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탁연스님(卓然, 194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80번째 줄: 80번째 줄:
 
2003년 3월 1일 스님은 봉녕사 강사직을 휴직하고 잠시 일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 모친 벽해스님이 주석하시는 심적사로 향하던 길에 총무원으로부터 문화부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스니은 아직도 팔경계가 들먹여지는 종단의 현실에서 문화부장 자리를 맡는 것은 너무 벅찰 것 같아서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친 벽해스님도 딸의 문화부장 임명 소식을 듣고 “그런 거는 받는 게 아니다. 물리면 안 되겠느냐?” 라며 걱정하셨다. ‘드러나지 않고 물처럼 살라.’고 늘 강조해온 벽해스님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탁연스님은 2~3일 동안 심사숙고 끝에 ‘일은 주어질 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수락하였다. 당시만 해도 비구니스님에게 종무행정의 요직을 주는 것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은 총무원 집행부 내의 최고 고위직 가운데 하나로 비구니 승려가 총무원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지난 1962년 통합 종단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님은 2003년 3월 4일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스님께 임명장을 받았다.
 
2003년 3월 1일 스님은 봉녕사 강사직을 휴직하고 잠시 일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 모친 벽해스님이 주석하시는 심적사로 향하던 길에 총무원으로부터 문화부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스니은 아직도 팔경계가 들먹여지는 종단의 현실에서 문화부장 자리를 맡는 것은 너무 벅찰 것 같아서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친 벽해스님도 딸의 문화부장 임명 소식을 듣고 “그런 거는 받는 게 아니다. 물리면 안 되겠느냐?” 라며 걱정하셨다. ‘드러나지 않고 물처럼 살라.’고 늘 강조해온 벽해스님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탁연스님은 2~3일 동안 심사숙고 끝에 ‘일은 주어질 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수락하였다. 당시만 해도 비구니스님에게 종무행정의 요직을 주는 것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은 총무원 집행부 내의 최고 고위직 가운데 하나로 비구니 승려가 총무원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지난 1962년 통합 종단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님은 2003년 3월 4일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스님께 임명장을 받았다.
  
 [[File:501-03.jpg|섬네일|미산스님,광우스님등과함께 진관사에서(2004.6.26) 300px]]
+
 [[File:501-03.jpg|섬네일|미산스님,광우스님등과함께 진관사에서(2004.6.26)|300px]]
  
 
 [[File:501-02.jpg|섬네일|300px]]
 
 [[File:501-02.jpg|섬네일|300px]]

2022년 7월 20일 (수) 16:22 판



정의

탁연스님은 조계종 비구니 최초 총무원 문화부장과 제1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9 경남 고성 출생
1969 해인사 국일암에서 현오(玄悟)스님을 은사로 출가,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6 봉녕사강원 졸업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3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89 일본 산리현(山梨縣) 신연산단기대학(身延山短期大學) 졸업
1991 동경 입정(立正)대학 졸업
1992 묘엄스님으로부터 전강
1996 동경 입정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취득, 봉녕사 강사 취임      
1997~2000 동국대학교 강사
1999~2002 대한불교 조계종 행자교육원 교수사(제16기~제23기)
2003 봉녕사 교무, 학감.
2003~2005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취임. 총무원 문화부장연임
2008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
2010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

 

이후 경력 보완해야 한다

인적사항

문 중 청해
수행지침 아는 대로 행하고 현실에 충실하자
저서 및 작품 『유식(唯識) 30송에 있어서 팔식설(八識說) 연구(硏究)』 외 다수
수계제자 준성·해휴

활동 및 공헌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출가, 안 태어난 셈 치고 멋지게 불법 공부하기로 결심하다 탁연스님은 1949년 12월 5일 경남 고성의 독실한 불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스님이 태어난 지 두 살 되던 해, 어머니 나이 스물에 한국전쟁으로 그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출가를 선택했고, 불심이 깊었던 친할머니는 며느리의 출가를 돕고자 절까지 동행해 며느리가 삭발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이때 탁연스님은 여섯 살짜리 꼬마였다. 며느리가 삭발하던 날, 할머니는 머리 깎는 모습을 보고 손녀가 울먹일까봐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눈치 빠르고 당찬 손녀는 이렇게 야무지게 말했다. “괜찮아! 나도 알아. 그러니까 들어가자.” 하면서 자기도 머리를 깎아달라고 졸라 어머니와 함께 삭발을 했다. 한 달쯤 지나 할머니를 따라 산을 내려왔지만 13년이 지난 후에도 아이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고, 19세 되던 해에 탁연이라는 이름으로 출가하였다. 이때 출가한 어머니 벽해스님은 산청 심적사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하지만 실제로 탁연스님은 여고 졸업을 앞두고 정말 출가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친이 그러했듯이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닥칠 수 있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괴로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삶에 대한 불안과 괴로움이 출가를 하면 없어진다고들 하니까 안 태어난 셈치고 멋지게 공부 한 번 해보자!’ 이렇게 결심하고 출가하러 갔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물으셨다. “왜 스님이 되려고 하노?" 이에 탁연스님이 대답했다. “그저 송아지가 소 따라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성철 큰스님께서 한바탕 크게 웃으며 “꼭 맞는 말이다.”라고 하셨다

묘엄스님과함께.출처:『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37

탁연스님은 1969년 해인사 국일암에서 평생을 참선 수행하고 있는 현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후였다. 대학에 떨어진 탓에 출가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봉녕사 승가대학 졸업, 10여 년간 참선 수행, 일본 리쇼대학 박사학위 취득

  탁연스님은 1976년 봉녕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0년이 넘게 해인사 국일암, 석남사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했다. 출가할 즈음 성철스님께서 백련암에 계실 때였기에 자주 친견을 하였고, 성철스님은 죽을 힘을 다해 좌선을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번은 강원에서 강사스님이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가 크게 꾸중을 듣고 좌선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허리를 다쳐 앉아서 정진을 할 때 무척 고생을 했다. 척추 디스크와 싸우며 뒷방에서〈치문〉 한 권을 다 배웠고, 출가한지 5년 만에 강원에 가서 공부를 지속했다. 스님은 1983년 중앙승가대 졸업 후 1년 반 동안 지장암 주지 소임을 맡았는데 주지를 살면서 주지 소임은 수행력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벅차게만 여겨지는 주지직을 사임하고 더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0년을 머무르며 일본 리쇼(立正) 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그 토록 바랐던 봉녕사 승가대학 강사로 재직하여 8년 동안 학인스님들을 가르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조계종 비구니 최초 총무원 문화부장을 맡다

2003년 3월 1일 스님은 봉녕사 강사직을 휴직하고 잠시 일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와 모친 벽해스님이 주석하시는 심적사로 향하던 길에 총무원으로부터 문화부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스니은 아직도 팔경계가 들먹여지는 종단의 현실에서 문화부장 자리를 맡는 것은 너무 벅찰 것 같아서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친 벽해스님도 딸의 문화부장 임명 소식을 듣고 “그런 거는 받는 게 아니다. 물리면 안 되겠느냐?” 라며 걱정하셨다. ‘드러나지 않고 물처럼 살라.’고 늘 강조해온 벽해스님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탁연스님은 2~3일 동안 심사숙고 끝에 ‘일은 주어질 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수락하였다. 당시만 해도 비구니스님에게 종무행정의 요직을 주는 것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은 총무원 집행부 내의 최고 고위직 가운데 하나로 비구니 승려가 총무원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지난 1962년 통합 종단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님은 2003년 3월 4일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스님께 임명장을 받았다.

 

미산스님,광우스님등과함께 진관사에서(2004.6.26)

 

501-02.jpg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조사단 단장으로 신계사 복원에 기여하다

  비구니스님으로서 최초로 종무 요직을 맡게 된 탁연스님은 불교계 문화유산 보호와 관리를 위해 애쓰는 한편 신계사 복원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 스님은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조사단 단장으로 2003년 11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신계사 대웅전 터와 석탑 주변 조사를 이끌었다. 이 조사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학자들이 공동 참여하였으므로 역사적으로도 매우 뜻 깊은 사업이었다. 한편 신계사는 1998년 3월 14일 체결된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를 바탕으로 남측의 ‘금강산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한국불교종단협의회)와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신계사 복원사업을 진행하하여 2007년 10월 13일 준공식을 거행했다.

총무원 문화부장시절 업무 수행 중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38]   봉녕사: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36-54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35~44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5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계사”
  • 현대불교 2011.8.12. 조계종 최초 비구니 문화부장 탁연 스님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06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탁연(卓然)스님 본항목 탁연(卓然)스님, 1949~ 탁연(卓然)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탁연(卓然)스님,_ 1949生, 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 계
탁연(卓然)스님 국일암-현오(玄悟)스님 ~ 을 은사로 출가하다
탁연(卓然)스님 봉녕사-월하스님 ~ 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하다
탁연(卓然)스님 일본 리쇼대학 ~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 조계종 ~ 행자교육원 교수이다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 조계종 ~ 총무원 문화부장이다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 조계종 ~ 중앙선거관리위원이다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 조계종 ~ 제15대 중앙종회의원이다
탁연(卓然)스님 대한불교 조계종 ~ 문화유산발굴조사단장으로 신계사복원에기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