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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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 |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9 |
==시맨틱 데이터== | ==시맨틱 데이터== |
2022년 7월 5일 (화) 00:15 판
인성(仁成)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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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인성(仁成) |
법호 | |
속명 | 서귀순 |
출생 | 1901. 3. 12 |
출가 | 1944. |
입적 | 1989. |
사찰 | 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
특이사항 |
정의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01 | 전북 정읍 출생 |
1944 |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 |
1947 |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7 |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 |
1989 |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
- 문 중 : 법기(法起)
-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활동 및 공헌
출생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석남사의 숨은 도인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입적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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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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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仁成)스님 | 법기(法起) | ~의 일원이다 |
인성(仁成)스님 | 정자(淨慈)스님 | ~의 제자이다 |
인성(仁成)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인성(仁成)스님 | 석남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