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覺性)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 '''인물명 : 각성스님(覺性)''' </br>  
 
* '''인물명 : 각성스님(覺性)''' </br>  
[[각성(覺性)스님|각성(覺性)]]은  18세기 후반에 현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청룡사에 주석하던 비구니스님으로 청룡사를 중창한  [[수인스님(守仁, 1779生, 비구니)|수인스님(守仁, 1779~1838)]]의 은사 스님이다. </br>
+
[[각성(覺性)스님|각성스님(覺性)]]은  18세기 후반에 현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청룡사에 주석하던 비구니스님으로 청룡사를 중창한  [[수인스님(守仁, 1779生, 비구니)|수인스님(守仁, 1779~1838)]]의 은사 스님이다. </br>
 
수인스님은 1779년 서울 동소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1784년 5살에 청룡사에서 출가하여 1813년 청룡사가 화재를 당해 폐허가 되자 중창을 발원하고 모연을 하여 1814년(순조 14년) 11월 15일, 1년만에 법당과 요사채 10여칸을 지었다. </br>
 
수인스님은 1779년 서울 동소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1784년 5살에 청룡사에서 출가하여 1813년 청룡사가 화재를 당해 폐허가 되자 중창을 발원하고 모연을 하여 1814년(순조 14년) 11월 15일, 1년만에 법당과 요사채 10여칸을 지었다. </br>
 
또한 1823년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를 삼칠일간 봉행하여 왕후가 쾌차하자 채단 10필과 대동목 20필, 백미 20석을 사사 받았다. 김조순은 여기에서 나아가 1771년(영조 47년)이후 ‘정업원’이라 불리던 절 이름을 ‘청룡사’로 환원해 줄 것을 왕에게 청하여 이 해에 사명이 청룡사로 공식 환원되었다.
 
또한 1823년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를 삼칠일간 봉행하여 왕후가 쾌차하자 채단 10필과 대동목 20필, 백미 20석을 사사 받았다. 김조순은 여기에서 나아가 1771년(영조 47년)이후 ‘정업원’이라 불리던 절 이름을 ‘청룡사’로 환원해 줄 것을 왕에게 청하여 이 해에 사명이 청룡사로 공식 환원되었다.

2024년 9월 12일 (목) 20:57 기준 최신판

  • 인물명 : 각성스님(覺性)

각성스님(覺性)은 18세기 후반에 현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청룡사에 주석하던 비구니스님으로 청룡사를 중창한 수인스님(守仁, 1779~1838)의 은사 스님이다.
수인스님은 1779년 서울 동소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1784년 5살에 청룡사에서 출가하여 1813년 청룡사가 화재를 당해 폐허가 되자 중창을 발원하고 모연을 하여 1814년(순조 14년) 11월 15일, 1년만에 법당과 요사채 10여칸을 지었다.
또한 1823년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의 환후 쾌차 기도를 삼칠일간 봉행하여 왕후가 쾌차하자 채단 10필과 대동목 20필, 백미 20석을 사사 받았다. 김조순은 여기에서 나아가 1771년(영조 47년)이후 ‘정업원’이라 불리던 절 이름을 ‘청룡사’로 환원해 줄 것을 왕에게 청하여 이 해에 사명이 청룡사로 공식 환원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46~47)
  • 『영조실록』, 한국고전DB
  • 『순조실록』, 한국고전DB
  • 『안동김씨 세보』, 1926
  • 청룡사, 『청룡사지』,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