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혜명스님(慧明, 191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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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indicator name=인명사전>비구니 인명사전</indicator> {{인물정보 |표제 = 혜명(慧明)스님 |사진 = 300px |법명 = 혜명(慧明)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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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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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0.31 || 전북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에서 출생  
 
|1917.10.31 || 전북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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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정혜사에서 명주(明珠)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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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전주 정혜사에서 명주(明珠)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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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정읍 내장사에서 운곡雲谷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0 || 정읍 내장사에서 운곡雲谷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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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전주 정혜사에서 20하안거 성만
 
|1946 || 전주 정혜사에서 20하안거 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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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81 ||지장암 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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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전주 정혜사에서 묵담(黙潭)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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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지장암 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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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56세 때 전주 정혜사 주지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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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6 || [http://www.baekyangsa.com/intro.php 백양사]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천진암] 주지(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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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정혜사 범종 주조, 범종각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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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사회학과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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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보문유치원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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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6 || 지장암 감원 <ref> 감원(監院): 절을 감독하고 승려들의 모든 일을 맡아 보살피는 직책 </ref> 소임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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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부처님 진신사리5층 석탑회향과 선원부속 건물 개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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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정진선원에서 2년 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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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요사채 76평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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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문경 윤필암 하안거 성만. 월정사 포교원 연꽃유치원 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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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1.2 || 정혜사에서 입적(세수 70세, 법납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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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12. ||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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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봉래(蓬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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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계민(戒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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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탐(貪)·진(眞)·치(癡) 벗겨내니 원래 완벽하게 갖추어진 자성광명(自性光明) 절로 드러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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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任性逍遙 自在安閑 行雲流水 安貧樂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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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신조||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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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신조|| 자비행(慈悲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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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전남 장성경찰서 감사장 수상(1989)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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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지향(智向)・지섭(智涉)・지엽(智燁)・지관(智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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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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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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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지훈(地熏)·지용(地湧)·지륜(地輪)·지광(地光)·지현(地賢)·해만(海曼)·지욱(地煜)·지우(地雨)·지중(地中)·지도(地導)·지경(地經)·지범(地凡)·지성(地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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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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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동기===
은공(恩空) 정안(淨岸)스님은 1951년 강릉 연곡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진경희이다.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던 1970년, 스님도 콜레라에 걸려 심하게 앓던 중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내 갈 길이 따로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트여 이듬해인 1971년 2월 1일 오대산 지장암(강원 평창)에서 출가하였다.
+
스님은 1923년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전주 정혜사에 있는 명주스님의 아버지 정원명 거사에게 세배를 드리러 갔다가 명주스님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게 되었다. 명주스님의 어머니께서 ‘딸이 둘이니 한 명은 출가를 시키면 좋겠다고 하자 스님의 아버지가 두 딸에게 ‘누가 출가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서로 출가하겠다고 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동생인 헤명스님의 주장이 더 강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파일:431-01.jpg|섬네일]]
 
  
===수학과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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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하심下心으로 정진하며 자비심과 보살행===
출가 후 스님은 [http://www.unmunsa.or.kr/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http://xn--q20bm8bgy1a0fc8wd.kr/ 오대산 지장암]으로 돌아와 재무 소임을 맡았다. 그러던 중 전라남도 장성 [http://www.baekyangsa.com/ 백양사]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천진암]에서 사찰을 지켜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스님은 중국 유학과 천일지장기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운문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교의 많은 대중스님들이 발우를 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스님에게 누군가가 스님 자리라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법석을 여는 꿈을 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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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성품이 자비롭고 말이 없었던 스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평등하고 대하고, 평생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비구니 율사였다. 스님의 염불 독송소리는 지극히 간절하고 낭랑하여 이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환희심을 내어 불법에 귀의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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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근천하(一勤天下) 무난사(無難)事 ’라는 말씀을 새기고 ‘수행자가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살았다.
  
스님은 꿈이 천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감하고 천진암을 제2의 고향으로 삼기로 작정, 천진암으로 내려가 불사에 혼신을 다하였다. 천진암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당시에는 낡은 법당과 허물어져가는 요사채만으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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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로 있으면서도 대중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몸소 실천하여 새벽 예불 후 법당 및 각단 청소는 물론 비를 들고 온 도량을 청소하고 풀을 뽑곤 했다. 심지어는 입적하는 그날까지 대중 정랑(凈廊) 청소도 직접 하셨다. 수행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스님은 평생을 울력으로 행을 하면서도 일념으로 염불을 놓지 않았다. 손톱이 갈라지고 살이 터져 열손가락을 사계절 내내 반창고를 감고 다닐 정도로 본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량정비와 타인을 위한 삶에  한 평생을 헌신하였다.
  
스님은 천일지장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보수하고 부족한 생활용수를 보충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이용했던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었으며, 천진암 입구의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후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를 보수하여 천진암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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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님은 보시행을 철저히 하여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몰래 학비도 대주고 어머니 없는 아이들에겐 옷도 사주고 손수 빨래도 해주기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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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십년 이상을 주지로 계셨으나 한결같은 하심으로 정진하여 모든 이의 고개를 숙이게 했으며, 어려운 사람과 고통 받은 사람을 부처님 모시듯 대함으로써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고 가장 낮은 자보다 더 낮게 임하는 중도(中道)를 실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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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말없는 인욕으로 보살행을 보여 주셨다.
  
또한 호남에 비구니 선원이 거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워 파도처럼 밀려오던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6년 10월 15일 삼천일 지장기도 불사 회향을 하면서 호남에 첫 비구니 선원인 천진암 백암선원(白岩禪院)을 개원하고 그 해 첫 동안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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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가의 조카 2명이 출가해 비구 혜광스님과 비구니 지순스님 이 되었고 한 집안에서 3명이나 출가해 부처님의 혜명(慧明)을 잇고 일가친척이 거의 부처님 법을 받들고 있다.
  
===은사와 상좌의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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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1995년 가을, 갑작스럽게 존경하던 은사스님이 입적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꽃다운 나이의 제자를 떠나보냈다. 이에 정안스님은 생사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스님은 3년만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 수호와 포교 의무를 일단 접어둔 채 천진암은 제자에게 일임하고, 지장암은 권속에게 부탁한 후 오로지 참선 수행에만 몰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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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스님은 1986년 12월 17일(음력 11월 2일) 세수 70세, 법랍 58세로 세연을 마쳤다. 다비식에서 사리가 수습되었으며, 혜일(慧日)스님이 완산 기슭 정혜사 부도전탑에 모셨다.
  
===오대산 지장암 면모 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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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정혜사==
[[파일:431-03.jpg|섬네일|지장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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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정혜사는 보문종 계열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불교대학이다. 즉, 계룡산에 동학사가 있듯이 이에 버금가는 곳으로서, 전주에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대학이자, 기도하는 사찰이 정혜사인 것이다. 때문에 전주 시내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혜사는 산사의 절집 느낌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만큼 사찰의 분위기가 조용하고 고즈넉한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따로 위치한 산사와 달리 불법수행에 열심인 비구니스님들의 청정한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흔치 않은 곳이다.
스님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와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처가 다 배움터요, 행하는 모든 일이 공부 아님이 없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이에 스님은 지장암으로 돌아왔고 5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커다란 화두와 직면하게 되었다.  
 
  
나날의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화두, 곧 육신을 죽일 것인가, 설자리를 버릴 것인가, 마음을 죽일 것인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공동체 삶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에피스드를 수행의 재료로 삼아 어려움을 통해 겸손을, 가난한 살림살이를 통해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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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혜사에 가면 비구니사찰의 이미지처럼 연꽃을 비롯한 각종 꽃이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아울러 10여 동 이상의 전각이 배치되어 꽤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또한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라는 명성에 조금이라도 부응할 수 있도록 지장암 내 기린선원을 정비하여 많은 대중이 살 수 있게끔 조건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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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혜사는 1899년 창건되어 110년 된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혜사는 원래 이곳의 본사 원장스님인 명주스님의 외조부께서 칠성각을 짓고 득남발원을 위하여 시작된 사찰이기 때문이다. 그후 정명주 노스님께서 주지를 역임하면서 정혜사 불사를 하였고 백혜명스님과 정례일스님이 거듭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 13동의 전각을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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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정혜사는 1899년에 최향관선생이 득남발원을 위하여 완산 아래 이곳에 조그만 칠성각을 건축하게 한 후 불상을 모시고 그 옆에 십여간 되는 초가집을 사서 사찰을 만들고 절이름을 정혜사라고 하고 기도불사를 진행하였다. 그때의 본사 소재지는 동명이 안행동(雁行洞)이기 때문에 본사의 이름을 ‘안행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발음이 와전되어 ‘안양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정혜사라고 이름 지은 정(定)은 선리(禪理)를 연구하고 혜(慧)는 교리를 널리 알려 정혜쌍수를 실천하자는 취지라고 하겠다. 1921년 정명주 스님이 불교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보광전 15칸, 용화전 1칸을 건축하였으며 명부전, 나한전, 완산선원, 사대천왕문과 아울러 요사채를 건축하여 수행과 포교에 전력을 다했으며, 강원을 설치하여 도제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후 백혜명스님과 현 주지인 정혜일스님이 중건, 중창불사를 거듭하여 지금의 정혜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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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1899년 본사 주지 정명주(鄭明珠) 스님의 부친인 고견(古見) 정원명(鄭圓明) 거사와 모친 최정명 보살과 장성우 보살이 함께 보리심을 발하여 완산 밑 서쪽에 한칸짜리 법당을 건축한 후 불상을 모시고 그 옆에 삼간초가를 사서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정혜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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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479910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 pp. 459~463.
+
* 한국비구니연구소 ,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년,p273~27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31.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44.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
 
* 월정사 지장암 감원 정안스님 입적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475
 
* 佛心도 반해버린 산 병풍과 계곡 물소리, 백암산 천진암 [자비화 카페], https://cafe.daum.net/squirrel4u/Bpz4/4288?svc=cafeapi
 
  
 
==시맨틱 데이터==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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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명(慧明)스님]] || 본항목 ||  || 혜명스님(慧明, 1917~1086)|| 慧明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명스님(慧明, 1917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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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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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8일 (화) 16:22 판



정의

혜명(慧明)스님은 전주 정혜사 강원을 졸업하고 정혜사에서 20안거 성만했으며 정혜사 주지로 부임하여 15년간 범종주조와 범종각, 5층 석탑 불사 및 요사채 건립 등 도량을 정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917.10.31 전북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에서 출생
1929 전주 정혜사에서 명주(明珠)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0 정읍 내장사에서 운곡雲谷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2 25세 때 영호당(暎湖堂) 승호(昇鎬)율사律師(박한영스님)계사로 보살계 수지
1945 전주 정혜사(7년간 사미니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 수료)강원 졸업
1946 전주 정혜사에서 20하안거 성만
1964 전주 정혜사에서 묵담(黙潭)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2 56세 때 전주 정혜사 주지 취임
1977 정혜사 범종 주조, 범종각 건립
1983 보문유치원 건립
1984 부처님 진신사리5층 석탑회향과 선원부속 건물 개축
1985 요사채 76평 건립
1986.11.2 정혜사에서 입적(세수 70세, 법납 58세)

인적사항

문중 계민(戒珉)
수행지침 任性逍遙 自在安閑 行雲流水 安貧樂道
생활신조 자비행(慈悲行)
수계제자 지향(智向)・지섭(智涉)・지엽(智燁)・지관(智觀)

활동 및 공헌

출가 동기

스님은 1923년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전주 정혜사에 있는 명주스님의 아버지 정원명 거사에게 세배를 드리러 갔다가 명주스님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게 되었다. 명주스님의 어머니께서 ‘딸이 둘이니 한 명은 출가를 시키면 좋겠다고 하자 스님의 아버지가 두 딸에게 ‘누가 출가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서로 출가하겠다고 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동생인 헤명스님의 주장이 더 강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한결같은 하심下心으로 정진하며 자비심과 보살행

어려서부터 성품이 자비롭고 말이 없었던 스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평등하고 대하고, 평생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비구니 율사였다. 스님의 염불 독송소리는 지극히 간절하고 낭랑하여 이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환희심을 내어 불법에 귀의케 했다. ‘일근천하(一勤天下) 무난사(無難)事 ’라는 말씀을 새기고 ‘수행자가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살았다.

주지로 있으면서도 대중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몸소 실천하여 새벽 예불 후 법당 및 각단 청소는 물론 비를 들고 온 도량을 청소하고 풀을 뽑곤 했다. 심지어는 입적하는 그날까지 대중 정랑(凈廊) 청소도 직접 하셨다. 수행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스님은 평생을 울력으로 행을 하면서도 일념으로 염불을 놓지 않았다. 손톱이 갈라지고 살이 터져 열손가락을 사계절 내내 반창고를 감고 다닐 정도로 본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량정비와 타인을 위한 삶에 한 평생을 헌신하였다.

한편 스님은 보시행을 철저히 하여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몰래 학비도 대주고 어머니 없는 아이들에겐 옷도 사주고 손수 빨래도 해주기도 하셨다. 스님은 십년 이상을 주지로 계셨으나 한결같은 하심으로 정진하여 모든 이의 고개를 숙이게 했으며, 어려운 사람과 고통 받은 사람을 부처님 모시듯 대함으로써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고 가장 낮은 자보다 더 낮게 임하는 중도(中道)를 실천하셨다. 자비와 말없는 인욕으로 보살행을 보여 주셨다.

속가의 조카 2명이 출가해 비구 혜광스님과 비구니 지순스님 이 되었고 한 집안에서 3명이나 출가해 부처님의 혜명(慧明)을 잇고 일가친척이 거의 부처님 법을 받들고 있다.

입적

혜명스님은 1986년 12월 17일(음력 11월 2일) 세수 70세, 법랍 58세로 세연을 마쳤다. 다비식에서 사리가 수습되었으며, 혜일(慧日)스님이 완산 기슭 정혜사 부도전탑에 모셨다.

전주 정혜사

전주의 정혜사는 보문종 계열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불교대학이다. 즉, 계룡산에 동학사가 있듯이 이에 버금가는 곳으로서, 전주에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대학이자, 기도하는 사찰이 정혜사인 것이다. 때문에 전주 시내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혜사는 산사의 절집 느낌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만큼 사찰의 분위기가 조용하고 고즈넉한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따로 위치한 산사와 달리 불법수행에 열심인 비구니스님들의 청정한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흔치 않은 곳이다.

이러한 정혜사에 가면 비구니사찰의 이미지처럼 연꽃을 비롯한 각종 꽃이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아울러 10여 동 이상의 전각이 배치되어 꽤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정혜사는 1899년 창건되어 110년 된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혜사는 원래 이곳의 본사 원장스님인 명주스님의 외조부께서 칠성각을 짓고 득남발원을 위하여 시작된 사찰이기 때문이다. 그후 정명주 노스님께서 주지를 역임하면서 정혜사 불사를 하였고 백혜명스님과 정례일스님이 거듭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 13동의 전각을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역사 : 정혜사는 1899년에 최향관선생이 득남발원을 위하여 완산 아래 이곳에 조그만 칠성각을 건축하게 한 후 불상을 모시고 그 옆에 십여간 되는 초가집을 사서 사찰을 만들고 절이름을 정혜사라고 하고 기도불사를 진행하였다. 그때의 본사 소재지는 동명이 안행동(雁行洞)이기 때문에 본사의 이름을 ‘안행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발음이 와전되어 ‘안양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정혜사라고 이름 지은 정(定)은 선리(禪理)를 연구하고 혜(慧)는 교리를 널리 알려 정혜쌍수를 실천하자는 취지라고 하겠다. 1921년 정명주 스님이 불교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보광전 15칸, 용화전 1칸을 건축하였으며 명부전, 나한전, 완산선원, 사대천왕문과 아울러 요사채를 건축하여 수행과 포교에 전력을 다했으며, 강원을 설치하여 도제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후 백혜명스님과 현 주지인 정혜일스님이 중건, 중창불사를 거듭하여 지금의 정혜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연혁 1899년 본사 주지 정명주(鄭明珠) 스님의 부친인 고견(古見) 정원명(鄭圓明) 거사와 모친 최정명 보살과 장성우 보살이 함께 보리심을 발하여 완산 밑 서쪽에 한칸짜리 법당을 건축한 후 불상을 모시고 그 옆에 삼간초가를 사서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정혜사’라 불렀다.
  • 출처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479910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p273~27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4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혜명(慧明)스님 본항목 혜명스님(慧明, 1917~1086) 慧明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명스님(慧明, 1917生, 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혜명(慧明))스님 명주(明珠)스님 ~의 제자이다
혜명(慧明))스님 전주 정혜사 ~에서 출가하다
혜명(慧明)스님 전주 정혜사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
혜명(慧明))스님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을 정비하다
혜명(慧明)스님 운곡(雲谷)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혜명(慧明)스님 영호당(暎湖堂) 승호(昇鎬) 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