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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대한미술원(大韓美術院)'''
 
* '''명칭 : 대한미술원(大韓美術院)'''
대한미술원(大韓美術院)은 동양화가인 [[동성스님(東城, 1913生, 비구니)|옥봉(玉峰) 동성스님(東城)]]이 동학사 주지를 맡을 의제(毅齋) 허백련(許百鍊) 화백 등과 함께 창립한 미술단체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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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미술원(大韓美術院)은 동양화가인 [[동성스님(東城, 1913生, 비구니)|옥봉(玉峰) 동성스님(東城)]]이 동학사 주지를 맡을 의제(毅齋) 허백련(許百鍊) 화백 등과 함께 창립한 미술단체단체이다. </br>
이 미술원의 설립 목적은 전통예술의 계승과 보존이었다. 대한미술원 창립의 배경에는 해방 후 한국의 전통문화가 경시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사군자와 같은 한국의 전통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부족했던 점이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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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원의 설립 목적은 전통예술의 계승과 보존이었다. 대한미술원 창립의 배경에는 해방 후 한국의 전통문화가 경시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사군자와 같은 한국의 전통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부족했던 점이 동기가 되었다. </br>
허백련은 전통 남종화 정신과 기법을 철저히 계승하고자 했으며,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키는 등 호남 지역의 서화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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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은 전통 남종화 정신과 기법을 철저히 계승하고자 했으며,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키는 등 호남 지역의 서화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br>
독립운동가인 동성스님은 해방 후 우리 것을 쉽게 비하하고 버리는 세태에 오히려 외국인들이 동양화 특히 사군자를 '한국다운 예술문화'로 칭송하며 '왜 연구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때는 마음 깊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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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 동성스님은 해방 후 우리 것을 쉽게 비하하고 버리는 세태에 오히려 외국인들이 동양화 특히 사군자를 '한국다운 예술문화'로 칭송하며 '왜 연구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때는 마음 깊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br>
“나같이 미련한 사람이나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가지요. 독립운동 하느라 제자도 못 키우신 일주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이면서 내 뒤를 이을 제자가 아직 없네요. 시절이 좋아졌고 사군자가 생활인의 교양처럼 너나없이 배우는 그림이 되었지만 정통 서화법(書畵法)을 익히지 않아서 그림 아닌 그림을 그리는 꼴이 되었고, 점점 왜곡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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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이 미련한 사람이나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가지요. 독립운동 하느라 제자도 못 키우신 일주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이면서 내 뒤를 이을 제자가 아직 없네요. 시절이 좋아졌고 사군자가 생활인의 교양처럼 너나없이 배우는 그림이 되었지만 정통 서화법(書畵法)을 익히지 않아서 그림 아닌 그림을 그리는 꼴이 되었고, 점점 왜곡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어요.” </br>
동성스님의 독립운동을 위한 헌신과 대한미술원의 설립도 독립운동 못지 않게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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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스님의 독립운동을 위한 헌신과 함께 대한미술원의 설립도 독립운동 못지 않게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br> </br>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286~290.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286~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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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기관/단체]]

2024년 7월 31일 (수) 20:54 기준 최신판

  • 명칭 : 대한미술원(大韓美術院)

대한미술원(大韓美術院)은 동양화가인 옥봉(玉峰) 동성스님(東城)이 동학사 주지를 맡을 의제(毅齋) 허백련(許百鍊) 화백 등과 함께 창립한 미술단체단체이다.
이 미술원의 설립 목적은 전통예술의 계승과 보존이었다. 대한미술원 창립의 배경에는 해방 후 한국의 전통문화가 경시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사군자와 같은 한국의 전통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부족했던 점이 동기가 되었다.
허백련은 전통 남종화 정신과 기법을 철저히 계승하고자 했으며,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키는 등 호남 지역의 서화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독립운동가인 동성스님은 해방 후 우리 것을 쉽게 비하하고 버리는 세태에 오히려 외국인들이 동양화 특히 사군자를 '한국다운 예술문화'로 칭송하며 '왜 연구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때는 마음 깊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나같이 미련한 사람이나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가지요. 독립운동 하느라 제자도 못 키우신 일주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이면서 내 뒤를 이을 제자가 아직 없네요. 시절이 좋아졌고 사군자가 생활인의 교양처럼 너나없이 배우는 그림이 되었지만 정통 서화법(書畵法)을 익히지 않아서 그림 아닌 그림을 그리는 꼴이 되었고, 점점 왜곡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어요.”
동성스님의 독립운동을 위한 헌신과 함께 대한미술원의 설립도 독립운동 못지 않게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286~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