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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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제주도 남군 대정읍 영락리 1879번지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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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제주도 남군 대정읍 영락리 1879번지에서 출생<ref>『한국비구니명감』에는 1931년생으로 되어 있는데, 봉려관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이 제공한 자료는 1930년생으로 되어 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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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제주 천왕사 비룡큰스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다
 
|1952 || 제주 천왕사 비룡큰스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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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제주 관음사에서 비룡스님을 계사로 법희(法稀)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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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제주 관음사에서 [[삼광비룡(三光飛龍)|비룡스님(飛龍)]]을 계사로 법희(法稀)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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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순천 송광사에서 비룡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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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순천 송광사에서 [[삼광비룡(三光飛龍)|비룡스님(飛龍)]]<ref>『한국비구니명감』은 [[구산수련(九山秀蓮)|구산스님(九山)]]으로 되어 있는데,  승적부에 [[삼광비룡(三光飛龍)|비룡스님(飛龍)]]으로 되어 있음을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이 확인했다고 한다.</ref>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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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탐라 월구동산 중대골 절(27평 법당)에 주지로 취임해서, 사명을 관음정사라 개칭하고 본격적인 포교에 나서다.
 
|1972 || 탐라 월구동산 중대골 절(27평 법당)에 주지로 취임해서, 사명을 관음정사라 개칭하고 본격적인 포교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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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포교 우선, 계율엄수, 간화선 수행, 사경 수행  
 
|수행지침||포교 우선, 계율엄수, 간화선 수행, 사경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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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연, 일선, 금선,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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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연(慧蓮), 일선(一善), 금선(錦善), 정선(正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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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경윤(5)→혜원(慧圓, 6)→[[광호스님(光毫, 1915生, 비구니)|광호(光毫, 7)]]→[[법희스님(法稀, 1923生, 비구니)|법희(法稀, 8)]]→[[효명스님(曉明, 1931生, 비구니)|효명(曉明, 9)]]→혜연(慧蓮, 10), 일선(一善, 10), 금선(錦善, 10), 정선(正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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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인은 200평 대지에 27평 법당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 절은 중대골 절로 불리었다. 김금인은 산천단에서 수행 중이던 효명스님을 중대골 절에 모시고자 했지만, 수행정진에 흠뻑 빠져있던 효명스님은 단칼에 제의를 거절하였다. 김금인은 효명스님이 신세를 졌던 박준택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말하고 효명스님을 중대골 절로 모실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한다. 그리하여 박준택이 효명스님을 찾아가 “우리 이모님이 와서 중대골 절에 살라고 했는데 왜 안 가십니까”고 하며 효명스님을 설득했고,  박준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명스님은 중대골 절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원치 않았던 스님은 하루 빨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싶어서 날마다 “내일이면 걸망지고 나가야지”만 되뇌었고, 반면 그래도 부처님 도량을 제대로 만들고 나가자는 생각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금인은 200평 대지에 27평 법당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 절은 중대골 절로 불리었다. 김금인은 산천단에서 수행 중이던 효명스님을 중대골 절에 모시고자 했지만, 수행정진에 흠뻑 빠져있던 효명스님은 단칼에 제의를 거절하였다. 김금인은 효명스님이 신세를 졌던 박준택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말하고 효명스님을 중대골 절로 모실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한다. 그리하여 박준택이 효명스님을 찾아가 “우리 이모님이 와서 중대골 절에 살라고 했는데 왜 안 가십니까”고 하며 효명스님을 설득했고,  박준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명스님은 중대골 절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원치 않았던 스님은 하루 빨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싶어서 날마다 “내일이면 걸망지고 나가야지”만 되뇌었고, 반면 그래도 부처님 도량을 제대로 만들고 나가자는 생각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대웅전이 이교도의 방화로 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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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대웅전이 이교도의 방화로 전소====
 
1972년 관음정사 주지로 취임한 효명스님은 1973년부터 주변 부지를 매입해 사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1975년 종각, 산신각 불사를 마친다. 비용부족으로 인해 종각 단청불사를 하지 못했는데,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관음정사를 지나가다 시멘트로 건립된 종각이 보기 좋지 않다며 단청을 하라 지시하였고, 그러자 공무원이 와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효명스님에게 전달한다. 효명스님은 공무원들이 건립한 종각을 부숴버릴까 염려되어 급히 페인트를 사다 종각에 칠을 했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1972년 관음정사 주지로 취임한 효명스님은 1973년부터 주변 부지를 매입해 사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1975년 종각, 산신각 불사를 마친다. 비용부족으로 인해 종각 단청불사를 하지 못했는데,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관음정사를 지나가다 시멘트로 건립된 종각이 보기 좋지 않다며 단청을 하라 지시하였고, 그러자 공무원이 와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효명스님에게 전달한다. 효명스님은 공무원들이 건립한 종각을 부숴버릴까 염려되어 급히 페인트를 사다 종각에 칠을 했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법당에 비가 새자 대웅전 불사를 결심한 효명스님은 한 세기의 문화재를 남기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장인의 손으로 대웅전 완공을 시도했다. 1981년 7월 18일 순천 송광사 방장 구산큰스님을 모시고 대웅전 상량법회를 봉행했고, 장인의 손끝에서 7년에 걸쳐 목조 36평 대웅전을 완공하기에 이른다. 이 대웅전 내, 외부에 26개의 용상(龍象)을 조각했고, 기둥에 각종 불상과 용상도 조각했는데, 대웅전 내, 외부의 조각과 건축방식은 당시 국내 불교사찰에서 처음 시도되는 양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대웅전은 낙성식을 앞두고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불을 놓아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법당에 비가 새자 대웅전 불사를 결심한 효명스님은 한 세기의 문화재를 남기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장인의 손으로 대웅전 완공을 시도했다. 1981년 7월 18일 순천 송광사 방장 구산큰스님을 모시고 대웅전 상량법회를 봉행했고, 장인의 손끝에서 7년에 걸쳐 목조 36평 대웅전을 완공하기에 이른다. 이 대웅전 내, 외부에 26개의 용상(龍象)을 조각했고, 기둥에 각종 불상과 용상도 조각했는데, 대웅전 내, 외부의 조각과 건축방식은 당시 국내 불교사찰에서 처음 시도되는 양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대웅전은 낙성식을 앞두고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불을 놓아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대웅전을 재건립하여 제주 비구니 도심포교의 중심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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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재건립하여 제주 비구니 도심포교의 중심지가 되다====
 
대웅전 재건립 및 2차 중창불사를 다시 결심한 효명스님은 50평 대웅전 및 요사채 3동, 일주문, 해우소 등을 1년 반에 완공한 후, 미륵대불 조성을 마치고서야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대웅전 재건립 및 2차 중창불사를 다시 결심한 효명스님은 50평 대웅전 및 요사채 3동, 일주문, 해우소 등을 1년 반에 완공한 후, 미륵대불 조성을 마치고서야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3차 중창불사에 앞서 사역을 4,000평으로 확장하였고, 이어서 71평 대웅보전 건립, 천불조성, 요사채 1동, 대중식당 1동, 해우소 1동, 종각, 범종불사까지 일괄적으로 불사를 진행시켜 드디어 3차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기에 이른다.</br>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3차 중창불사에 앞서 사역을 4,000평으로 확장하였고, 이어서 71평 대웅보전 건립, 천불조성, 요사채 1동, 대중식당 1동, 해우소 1동, 종각, 범종불사까지 일괄적으로 불사를 진행시켜 드디어 3차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기에 이른다.</br>
 
효명스님의 3차 중창불사 회향과 함께 현 관음정사는 4,000평 대지에 대웅보전(71평), 천불전(50평), 미륵대불(현무암, 30척), 요사채 4동, 대중식당 1동, 종각, 해우소, 일주문 등을 갖춘 비구니 도심포교의 주요 사찰이 되었다. </br>
 
효명스님의 3차 중창불사 회향과 함께 현 관음정사는 4,000평 대지에 대웅보전(71평), 천불전(50평), 미륵대불(현무암, 30척), 요사채 4동, 대중식당 1동, 종각, 해우소, 일주문 등을 갖춘 비구니 도심포교의 주요 사찰이 되었다. </br>
2013년 대웅보전 낙성식 및 3차 중창불사를 회향하는 날 효명스님은 “오십 여 년 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익혀서 부처님의 정법 법륜을 굴리고자 발원한지 10년, 월구동산 아래 이곳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여법한 도량을 갖춘 관음정사 창건의 원력을 세우고 불사를 펴나가는 가운데 온갖 고초도 겪었지만 신도님들과 함께 기도정진으로 대작불사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대중 여러분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창건주와 주지를 상좌 정선스님에게 승계한 후, 회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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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대웅보전 낙성식 및 3차 중창불사를 회향하는 날 효명스님은 “오십 여 년 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익혀서 부처님의 정법 법륜을 굴리고자 발원한지 10년, 월구동산 아래 이곳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여법한 도량을 갖춘 관음정사 창건의 원력을 세우고 불사를 펴나가는 가운데 온갖 고초도 겪었지만 신도님들과 함께 기도정진으로 대작불사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대중 여러분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창건주와 주지를 상좌 정선스님에게 승계한 후, 회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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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 활동===
 
===포교 활동===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신행단체 ‘관음회’, ‘선친회’, ‘우친회’를 창립해서 체계적으로 불자를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고차를 마련해 매주 일요일마다 제주시를 돌며 어린이를 태워 법회에 참석하게 했고, 중등부 법회, 청년회 법회를 개설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포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더불어 관음정사 ‘자비합창단’을 창단해서 음성포교에 앞장세웠다. 관음정사 자비합창단을 창단하게 된 계기는 본사 관음사에 합창단이 창단되면서 관음정사 신도 1명이 관음사 합창단에 가입한 것을 알게 된 효명스님은 바로 관음정사에 자비합창단을 창단했다. 이렇게 창단된 관음정사 합창단은 창단 이래 매주 월요일이면 관음정사에 모여 합창 연습을 하고 있고, 올해(2024년)로 32주년을 맞이하였다.</br>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신행단체 ‘관음회’, ‘선친회’, ‘우친회’를 창립해서 체계적으로 불자를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고차를 마련해 매주 일요일마다 제주시를 돌며 어린이를 태워 법회에 참석하게 했고, 중등부 법회, 청년회 법회를 개설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포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더불어 관음정사 ‘자비합창단’을 창단해서 음성포교에 앞장세웠다. 관음정사 자비합창단을 창단하게 된 계기는 본사 관음사에 합창단이 창단되면서 관음정사 신도 1명이 관음사 합창단에 가입한 것을 알게 된 효명스님은 바로 관음정사에 자비합창단을 창단했다. 이렇게 창단된 관음정사 합창단은 창단 이래 매주 월요일이면 관음정사에 모여 합창 연습을 하고 있고, 올해(2024년)로 32주년을 맞이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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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법계를 거절하신 95세 효명스님 손에는 염주 아니면 연필이 들려져 있다. 손에서 염주 한 알 한 알이 돌아가거나, 아니면 달력 뒷면 또는 사용한 봉투 여백에 사경을 하신다. 이렇듯 종이를 아끼기 위해 지금도 스님은 사경을 늘 이면지에 한다. 효명스님이 저녁에 취침에 들면 상좌는 염주를 손에서 빼어 놓는다. 그러나 효명스님의 엄지손가락은 마치 염주가 있는 양 움직인다.
 
명사 법계를 거절하신 95세 효명스님 손에는 염주 아니면 연필이 들려져 있다. 손에서 염주 한 알 한 알이 돌아가거나, 아니면 달력 뒷면 또는 사용한 봉투 여백에 사경을 하신다. 이렇듯 종이를 아끼기 위해 지금도 스님은 사경을 늘 이면지에 한다. 효명스님이 저녁에 취침에 들면 상좌는 염주를 손에서 빼어 놓는다. 그러나 효명스님의 엄지손가락은 마치 염주가 있는 양 움직인다.
 
* 작성자: 혜달스님(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 작성자: 혜달스님(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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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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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려관문화연구원, [[광주 흥룡사]] [[혜달스님(慧達, 1963生, 비구니)|혜달스님(慧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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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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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26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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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2006.5.7) 보문종 원로회의 의장 법준스님 입적 https://v.daum.net/v/20060507204614165
  
 
==시맨틱 데이터==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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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두옥(斗玉)문중|두옥문중(斗玉)]] || ~의 일원이다 ||  
 
|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두옥(斗玉)문중|두옥문중(斗玉)]] || ~의 일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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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법희스님(法稀, 1923生, 비구니)|법희스님]]||의 수계제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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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법희스님(法稀, 1923生, 비구니)|법희스님(法稀)]]||의 수계제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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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1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광주 흥룡사]] || ~에서 출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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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비룡스님||~(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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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1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삼광비룡(三光飛龍)|비룡스님(飛龍)]]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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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비룡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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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1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삼광비룡(三光飛龍)|비룡스님(飛龍)]]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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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제주 관음정사]]||~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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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제주 관음정사]]||~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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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제주 관음정사]]|| ~의 불사를 하다 || 3차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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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제주 관음정사]]||~을(를) 중창하다 || 3차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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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제주 관음정사 자비합창단|| ~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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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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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어린이, 중등부, 청년회 법회||~을(를)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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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제주 관음정사]]|| ~을(를) 건립하다|| 제주관음정사자비합창단, 어린이·중등부·청년회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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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을(를) 수상하다|| 국무총리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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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상훈(賞勳)]] ||~을(를) 수상하다|| 국무총리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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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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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스님(曉明, 1931生, 비구니)|효명스님(曉明)]]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제주 천왕사, 제주 산천단, 해인사 약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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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2024년 9월 23일 (월) 20:24 기준 최신판



정의

효명스님은 제주시 연동 관음정사를 3차에 걸쳐 중창해서 지금의 사역을 만드신 주역이며, 관음정사 자비 합창단을 창설해서 도심포교에 진력하여 제주불교발전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0 제주도 남군 대정읍 영락리 1879번지에서 출생[1]
1952 제주 천왕사 비룡큰스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다
1960 제주 관음사에서 비룡스님(飛龍)을 계사로 법희(法稀)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 순천 송광사에서 비룡스님(飛龍)[2]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72 탐라 월구동산 중대골 절(27평 법당)에 주지로 취임해서, 사명을 관음정사라 개칭하고 본격적인 포교에 나서다.
1975 종각, 산신각 및 해우소 건립
1977 신행단체 관음회 창립
1977 삼존불 개금불사 회향
1980 제주 관음정사 1차 중창불사 및 대웅전 건립
1982 신행단체 선친회 창립
1982 대웅전 후불 목조 탱화 조성
1983 제주 관음정사 어린이, 중등부, 청년회 법회 개설
1985 제주 관음정사 총신도회 창립
1987 제주 관음정사 불일회 창립(독립단체)
1987 7년에 걸쳐 완공한 대웅전이 낙성식을 앞두고 이교도에 의해 화재로 전소
1987 신행단체 우친회 창립
1989 제주 관음정사 대웅전 건립 및 2차 중창불사 회향
1992 제주 관음정사 자비 합창단 창단
1994 제주 관음정사 미륵대불 봉안
1999 제주 관음정사 객실 90평 완공
2009 명덕법계 자동 품수
2013 제주 관음정사 대웅보전 건립 및 3차 중창불사 회향
2013 제주 관음정사 회주 취임
2019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취임
문 중 두옥문중(斗玉)
수행지침 포교 우선, 계율엄수, 간화선 수행, 사경 수행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연(慧蓮), 일선(一善), 금선(錦善), 정선(正善)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경윤(5)→혜원(慧圓, 6)→광호(光毫, 7)법희(法稀, 8)효명(曉明, 9)→혜연(慧蓮, 10), 일선(一善, 10), 금선(錦善, 10), 정선(正善, 10)

활동 및 공헌

[국무총리상 수상 후 신도들과 함께]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90년대 초반 제주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에 참가한 관음정사 연등행렬]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1973년 전후 제주 관음정사]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1차 중창불사에서 건립한 대웅전 상량식 관련 신문기사.]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1970년대 관음정사 신도의 자녀가 결혼식에 앞서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식장으로 향하는 모습. 관음정사 신도의 자녀들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부처님과 대중스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식장으로 향하는 문화가 있었다. 지금은 부처님께 꽃공양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제주 관음정사 주지실 앞에서. 좌로부터 효명스님, 비룡큰스님, 서암큰스님]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이교도가 불 태운 대웅전의 단청하기 직전 모습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통도사 동원스님, 동원스님 은사 혜각스님, 비룡스님, 효명스님. 제주 용두암에서 촬영.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7년에 걸쳐 완성한 대웅전(1987년 12월 30일 낙성식 행사를 앞두고 이교도의 방화로 전소됨)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1987년 이교도에 의해 불태워진 자리에 1989년 다시 완공한 대웅전(지금의 천불전)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2013년 완공한 대웅보전(3차 중창불사)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2024년 현재 관음정사 전경. 재가불자 휴식처인 3층 공간, 밭, 주차장 등 1,000여평은 사진에 반영되지 않았음.
사진출처 : 혜달스님 제공

출가

효명스님은 1930년 5월 9일 제주도 남군 대정읍 영락리 1879번지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은 김두우이고 모친은 진성희이며, 3남 3녀 중 5째이다. 20세 되던 해 부처님과 첫 인연을 맺었으며, 7여 년간 제주 천왕사 비룡큰스님 회상에서 대중 외호 및 수행정진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0년 광주 흥룡사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계하였다.

제주 관음정사 3차 중창불사

김금인(대덕화)보살과의 만남

김금인은 200평 대지에 27평 법당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 절은 중대골 절로 불리었다. 김금인은 산천단에서 수행 중이던 효명스님을 중대골 절에 모시고자 했지만, 수행정진에 흠뻑 빠져있던 효명스님은 단칼에 제의를 거절하였다. 김금인은 효명스님이 신세를 졌던 박준택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말하고 효명스님을 중대골 절로 모실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정한다. 그리하여 박준택이 효명스님을 찾아가 “우리 이모님이 와서 중대골 절에 살라고 했는데 왜 안 가십니까”고 하며 효명스님을 설득했고, 박준택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명스님은 중대골 절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원치 않았던 스님은 하루 빨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싶어서 날마다 “내일이면 걸망지고 나가야지”만 되뇌었고, 반면 그래도 부처님 도량을 제대로 만들고 나가자는 생각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대웅전이 이교도의 방화로 전소

1972년 관음정사 주지로 취임한 효명스님은 1973년부터 주변 부지를 매입해 사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1975년 종각, 산신각 불사를 마친다. 비용부족으로 인해 종각 단청불사를 하지 못했는데,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관음정사를 지나가다 시멘트로 건립된 종각이 보기 좋지 않다며 단청을 하라 지시하였고, 그러자 공무원이 와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효명스님에게 전달한다. 효명스님은 공무원들이 건립한 종각을 부숴버릴까 염려되어 급히 페인트를 사다 종각에 칠을 했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법당에 비가 새자 대웅전 불사를 결심한 효명스님은 한 세기의 문화재를 남기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장인의 손으로 대웅전 완공을 시도했다. 1981년 7월 18일 순천 송광사 방장 구산큰스님을 모시고 대웅전 상량법회를 봉행했고, 장인의 손끝에서 7년에 걸쳐 목조 36평 대웅전을 완공하기에 이른다. 이 대웅전 내, 외부에 26개의 용상(龍象)을 조각했고, 기둥에 각종 불상과 용상도 조각했는데, 대웅전 내, 외부의 조각과 건축방식은 당시 국내 불교사찰에서 처음 시도되는 양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대웅전은 낙성식을 앞두고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불을 놓아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대웅전을 재건립하여 제주 비구니 도심포교의 중심지가 되다

대웅전 재건립 및 2차 중창불사를 다시 결심한 효명스님은 50평 대웅전 및 요사채 3동, 일주문, 해우소 등을 1년 반에 완공한 후, 미륵대불 조성을 마치고서야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3차 중창불사에 앞서 사역을 4,000평으로 확장하였고, 이어서 71평 대웅보전 건립, 천불조성, 요사채 1동, 대중식당 1동, 해우소 1동, 종각, 범종불사까지 일괄적으로 불사를 진행시켜 드디어 3차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기에 이른다.
효명스님의 3차 중창불사 회향과 함께 현 관음정사는 4,000평 대지에 대웅보전(71평), 천불전(50평), 미륵대불(현무암, 30척), 요사채 4동, 대중식당 1동, 종각, 해우소, 일주문 등을 갖춘 비구니 도심포교의 주요 사찰이 되었다.
2013년 대웅보전 낙성식 및 3차 중창불사를 회향하는 날 효명스님은 “오십 여 년 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익혀서 부처님의 정법 법륜을 굴리고자 발원한지 10년, 월구동산 아래 이곳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여법한 도량을 갖춘 관음정사 창건의 원력을 세우고 불사를 펴나가는 가운데 온갖 고초도 겪었지만 신도님들과 함께 기도정진으로 대작불사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대중 여러분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창건주와 주지를 상좌 정선스님에게 승계한 후, 회주로 취임한다.

포교 활동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신행단체 ‘관음회’, ‘선친회’, ‘우친회’를 창립해서 체계적으로 불자를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고차를 마련해 매주 일요일마다 제주시를 돌며 어린이를 태워 법회에 참석하게 했고, 중등부 법회, 청년회 법회를 개설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포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더불어 관음정사 ‘자비합창단’을 창단해서 음성포교에 앞장세웠다. 관음정사 자비합창단을 창단하게 된 계기는 본사 관음사에 합창단이 창단되면서 관음정사 신도 1명이 관음사 합창단에 가입한 것을 알게 된 효명스님은 바로 관음정사에 자비합창단을 창단했다. 이렇게 창단된 관음정사 합창단은 창단 이래 매주 월요일이면 관음정사에 모여 합창 연습을 하고 있고, 올해(2024년)로 32주년을 맞이하였다.
한편, 1970년 현 서귀포 약천사의 혜인스님이 구산 스님의 권유로 가입활동만 하던 송광사 불일회는, 1987년 관음정사 주지이던 효명스님에게 인계되면서 ‘제주 관음정사 불일회’가 창립되었다. 제주 관음정사 불일회는 독립단체이면서 송광사 불일회 제주지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제주 관음정사는 효명스님의 도심포교 원력에 기반 해 꾸준히 신도가 증가하였고, 효명스님이 주지일 때 육지의 한 단체가 신도 동원을 요청하자 전화 한 통화로 당일 600명 인원을 동원시켜서 행사를 무사히 마치도록 했다는 일화도 있다. 효명스님의 노력으로 제주 관음정사는 제주도에서 신도가 가장 많은 사찰로 회자되고 있다.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운 봉려관 스님의 업적은 20년 가까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201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자료 및 구술자료 취합에 나선 혜달스님을 지원해 주던 효명스님은 2019년 창립한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스님은 2019년 국제심포지엄을 시작으로 매년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세미나를 적극 지원하고 있고, 다큐 ‘고마워요 봉려관’ 제작지원, 『봉려관,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다』 출간비용 전액을 지원하여 제주 불교역사 바로 세우기에 힘을 다하고 있다.

주요 가르침

효명스님은 관음정사 법회 및 평상시 하는 말씀이 있다. “신심이 있어야 제불보살도 눈길을 준다.”고 하며,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부처님 가르침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데, 우리는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다행이고 복이 많은 것입니다.”고 하면서, “저는 이곳 관음정사에서 모든 신도님들이 참된 나, 불성을 찾고 깨쳐 마음에 굳게 자리 잡기를 눈감는 날까지 기도해 나가고자 한다.”는 말씀을 2024년 95세인 지금도 하고 계신다.

수행

명사 법계를 거절하신 95세 효명스님 손에는 염주 아니면 연필이 들려져 있다. 손에서 염주 한 알 한 알이 돌아가거나, 아니면 달력 뒷면 또는 사용한 봉투 여백에 사경을 하신다. 이렇듯 종이를 아끼기 위해 지금도 스님은 사경을 늘 이면지에 한다. 효명스님이 저녁에 취침에 들면 상좌는 염주를 손에서 빼어 놓는다. 그러나 효명스님의 엄지손가락은 마치 염주가 있는 양 움직인다.

  • 작성자: 혜달스님(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효명(曉明)스님 본항목 효명스님(曉明, 1930~ ) 曉明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효명스님(曉明, _193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효명스님(曉明 두옥문중(斗玉) ~의 일원이다
효명스님(曉明 법희스님(法稀) 의 수계제자이다
효명스님(曉明) 광주 흥룡사 ~에서 출가하다
효명스님(曉明) 비룡스님(飛龍)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효명스님(曉明) 비룡스님(飛龍)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효명스님(曉明 제주 관음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효명스님(曉明 제주 관음정사 ~을(를) 중창하다 3차 중창
효명스님(曉明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장
효명스님(曉明 제주 관음정사 ~을(를) 건립하다 제주관음정사자비합창단, 어린이·중등부·청년회 법회
효명스님(曉明 상훈(賞勳) ~을(를) 수상하다 국무총리 표창
효명스님(曉明)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제주 천왕사, 제주 산천단, 해인사 약수암

지도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한국비구니명감』에는 1931년생으로 되어 있는데, 봉려관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이 제공한 자료는 1930년생으로 되어 있다.
  2. 『한국비구니명감』은 구산스님(九山)으로 되어 있는데, 승적부에 비룡스님(飛龍)으로 되어 있음을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이 확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