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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주석== |
2022년 7월 28일 (목) 01:29 판
지광(志光)스님 | |
---|---|
법명 | 지광(志光 |
법호 | 법현(法玄) |
속명 | 우귀근(禹貴根) |
출생 | 1934년 11월 24일 |
출가 | 1976년 |
입적 | |
사찰 | 보탑사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지광(志光)스님은 법희(法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삼선승가대학교 설립하였고 현대 건축물의 걸작인 보탑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34 | 경기 화성 출생 |
1976 | 봉선사에서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76 | 운허耘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76 | 충북 법주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6 | 동화사에서 수선 안거 이래 5하안거 성만 |
1977 |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사 임명 |
1978 | 의정부시 호원동 약수선원에서 주림승가강원 개원 |
1978 | 삼선승가대학교 설립, 학장 취임 |
1979 | 삼선포교원 주지 취임 |
1982 |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중앙상임 포교사 임명 |
1991~2000 | 보탑사 창건 |
1993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수료 |
2000 | 삼선포교원 원장, 보탑사 주지 |
2022 | 보탑사 주석 |
기타사항
문중 | 수정(水晶)문중 |
생활신조 | 진실 |
저서 및 작품 | 『만불명호경(萬佛名號經)』 |
상훈 | 서울특별시장 표창(1986, 1988), 조계종 포교대상 특별상(1998) |
취미 | 등산 |
수계제자 | 능현(能現)·자원(慈圓)·길상(吉祥)·원상(圓常) |
활동 및 공헌
출가
법현(法玄) 지광(志光)스님은 1934년 11월 24일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내리 88번지에서 아버지 우기정과 어머니 홍문표 사이의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이며, 이름은 우귀근이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남달랐던 스님은 1976년 2월 14일 대원불교대학을 졸업하였고, 같은 해 3월 1일 경기도 봉선사에서 법희(法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어서 그해 10월 충북 법주사에서 석암(昔岩)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으며, 동화사에서 수선 안거를 시작한 이래 5안거를 성만하는 등 수행 정진을 거듭하였다
삼선승가대학 설립
삼선승가대학은 1978년 9월 7일 의정부 호원동 약수선원에서 지광스님과 강사 묘순스님의 원력을 바탕으로 상주 강원에 갈 수 없는 스님들의 바람이 한뜻이 되어 이루어진 최초의 통학 강원인데, ‘주림승가학원(珠林僧伽學院)’으로 개원되었다.
삼선포교원 창건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미아리고개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수많은 철학원들이 밀집 해 있는 이 고개를 넘다 보면 학교와 주택가 사이로 탑 모양처럼 우뚝 솟은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도심 포교원의 새 장을 열었던 삼선포교원이다. 사찰보다는 오히려 일반 주택을 연상케 하는 포교원 앞뜰을 들어서면 잔디와 잘 가꾸어진 수목,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5층 탑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삼선포교원의 역사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이 본사인 지광스님은 중앙 상임 포교사 출신으로 초기에는 의정부 포교원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런 중에 승려, 특히 비구니들을 위한 현대 교육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학교와 같은 교육 시설을 마련하는 데 묘순스님과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뜻한 바대로 학원을 개원하자 10여 명의 스님들이 입학하였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79년 2월 15일 지광스님은 학원을 서울 시내로 옮기자는 학인들의 의견에 따라 성북구 동소문동에 사글세 35만 원짜리 낡은 2층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강원의 자립과 통학의 편리성을 위하여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으로 이전하면서 학원 이름을 ‘삼선 강원’으로 개명하였다. 마침내 그해 3월 1일 도심 속에 최초로 포교원 간판을 내걸고 주지로 취임하면서 교육과 포교의 장을 연 것이다. 그 당시 30여 명의 신도들은 매주 토요일이면 법담으로 법회를 가졌고 스님은 탁발을 하면서 부족한 임대료를 메워 나갔다.
지광스님은 ‘돈 이야기가 없는 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불전함조차 갖추지 않았다. 또 한 신도들은 ‘만다라회’라는 신도 모임을 결성하고 토요법회를 화요법회로 바꾸는 등 법회의 기틀을 잡아갔다. 한편 『찬불가집』, 『만다라 법요집』 등을 제작하여 판매함으로써 절의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적극적으로 법당을 꾸몄다.
스님과 신도들의 열성으로 삼선포교원은 점차 성장해나갔다. 부처님 말씀을 들으려는 신도들이 법당뿐만 아니라 계단 입구까지 메웠다. 결국에는 나날이 늘어나는 신도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85만 원의 1백평 크기의 인근 건물을 임대하기에 이르렀다.
어린이법회와 가족법회도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거사들을 위한 저녁 법회도 개설하는 등 삼선 포교원 법회에 참여하는 신도들의 신심은 더욱 더 깊어만 갔다. 이처럼 규모가 부쩍부쩍 커지자 1981년부터 신도들은 우리 절 갖기를 바라며 포교원 건립을 발원하였고,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권선문 한 권씩을 모든 회원들이 직접 가지고 다니며 화주를 자임하였다.
또 바자회를 마련하여 정성을 모으는 데 백방으로 애썼다. 한편으로는 택시기사들에게 안전 운행을 기원하며 부처님 말씀이 담긴 열쇠고리나 목탁 염주를 전하며 포교에 힘을 쏟았다.
강원의 학인들도 포교원 및 강원 건립기금을 마련하고자 예술제를 개최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서화전과 바자회 등의 이익금과 십시일반으로 모은 정성으로 1981년 현재의 법당 자리인 성북구 동선동 3가 255번지에 대지 3백 평을 1억 5천만 원에 계약할 수 있었다.
지광스님은 1982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5년 만에 배출하였다. 이때 스님과 학인들의 감격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분황사탑 모양을 본떠 포교원을 짓다
포교원을 건립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합심하여 부지는 마련했지만 설계가 문제였다. 전통적인 사찰 양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현대적 양식으로 건물을 지을 것인가 많은 연구와 더불어 수개월 동안 전국 사찰을 돌아본 후 지광스님은 경주 분황사 터에 남아 있는 분황사탑 모양을 본떠 포교원의 외양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 시기가 법당 건립의 원만한 성취를 위해 스님들과 신도가 하나 되어 신심이 가장 고조되었던 때이자 포교원으로서도 가장 중요하고 힘든 시절이었다고 한다.
1983년 마침내 새 법당 불사 회향식을 마치게 되었다. 그날의 감격과 기쁨은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는 지광스님은 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피와 신도들의 신심 덕택이라고 말한다.
대지 3백 평, 건평 4백 7평의 삼선포교원은 분황사탑의 외양을 지니고, 1층은 기묘순스님과 함께 도실로, 2~3층은 법당으로 꾸며져 있다.
앞뜰에는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5층탑이 있다. 이 진신사리탑 기단에는 1천기의 소탑이 있는데, 신도들이 정 성을 다해 빚은 이 소탑에 직접 사경한 무구정광대다라니를 복장해서 봉안함으로써 그 의의가 더 욱 커졌다.
또한 1천 관음상 조각 탱화를 비롯하여 무형문화재 탱화 기능보유자인 만봉스님이 제작한 신중탱화는 삼선포교원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삼선승가대학의 통학제도
1982년 첫 졸업생들을 배출한 이래 총 150여 명이 졸업한 ‘삼선승가대학’은 선원 수행으로 강원에 갈 시기를 놓친 스님들이나 전통 강원에서 이력 과정을 마치지 못한 스님들, 혹은 시대에 부응하여 동국대학교 등 일반 대학을 다니는 학인 중에 내전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스님들에게 간경의 기회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통학 제도는 4년간에 걸쳐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내외전을 폭넓게 겸비할 수 있고 졸업 후에는 곧장 포교 활동에 참여함은 물론이고 각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 종단에도 기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편 대중 생활 속에서 익혀야 하는 습의에 대해서도 별도로 지도하고 있다. 1년에 두 번 가량 전통 사찰에서 대중 생활을 함께 함으로써 습의를 익히게 할 뿐만 아니라 강원 내에서도 틈틈이 발우 공양을 하는 등 승려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도록 교육하여 불법의 동량을 키우고 있다.
그러기에 이곳은 20여 년간의 연륜을 갖춘 비구니 포교원으로서 학인 교육과 대중 포교의 구심점이라는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다. 지광스님의 중생을 향한 끊임없는 자비와 구도의 정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예로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번지 만뢰산 자락에 우뚝 솟은 보탑사 3층 목탑을 조성한 일을 들 수 있다.
진천 보탑사 창건
원래 연곡리 보탑사는 고려시대 때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 오는 절터에 지은 사찰이다. 중국은 전탑의 나라, 일본은 목탑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데 비해 우리나라 탑의 주류는 석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처음 전래되기 시작한 4세기에서 6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은 누각 형식의 다층 목탑들이 지어졌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경주 황룡사 구층 목탑이었으나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애석하게도 불에 타서 없어졌다.
지금까지 남은 목탑 형식의 건축으로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나 보은 법주사 팔상전을 들 수 있다. 그나마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복원한 것이고, 쌍봉사 대웅전도 1984년에 실화로 소실되어 복원한 것이다.
쌍봉사 대웅전이나 법주사 팔상전은 겉에서 보면 다층이지만 안쪽은 아래에서 위까지 모두 트인 통층 구조이다. 그러나 보탑사 목탑은 1층에서 3층까지 사람이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겉모습은 탑이지만 내부는 각 층 마다 법당인 다층집으로, 황룡사 구층 목탑 이래 1300년 만에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게 지어진 목탑이다. 백팔번뇌의 의미를 담아 높이는 108척(32.7미터)으로 지었으며, 상륜부까지 포함하면 전체 높이는 무려 42.7미터나 된다.
삼국시대 목탑 건축 양식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거쳐 복원시킨 보탑사 목탑은 전통 기법대로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목재를 짜 맞추어 3년에 걸쳐 지어졌다. 목탑에 사용된 목재만 8톤 트럭 150대 분량이 들어갔다. 공사에 참여한 대목은 앞으로 천 년을 장담하며 정성을 다해 지었다 하니 보탑사 목탑이야말로 현대 건축물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자부할 만하다.
보탑사 목탑은 1층부터 3층까지를 모두 활용할 경우 한꺼번에 1,000명이 참가하는 대법회도 열 수 있을 만큼 규모 또한 대단하다.
1층은 사방 불전이다. 심초석에서 솟은 심주 안에 사리를 봉안하고 그 둘레를 999개의 간절한 발원이 담긴 백자 탑으로 장엄했으며 동서남북에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석가여래, 비로자나불과 각각의 협시 보살들을 모셨다. 네 분 부처님께 참배하며 법당 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탑돌이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2층은 티베트 불교에서 따온 대장전으로, 한가운데 자리 잡은 윤장대에 팔만대장경을 안치했으며 그 사방에 『한글 법화경』 17만 자를 화강석에 새긴 석경이 봉안되어 있다.
3층은 미륵 삼존을 모신 미륵전이다. 2층과 3층 사이 암층에는 인도와 중국, 우리나라, 일본을 아울러 목탑의 연원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순금 80냥으로 연꽃 모양 봉안함을 만들어 열여섯 가지 보석류로 된 염주와 〈사적기〉, 『법화경』, 『능엄신주경』 등을 봉안하였다. 이 봉안품들은 불기 3000년(2456년)에 공개될 예정이다. 1993년 2월 24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를 수료한 지광스님은 1986년과 1988년에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공로로 서울특별시장 표창장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대상 특별상을 받기도 하였다.
2004년 삼선승가대학 원장으로 재직한 지광스님의 문하에는 능현(能現)·자원(慈圓)·길상(吉祥)·원상(圓常)스님 등이 있다.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신영훈, 『진천 보탑사와 목탑』, 조선일보사, 1999
성북마을아카이브, 삼선불학승가대학원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1929.do;jsessionid=A329AD982C20E949E3554766B688D8B1
중앙일보, 삼선포교원 서화전 (1982년)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15580#home
중앙일보, <新문화체험>보탑사 3층목탑 (1996년)
https://www.joongang.co.kr/article/3284391#home
동아일보, [충북]보탑사, 독특한 대웅전-종각 모양으로 화제 (1999년)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19990622/7449256/1
법보신문, 사찰과 현대미술의 만남 11 - 삼선포교원 법당 浮彫 (2004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4982
법보신문, 진천 보탑사-목탑 3층 법당에서 가진 1천 3백년만의 첫 법회 (2004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02
불교신문, 진천 보탑사上 보탑사의 오늘 (2007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9920
불교신문, 진천 보탑사 下 현대판 아비지들 (2007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0237
불교신문, 진천 보탑사와 탑(塔) (2009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6139
KBS, 보련산 보탑사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2011년)
파이낸셜뉴스, 봄꽃 그리우면 “진천 보탑사로 오세요” (2013년)
https://www.fnnews.com/news/201305151827454536
현대불교, 20세기에 탄생한 분황사탑형 법당 (2014년)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596
한국일보, 우리시대 명장들이 재현한 황룡사 9층 목탑, 진천 보탑사 통일대탑 (2016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5111717489521
충북일보, '형형색색'…진천 보탑사 꽃과 연등의 유혹 (2016년)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443846
삼선포교원
1979년 임대건물에서 삼선포교원을 연 지광 스님(현 회주)과 묘순 스님(현 주지, 삼선불학승가대학원 원장)은 불사의 원을 세우고 전국 각지를 돌며 지금의 포교원을 어떻게 지을 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경주 분황사를 찾게 되는데, 모전탑을 본 지광 스님이 포교원 건물을 분황사 모전탑 모양으로 짓기로 한 것이다.
지광 스님과 묘순 스님을 중심으로 대중이 불사를 위해 머리를 모았다. 신영훈 문화재위원이 큰 그림을 그렸고, 구체적인 설계는 은하건축의 손정호(67) 건축가가 맡았으며, 시공은 코오롱 건설이 맡았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삼선포교원은 분황사 모전석탑의 외형을 그대로 확대시킨(300평) 건축물로 불교건축사에서 혁신적인 불사로 기록되고 있다. 건물 상부에는 신라 석탑을 올려놓아 전탑과 석탑의 합성건물처럼 보인다. 1층 법당에는 석굴암 현실과 동일한 돔을 만들고 16개의 감실을 벽면에 설치했으며 벽체에는 연화문의 전돌로 내장하여 백제 양식의 요소도 가미했다.
2층 법당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으며, 후불로는 전통적인 탱화 대신 3백 여 관세음보살이 거닐고 있는 관세음보살 부조를 조성했다. 그리고 2층 법당의 특징은 기둥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대중을 수용하고, 법사와 불자들의 사이를 좁힌다는 취지이다. 또한 기존 사찰과 다른 점은 단청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은 층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기존의 사찰과 다른 신선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진천 보탑사
보탑사는 1996년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는 곳에 비구니 승려인 지광·묘순·능현이 창건하였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3층 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다양한 불교문화를 체험하고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며 부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보탑사는 충남교육청에서 지정한 대안교육센터로 청소년의 비행을 예방하고 건전한 청소년을 육성하는 등 불우한 이웃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보탑사의 부지면적은 약 13,000㎡, 연면적은 약 500㎡이다. 탑 높이는 54m[목탑 33.3m, 상륜부 20.8m]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 목탑의 높이는 42.71m로,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총 높이가 52.7m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견줄 만한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다. 강원도산 소나무를 재료로 하여 전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다.
보탑사는 1층 대웅전, 2층 법보전, 3층 미륵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대웅전 199㎡, 법보전 166㎡, 미륵전 136㎡이다. 대웅전에는 사방불[동방 약사우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불,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이 배치되어 있으며, 법보전에는 윤장대(輪藏臺)[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를 두고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했고, 총 9t의 돌판에 한글법화경을 새겨 놓았다. 미륵전에는 화려한 금동 보개 아래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2층과 3층 외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그밖에도 보탑사에는 장수왕릉[장수총]을 재현해 만든 지장전,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 부처가 500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한 영산전, 와불 열반적정상을 모신 적조전을 비롯하여 범종각·법고전·불유각(佛乳閣)·삼소실(三笑室) 등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한 명의 주지[능현]와 10여 명의 승려가 있다. 찾아가는 길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천IC로 빠져 진천읍에서 청주 방면으로 구 17번 도로를 따라 가다 사석리에서 천안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약 2㎞를 간 뒤 우회전하면 나온다.
경내에는 보물 제40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비인 ‘진천 연곡리 석비’가 있다. 거북받침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비머리[螭首]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 불린다.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얼굴 면이 손상되어 말머리같이 되었으며 앞 발톱이 파손되었다.
등 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을 주고 비몸을 받치는 받침 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비머리[螭首]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거북모양 받침돌의 머리 형태와 비의 규모에 비해 얇은 몸,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螭首] 형태 등 고려 초기 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립 연대나 양식에 있어 월광사 원랑선사비와 비견되는 작품이다.
-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사찰
- 삼선포교원 (☎02-929-1870): 서울 성북구 동소문로26마길 40 (동선동3가 255)
- 진천 보탑사 (☎043-533-6865) : 진천 보탑사 충북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진천읍 연곡리 483)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543~549.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5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00,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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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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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志光)스님 | 본항목 | 지광스님(志光,1931~ ) | 志光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지광스님(志光,_1934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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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志光)스님 | 수정(水晶)문중 | ~의 일원이다 |
지광(志光)스님 | 법희(法喜)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지광(志光)스님 | 경기도 봉선사 | ~에서 출가하다 |
지광(志光)스님 | [운허(耘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지광(志光)스님 | 석암(昔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지광(志光)스님 | [[]삼선포교원 ] | ~의 주지를 역임하다 |
지광(志光)스님 | 진천 보탑사 | ~를 창건하다 |
지광(志光)스님 | 보탑사 | ~을 중창하다 |
지광(志光)스님 | 삼선승가대학교 | ~을 설립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