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묘담스님(妙湛, 177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생애)
(릴레이션 데이터)
93번째 줄: 93번째 줄:
 
| [[묘담스님(妙湛, 1776生, 비구니)|묘담스님(妙湛)]] || [[서울 청룡사]] || ~을(를) 중창하다 ||
 
| [[묘담스님(妙湛, 1776生, 비구니)|묘담스님(妙湛)]] || [[서울 청룡사]] || ~을(를) 중창하다 ||
 
|}
 
|}
<big>'''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문 한국 비구니 인명사전 데이터 아카이브]'''</big>로 가기
+
 
 +
===지식관계망===
 +
{{SemanticGraph | key=묘담스님(妙湛,_1776生,_비구니)}}
  
 
==지도==
 
==지도==

2024년 9월 15일 (일) 21:33 판



정의

묘담(妙湛)스님은 조선의 비구니로, 삼각산 청룡사 제8 중창주이다.

생애

연도 내용
1776 (영조 51년) 용인시 기흥면 농서리 출생/ 부 밀양 박씨 박재빈, 모 은진 송씨
1778 서울 숭인동 청룡사 묘성(妙惺)스님을 은사로 출가
1813 청룡사 화재
1814 (순조 14년) 청룡사 법당, 요사채 불사
1823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 삼칠일 봉행
1837 (헌종 3년) 세수 62세, 법랍 58세로 입적

활동 및 공헌

영민하고 맑았던 ‘관옥스님’

묘담스님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면 농서리에서 아버지 박재빈과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 넷째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스님이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청룡사 묘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스님의 별명은 ‘관옥스님’이었는데, 영민하고 얼굴이 옥처럼 희고 맑았다. 이 때문에 신도와 사대부들에게 칭송을 얻었다.

폐허가 된 청룡사 중창불사

1813년 청룡사가 화재를 당해 폐허가 되었고, 청룡사에서 함께 수행하던 수인스님과 합심하여 중창불사를 발원하여 시주자와 조정의 관리들을 찾아 불사를 모연하였다. 마침내 1년 후인 1814년(순조 14년) 11월 15일, 법당과 요사채 10여칸을 상량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 상황에서 이뤄낸 큰 성취였다. 또한 1823년 영의정 김조순의 주청으로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를 삼칠일간 봉행하여, 채단 10필과 대동목 20필, 백미 20석을 사사 받았다. 이에 김조순은 1771년 (영조 47년)이후 ‘정업원’이라 불리던 절 이름을 ‘청룡사’로 환원하길 왕에게 청하여 이 해에 사명이 공식 환원되었다.

입적

이후 묘담스님은 청룡사에 주석하였고, 1837년(헌종 3년) 세수 62세, 법랍 58세로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청룡사

[청룡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C%B2%AD%EB%A3%A1%EC%82%AC)

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다. 922년(고려 태조 5)에 도선(道詵) 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사호를 청룡사라 하였다.1036년(정종 2년)에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창건 이후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하여 10차의 중창 역사를 갖고 있다. 1923년 다시 옛이름인 청룡사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대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며 1973년에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창건배경과 역사

청룡사(靑龍寺)는 922년(태조 5) 도선(道詵, 827~898) 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색이다. 고려에 와서는 1036년(정종 2)에 만선(萬善) 스님이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는데,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로 43녀 만에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충렬왕 25)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知幻)스님이 중창하였다. 고려 말에는 공민왕비 혜비(惠妃)가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머물렀으며, 1405년(태종 5) 무학(無學) 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창건 당시 도선 국사를 위하여 창건한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인 것이다. 이어서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 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이곳에 있었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비석과 비각은 현재도 절에 남아 있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수인(守仁) 두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고 1823년(순조 23)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 정기(正基)·창수(昌洙) 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詳根) 스님이 중창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54년~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 스님이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고 대웅전은 다시 1973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는 왕실의 여인과 관계가 많은 곳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려 말의 명신 익재 이제현(李齋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또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이곳으로 와 머무는 등 왕실과의 관계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가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端宗, 1441~1457)은 유배 갈 때 왕비 정순 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이어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된 비극이 서려있기도 하다.

  • 출처 청룡사(서울)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4~45)
  • 『영조실록』, 한국고전DB
  • 『순조실록』, 한국고전DB
  • 청룡사, 『청룡사지』, 197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묘담(妙湛)스님 본항목 묘담스님(妙湛, 1776-1837) 妙湛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묘담스님(妙湛,_177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묘담스님(妙湛) 조선시대 ~의 비구니이다
묘담스님(妙湛) 묘성스님(妙惺) ~의 수계제자이다
묘담스님(妙湛) 서울 청룡사 ~에서 출가하다
묘담스님(妙湛) 서울 청룡사 ~을(를) 중창하다

지식관계망



지도

  • 청룡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7-1



주석


다른 비구니 스님


대한민국 주요 비구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