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곡(香谷)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 ''' 법호·법명 : 향곡혜림(香谷蕙林 : 1912~1978) ''' * ''' 생애·업적 ''' 스님은 1912년(壬子) 1월 18일에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부친...) |
|||
47번째 줄: | 47번째 줄: | ||
향곡 스님의 탑비가 스승 운봉 스님의 탑비와 더불어 묘관음사 동쪽 기슭에 서 있다. </br> | 향곡 스님의 탑비가 스승 운봉 스님의 탑비와 더불어 묘관음사 동쪽 기슭에 서 있다. </br> | ||
《향곡선사법어(香谷禪師法語)》를 1998년 3월 향곡선사문도회(대구시 如如禪院)에서 펴냈다. 문도로는 법제자에 진제법원(眞際法遠)이 있으며 은법제자로 암두혜운(岩竇慧運)·보화혜원(普化慧元)·관허혜기(貫虛慧機)·금당혜오(金堂慧悟)·무주현기(無住玄機)·삼소도오(三笑道悟)·월내혜경(月內慧鏡)·원당혜언(願堂慧彦)·법진(法眞)·혜존(慧存)·칠성(七省)·만오(晩悟). 진현(眞玄)·혜초(慧超)·혜선(慧禪) 등이 있다. </br> | 《향곡선사법어(香谷禪師法語)》를 1998년 3월 향곡선사문도회(대구시 如如禪院)에서 펴냈다. 문도로는 법제자에 진제법원(眞際法遠)이 있으며 은법제자로 암두혜운(岩竇慧運)·보화혜원(普化慧元)·관허혜기(貫虛慧機)·금당혜오(金堂慧悟)·무주현기(無住玄機)·삼소도오(三笑道悟)·월내혜경(月內慧鏡)·원당혜언(願堂慧彦)·법진(法眞)·혜존(慧存)·칠성(七省)·만오(晩悟). 진현(眞玄)·혜초(慧超)·혜선(慧禪) 등이 있다. </br> | ||
− |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 + |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397~399. |
2023년 7월 25일 (화) 20:32 판
- 법호·법명 : 향곡혜림(香谷蕙林 : 1912~1978)
- 생애·업적
스님은 1912년(壬子) 1월 18일에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부친 김원묵(金元默)과 모친 김적정행(金寂靜行)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16세 때 이미 승려가 된 둘째 형의 옷을 전하기 위해 천성산 내원사로 찾아갔다가 그 길로 출가하였다. 1929년 18세 때 내원사에서 조성월(趙性月)스님을 은사로 득도, 법명을 혜림(蕙林)이라 하였다. 1930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雲峰) 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 운봉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 조실로 있었다. 향곡 스님은 내원사에서 운봉 스님 회상에서 지도를 받으며 참선 정진을 거듭했다. 그렇게 10년째 정진하던 어느 날, 향곡 스님은 선방에서 화두를 잡고 있다가 공안을 타파하고 은사 운봉 스님을 찾아뵈었다. 운봉 스님은 자신이 베고 있는 목침을 내놓으면서 “한마디 일러라.” 라고 불쑥 다가섰다. 향곡은 지체 없이 목침을 걷어찼다. 운봉 스님이 곧바로 말했다.
“다시 한 번 일러라.”
“천 마디 만 마디의 말이 모두 꿈속에서 꿈을 설함입니다.”
운봉 스님의 입가엔 미소가 돌았다.
1939년에는 성철 스님과 더불어 은해사 운부암 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1943년(1944?), 향곡 스님의 나이 31세 때 묘관음사에서 운봉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적정(寂靜) 속에 머물며 정진하다가 1947년 36세에 문경 봉암사에서 봉암사 결사를 맺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마련했다. 도반 성철·청담·보문·자운 등 20여 명의 스님과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치열하게 정진했다. 하루는 성철 스님이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산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스님은 이 말 끝에 문득 커다란 의심에 빠져 삼매(三昧)에 들어갔다. 자신의 몸뚱이까지 잊어 버리는 무심삼매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도량을 걷다가 문득 자신의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활연대오하였다. 오도의 노래가 울렸다.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 권의 경전과 무수한 법문, 다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忽見兩手全體活 (홀견량수전체활)
三世佛祖眼中花 (삼세불조안중화)
千經萬論是何物 (천경만론시하물)
從此佛祖總喪身 (종차불조총상신)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구비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鳳岩一笑千古喜 (봉암일소천고희)
曦陽數曲万劫閑 (희양수곡만겁한)
來年更有一輪月 (내년경유일륜월)
金風吹處鶴唳新 (금풍취처학려신)
1950년 스님은 6·25전쟁 직후인 40세에 부산 선암사의 주지 및 조실로 추대되어 그 동안 닫혀 있던 선원을 다시 열어 많은 납자들을 제접했다. 종단정화 이후 1955년, 44세에는 제1세 불국사 주지를 맡았으며 1971년 신라 불교 최초의 흥법의 터전인 천경림(天鏡林)에 흥륜사(興輪寺)를 원만圓滿) 비구니 스님과 함께 중창하였다. 1960년 49세 때 스님은 다시 월내 묘관음사로 돌아가 길상선원(吉祥禪院)을 창건하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여 전국의 수좌들을 제접하는 등 살활이 자유자재로웠다. 1967년에 묘관음사에서 법제자 진제(眞際)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렸다.
이후 선학원 중앙선원 이사장과 조실로 추대 되었으며,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납자를 제접하였다. 말년에는 다시 묘관음사로 복귀하여 혜월(慧月). 운봉(雲峰) 스님의 영각(影閣)을 신축,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선산 도리사에는 운봉탑비를 세웠다.
1978년(음력, 양력 1979년 1월 16일) 67세 되던 해 겨울, 납자들에게 용맹정진을 지도한 다음 며칠 동안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12월 8일 다음의 임종게를 읊으며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67세, 법납 57년이었다.
목인은 고개 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석녀는 시냇가에서 춤을 추도다.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라
영원히 밝고 밝아 언제나 수용하리.
木人領上吹玉笛 (목인령상취옥적)
石女溪邊示作舞 (석녀계변시작무)
威音那畔進一步 (위음나반진일보)
歷劫不昧常受用 (역겁불매상수용)
향곡 스님의 탑비가 스승 운봉 스님의 탑비와 더불어 묘관음사 동쪽 기슭에 서 있다.
《향곡선사법어(香谷禪師法語)》를 1998년 3월 향곡선사문도회(대구시 如如禪院)에서 펴냈다. 문도로는 법제자에 진제법원(眞際法遠)이 있으며 은법제자로 암두혜운(岩竇慧運)·보화혜원(普化慧元)·관허혜기(貫虛慧機)·금당혜오(金堂慧悟)·무주현기(無住玄機)·삼소도오(三笑道悟)·월내혜경(月內慧鏡)·원당혜언(願堂慧彦)·법진(法眞)·혜존(慧存)·칠성(七省)·만오(晩悟). 진현(眞玄)·혜초(慧超)·혜선(慧禪) 등이 있다.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397~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