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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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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후삼국말 천마산(天摩山) 암굴(巖巖) 속에서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던 "바우"란 현자(賢者)께서 사시던 곳이며 후일 고려(高麗)를 세운 태조왕건(太祖王)께서 그의 명성을 듣고 친히 찾아가 경국지사를 논하던 중 출중한 인품에 감동하여 한 번의 만남으로 즉석에서 장군으로 봉한 후 남정(南征)에 동참시켜 고려(高麗)를 세우자 고려 개국공신 문하시중(高麗開國功臣 門下侍中)에 보하였으며 또 "맹(孟)"이란 이름까지 하사(下賜)하였다. 이 분이 바로 풍양조씨(豐壤趙氏)의 시조 이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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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견성암(見聖菴)은 후삼국말 천마산(天摩山) 암굴(巖巖) 속에서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던 "바우"란 현자(賢者)께서 살던 곳이며 후일 고려(高麗)를 세운 태조왕건(太祖王)께서 그의 명성을 듣고 친히 찾아가 경국지사를 논하던 중 출중한 인품에 감동하여 한 번의 만남으로 즉석에서 장군으로 봉한 후 남정(南征)에 동참시켜 고려(高麗)를 세우자 고려 개국공신 문하시중(高麗開國功臣 門下侍中)에 보하였으며 또 "맹(孟)"이란 이름까지 하사(下賜)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풍양조씨(豐壤趙氏)의 시조이다. </br>
 
그 후 고려 중엽 (AD 1,200년경)에 후손들이 시조를 기리기 위해 암굴 앞에 절을 세웠으나 그 년대는 정확치 않으며 대략 800여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절(寺刹)의 명칭을 견성암(見聖庵)이라 명명한 유래에 대하여는 "조시중(趙侍中)께서 수도하시여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친견하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조시중을 찾았음" 에 기인하였다는 설이 있다. </br>
 
그 후 고려 중엽 (AD 1,200년경)에 후손들이 시조를 기리기 위해 암굴 앞에 절을 세웠으나 그 년대는 정확치 않으며 대략 800여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절(寺刹)의 명칭을 견성암(見聖庵)이라 명명한 유래에 대하여는 "조시중(趙侍中)께서 수도하시여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친견하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조시중을 찾았음" 에 기인하였다는 설이 있다. </br>
 
또 이 절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井)이 있으며 이 샘물은 조시중께서 홀로 마셨다 하여 독정(獨井)이라 부르며, 그래서 세인들은 이 절을 "독정사"라고도 하였는데 절 아래 마을은 오늘날까지도 독정이란 동명을 쓰고 있다.
 
또 이 절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井)이 있으며 이 샘물은 조시중께서 홀로 마셨다 하여 독정(獨井)이라 부르며, 그래서 세인들은 이 절을 "독정사"라고도 하였는데 절 아래 마을은 오늘날까지도 독정이란 동명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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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견성암 내에 설치된 견성암 연혁 안내판 </br>
 
※ 출처 : 견성암 내에 설치된 견성암 연혁 안내판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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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 : [https://map.kakao.com/?q=남양주시_진건읍_송능리_3 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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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사찰]]

2024년 5월 9일 (목) 21:06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남양주 견성암(見聖菴)
  • 주소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


남양주 견성암(見聖菴)은 후삼국말 천마산(天摩山) 암굴(巖巖) 속에서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던 "바우"란 현자(賢者)께서 살던 곳이며 후일 고려(高麗)를 세운 태조왕건(太祖王)께서 그의 명성을 듣고 친히 찾아가 경국지사를 논하던 중 출중한 인품에 감동하여 한 번의 만남으로 즉석에서 장군으로 봉한 후 남정(南征)에 동참시켜 고려(高麗)를 세우자 고려 개국공신 문하시중(高麗開國功臣 門下侍中)에 보하였으며 또 "맹(孟)"이란 이름까지 하사(下賜)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풍양조씨(豐壤趙氏)의 시조이다.
그 후 고려 중엽 (AD 1,200년경)에 후손들이 시조를 기리기 위해 암굴 앞에 절을 세웠으나 그 년대는 정확치 않으며 대략 800여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절(寺刹)의 명칭을 견성암(見聖庵)이라 명명한 유래에 대하여는 "조시중(趙侍中)께서 수도하시여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친견하였기 때문"이라는 설과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조시중을 찾았음" 에 기인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이 절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井)이 있으며 이 샘물은 조시중께서 홀로 마셨다 하여 독정(獨井)이라 부르며, 그래서 세인들은 이 절을 "독정사"라고도 하였는데 절 아래 마을은 오늘날까지도 독정이란 동명을 쓰고 있다. 견성암(見聖庵)은 국가로부터 800년 역사를 지닌 고찰(古刹)로 그 문화재적(文化財的)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전통사찰로 지정(指定)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경기 북부지역의 35개 전통사찰 중 유일(唯一)하게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찰이기도 하다.
※ 출처 : 견성암 내에 설치된 견성암 연혁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