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화는 그 당시 비구니 팔경계 법을 엄격히 지켜온 한국불교 풍토에 비추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비구 고승이 비구니를 일러 '도인' 이라고 칭했던 사실은 스님의 위풍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전강선사로부터 '혜전(慧田)' 이라는 당호와 함께 법게를 수지한 것도 스님의 법기를 짐작할 수 있는 반증이라 하겠다.

[전강큰스님께서 내려준 친필법호]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p391
[대성암 전경] 출처: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p392

대중을 제접하고 교화를 펼치다

스님은 이 시대의 진정한 선객이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대중과 멀리 있지 않았다. 젊은 납자들에게 참선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한편 스스로는 울력을 몸소 행하였으며, 납의衲衣를 스스로 만들어 입을 정도로 바느질 솜씨가 특출하였다. 스님이 가는 곳마다 대중이 몰려들었는데, 그만큼 대중을 인도하고 분위기를 압도하는 풍미를 자아냈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지내야 했던 어려운 시절에 사중에 공양미가 없을지라도 대중이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도록 사찰 운영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대중의 잘못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엄격히 지적하는 추상같은 매서움 이면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정도로 상대의 마음을 거울 보듯 읽어 지혜와 자비심으로 대중을 이끌어주었다.

입적

창법스님은 갑자년인 1984년 동안거 해제를 사흘 앞둔 음력 1월 12일 밤 11시 15분, 범어사 대성암 입승실에서 40여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연히 세연을 거두었다. 스님의 세수 67세요, 법랍 48세였다.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성문 권속들 꿈에 미리 떠난다는 것을 말로, 또는 서신으로 다 알려서 권속들은 입적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스님은 입적한 후에도 행여 제자가 정진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릴까봐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을 제자에게 뚜렷한 음성으로 여러 차례 들려주었다고 한다.

문중의식보다 일불제자(一佛弟子)로서의 위계를 중시하시다

스님은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한마디로 삼세(三世)를 아우른 선객이었다. 안으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그렇게 갈고 닦은 수순자비심을 수많은 납자는 물론 뭇 대중에게 회향했던 진정한 수행자였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딱히 불법가족이라고 칭할 만한 상좌를 많이 두지 않았다. 수행의 정도를 가늠해주었던 도반들이 있었고, 입승을 보던 만년에는 자신의 죽비(竹扉)를 스승으로 삼았던 많은 납자들이 세상을 밝히고 있음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만큼 스님은 문중의식보다 일불제자(一佛弟子)로서의 위계질서를 중요시했다. 일례로, 스님의 셋째 상좌와 손상좌가 첫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상좌에게 이르길 “네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사숙이 될지라도 조카가 몇 년 먼저 출가했으니 항상 선배로 존대하고 아만(我慢)을 높여서는 안 된 다.”며 엄히 경계했다.

스님의 상좌들

스님은 일생을 통해 받아들인 상좌가 셋이다. 맏상좌 명희(明熙)스님은 대전 보현정사에서 은사의 대중교화 원력을 구현하고 있다. 둘째 상좌 신원(信源)스님은 은사의 선지를 이어받아 범어사 대성암 입승으로 주석하고 있다. 셋째 상좌 휴철(休徹)스님은 은사의 뒤를 따라 적멸위락을 즐기고 있다. 유일한 손상좌 경조스님이 명희스님의 교화 활동을 돕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389~393.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91.
  • 하춘생 저, 『깨달음의 꽃』 2, 여래출판사, 2001, p 215 ‘선객의 위엄은 삼세를 아우르고’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창법(昌法)스님 본항목 창법스님(昌法, 1918~ 1984) 昌法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창법스님(昌法,_191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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