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출생) |
(→생애) |
||
18번째 줄: | 18번째 줄: | ||
==생애== | ==생애== | ||
+ | <pre> | ||
1925 서울 출생 | 1925 서울 출생 | ||
1939 일본 복강현국민학교 졸업 | 1939 일본 복강현국민학교 졸업 |
2022년 6월 25일 (토) 17:18 판
혜주(慧珠)스님 | |
---|---|
[[파일:|240px]] | |
법명 | 혜주(慧珠) |
법호 | 보주당(寶珠堂) |
속명 | 배석남 |
출생 | 1925.4.29 |
출가 | 1959년 |
입적 | 2004.9.4. |
사찰 | 회룡사(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주(慧珠)스님은 회룡사에서 도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회룡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1925 서울 출생 1939 일본 복강현국민학교 졸업 1943 복강 소창시 적십자간호학교 졸업 1959 회룡사에서 도준(道準)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니계 수지 1963 석농스님에게 사집 수료 1966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광동학원 이사 1974 광동여고 설립 1981 회룡사 주지 1984~1998 자비유치원 설립 및 원장 취임 1999 자비장학재단 설립 및 이사장 취임 2000~2004 회룡사 회주 2004.9 회룡사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5세)
- 문중 : 법기문중 처금계통 청룡사계열 제 10대손 (수행담록에는 ‘청룡’이라고 나와 있음)
- 생활신조 : 승려로서 내가 아는 만큼 전달하자.
- 상훈 : 봉선사 감사패(1997) 외 다수
- 수계제자 : 성견·성타·종일·성범·성오·성진·성파·성원·성엽·성환
활동 및 공헌
출생
혜주(慧珠)스님은 1925년 4월 29일 서울 뚝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대구이며, 이름은 배석남이다. 서울 태생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장한 스님은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에 일본 적십자 간호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러다가 세수 20세 되던 해인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6·25전쟁 때 간호사로 근무하다
스님은 6·25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 동산병원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하였다. 당시에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간호사로 근무를 하려면 많은 공부와 실습이 뒤따르지만 그때는 경험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채용할 때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에서 적십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 근무 경력까지 있는 스님은 물어볼 것도 없이 채용되었다. 스님은 군인을 돌보는 야전병원이 아닌 민사처병원으로 발령을 받아 홍천, 원주, 춘천 등에서 1년 정도 근무를 하였다. 전쟁 중이어서 병원 시설은 형편없을 만큼 열악하였다. 당시 시골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인근 산에 굴을 파고 들어가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향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던 것이다. 주민들의 그런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아군은 사방으로 폭격을 하였고, 사람들은 굴속에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지내다가 원인 모를 이상한 병에 걸려 죽는 일이 빈번했다. 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한 무리씩 고아원으로 보내는 일도 흔했다. 미군은 허물어진 집을 수리하여 임시 고아원이나 피난민 수용소로 만들었는데, 목사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여 그들에게 운영을 일임했다. 그러나 미군들이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음식을 제공해주면 정작 목사들은 고아들에게는 10분의 1도 주지 않고 밤에 몰래 민간인들에게 음식을 팔아 자신의 배불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스님은 그런 목사들의 행동을 보고 기독교를 불신하게 되었다. 야전병원이 폭격을 맞으면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파편이 몸에 박혀 피를 철철 흘리며 이곳저곳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이런 사람들은 트럭에 실어 춘천으로 보내 기본 응급치료를 한 후 후방인 원주로 보냈다. 아비지옥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았다. 스님은 사지가 마치 나뭇가지 잘리듯 잘려나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보기가 괴로웠다. 1952년의 일이었다. 추운 피난 수용소에서 간호사들은 하루 종일 예방주사를 놓느라 무척 바빴다. 피난민들은 여러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에 가죽을 입혀놓은 상태와 다름없었다. 주사 바늘을 꽂으면 바늘이 푹 꺼질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처참한 광경에 스님의 가슴은 미어졌고, 그즈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출가
이처럼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 재가 신도로서 모범적인 신앙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스님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껍데기 불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홀연한 깨달음이 들자 한순간에 세간의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죽으면 몸은 땅속으로 들어가지만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태어났다 죽어야 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은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 때문에 2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님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해 1959년 도봉산 회룡사로 향했다. 회룡사 노스님께 자신의 의문을 여쭈었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바로 그 문제를 우리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 인생을 알기 위한 공부!’라는 일언지하에 스님은 바로 마음을 정리하고 세속의 인연을 끊었다. 당시 스님은 영등포에서 1,5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많은 친구들에게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스님은 사업 정리와 자금 회수 등의 문제를 손위 언니께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두고 가족들도 모르게 출가를 하였다. 세수 35세 되던 해인 1959년 3월, 스님은 의정부 회룡사에서 도준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삭발은 몇 달 후인 7월 12일에 하였는데, 노스님께서 가장 좋은 날이라고 정해주신 날이었다. 스님은 삭발한 그 다음해, 회룡사를 사찰 명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출가를 한 후 스님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수덕사에 주석하시던 일타스님의 누님인 응민스님께서 혜주스님을 위해 절을 하나 얻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자신이 수행을 한다는 생각과 머지않아 자신의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도 알게 되리라는 확신과 기쁨으로 신심이 하늘 끝까지 뻗쳐올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고 살면서 실망도 많았다고 한다.
은사이신 도준스님
회룡사는 전쟁 당시 후퇴하던 미군들이 불을 내서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빈터였는데, 1953년에 은사스님이 오셔서 불사를 이룩해놓은 절이다. 은사스님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려워 석굴암의 복천스님께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회룡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는 미군들에게 원조를 요청해 기와나 목재 등의 자재를 지원받은 덕분에 마침내 44평의 절을 세우게 되었다. 건물 하나로 불공과 참선, 주무시는 것까지 다 해결하였다. 은사스님은 회룡사를 불사할 당시 미송의 목재로 지었다. 그런데 워낙 오래되다 보니 모두 썩어서 붕괴되기 직전이라 근래에 다시 뜯어서 개축을 했고, 개축할 당시 스님들은 선방 운영을 2년 동안 하지 못했다. 요즘의 행자 기간은 절차가 간단하고 시간도 짧지만 예전의 행자 시절은 해야 할 일이 끝이 없고 절차도 복잡하며 시일도 길었다. 지금에 와서 행자 생활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무척 어려웠다. 회룡사부터 지금의 병무청 자리인 의정부까지 이어진 땅이 모두 스님들의 논이었고, 하루에 두 번씩 직접 다니면서 모내기를 하는 등 무려 10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지금의 광동여자고등학교는 훗날 그 논을 팔아 세운 것이다.
수행과 수학
스님이 회룡사에 온 지 이제 40년이 되었다. 그동안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비록 힘은 들었지만 행자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행자 시절에 스님은 ‘해야 할 일이나 힘든 것이 곧 수행이고, 생전 안 해본 일도 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도보로 왕복하면서 농사를 짓고, 염불을 익혔다. 참선도 이때 기초를 잡았을 정도로 부지런히 익히고 닦으며 살았다. 1963년에는 전강스님이 쌍룡사에 오셔서 선방을 열었다. 스님은 참회 기도를 하러 30일 동안 매일 같이 쌍룡사에 갔다. 차를 타면 지척의 거리지만 그때는 그 먼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녔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렇게 참회 기도를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관해스님이 행자로 왔을 즈음의 일이다. 혜주스님은 호롱불을 켜놓고 다른 스님들과 함께 참선을 하면서 스님들이 조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키가 큰 어떤 스님이 참선을 하면서 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스님 같아 보여서 한편으로는 피곤해서 그러시겠지 하며 이해를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좋은 도량에서 계속 졸 고 계시니 조금은 얄미웠다. 그러나 피곤을 무릅쓰고 정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고 거룩하게 느껴져 혜주스님은 환희심이 났다. 대중 들은 37일간 계속 용맹정진을 하였다. 예전에는 큰 길에서 회룡사까지 오려면 좁고 험한 길을 걸어 올라와야 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신도들은 매월 열리는 법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고 드물게 이따금씩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스님은 종종 신도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기도를 해주곤 하였다.
<사진>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6
그 당시는 하루 세끼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소금 덩어리에 배추를 넣다시피 하여 일부러 짜게 절여 김치 한 조각이라도 아껴서 먹고, 국은 거의 우거지국이었으며, 겨울에는 동치미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속가에서 넉넉히 살다가 갑자기 궁색한 생활을 하면서도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지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님은 애당초 음식 욕심이 없는 분이었고, 먹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은 다 이겨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도 속퇴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선배 스님들이 불법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욕을 한다든지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혜주스님은 ‘저런 분들을 선배로 모시면서 구태여 이런 세계에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갈등을 두 번이나 했었다. 스님은 이런 일을 극복하기 위해 효봉 큰스님과 청담 큰스님, 경봉 큰스님 등을 찾아다니면서 자문을 받았지만 분명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사진> [회룡사 경내]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7
그러나 스님의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해주신 분은 거의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책 한 권도 제대로 빌려보기가 어려웠고 강원에서도 한문 경전으로 어렵게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스님은 한문을 잘 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만약 한문을 몰랐으면 중노릇도 못했을 것이라면서 요즘도 한문 배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때론 글귀를 보고도 중노릇을 하는 법’이라고 말씀하는 스님은 발심을 스승으로 삼고, 도봉산을 화두로 삼았다. 스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도봉산 산 속에 큰 보물이 있어 그 보물(자기 것)을 찾으려고 왔는데, 앞에서만 뒤적거리다가 없다고 속상해 하며 돌아가 버리면 그 보물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그 깊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 혜주스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고, ‘이런 고생쯤이야.’ 하는 확고한 의지로 고비들을 넘겨왔다. 스님은 자신도 중생이다 보니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서 물러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이런 말들을 가슴속에 새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
광동여고 설립
1966년 세수 42세에 스님이 이사로 취임한 광동학원은 1974년에 현재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광동여고를 외상으로 설립하였다. 처음 개교할 때는 고등공민학교였고, 그것이 지금의 광동여고의 전신이다.
<사진> [제9회 관인 자비유치원 졸업기념(1993. 2. 13.)]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8
옛날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다. 스님은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고, 불교 신도였던 교장선생님과 승가 행진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스님은 불교 학교라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지나던 길에 고등공민학교에 법원의 차압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사정을 알아보니 당시 교장이었던 사업가가 부도를 냈고, 그 바람에 학교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그때가 1971년으로 당시 스님은 법당을 짓느라고 허리가 휠 정도로 애를 쓰고 다녔고, 법당을 짓고 보니 차압당한 고등공민학교를 살릴 돈이 없었다. 때마침 노스님의 형제뻘 되시는 선학원의 병암스님이 찾아왔다. 혜주스님이 법당을 잘 지었다는 얘기를 듣고 선학원을 다시 짓기 위해 스님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병암스님은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는 선학원의 건물을 잘 지어주면 지금의 광동여고를 외상으로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선학원을 맡아주는 조건으로 광동여고를 다시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선학원 건물을 한창 짓고 있는데 선학원의 스님이 동국대학교 총장 선거에 재출마하여 낙선을 한 것이다. 사방에서 돈줄이 막혀 하는 수 없이 스님은 운허스님을 찾아가 광동여고가 위치한 산을 팔자고 제의를 하였다. 광동여고 재정이 어려워 교사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니 산을 팔아서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자.’고 제의한 것이다. 운허스님의 허락을 받아낸 후 스님은 학교 운영에 힘을 쓰게 되었다.
<사진>[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9
당시 스님은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5년에 걸쳐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학교에 몸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동여고는 설립 당시 11개의 교실에 불과했지만 후에 도시개발이 되어 증축을 하여 현재의 5층 건물이 되었다. 실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1962년 세수 38세에 스님은 운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그 다음해에 이석동 강사스님께 사집과를 수학하였다. 그 후 세수 42세 되던 해인 1966년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1959~1963년에 이르는 동안 회룡사 강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때 스님과 함께 강원에서 공부했던 분 가운데 한 분을 제외하고 아쉽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속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회룡사 강원의 강사로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당시로는 드문 학력을 갖춘 대처승이 계셨고, 그 후임으로 역시 대처승인 일연스님이 계셨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입방선 시간을 반드시 지키게 했다. 농사를 하고 있는 중간에도 입선 시간을 지켜야 했으며, 겨울에는 참선에 몰두하며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혹여라도 혜주스님이 어영부영 하다가 입선을 못 드리면 며칠씩 화를 내시며 스님을 나무라셨다. 1971년에 법당을 짓고 스님이 허리디스크로 병원에 입원을 하여 꼼짝을 못하자 이때부터 은사 스님의 엄한 성품이 약간은 수그러들었다. 그 정도로 입선을 강조하던 은사스님이셨다.
<사진>[회룡사 5층 석탑, 경기도 문화재 자료 168호.] 신라 선덕여왕 6년 (632년)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지닌 탑이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0
법당을 지은 뒤에 노스님께서 돌아가시고, 그 직후에는 디스크가 생기는 등 여느 해보다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은사스님은 구족계를 청룡사에서, 혜주스님은 해인사에서 받았다. 은사스님은 6·25전쟁 전에 성도원이라는 양로원을 운영하셨고, 전시에는 노인들을 모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회룡사 주지
혜주스님은 1964년에 회룡사 총무 소임을 맡았고, 1981년에는 주지로 취임하였다. 사찰의 규모가 크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커서 일이 끊임없이 많다. 또한 스님은 의정부에 사는 비구니스님들의 모임인 자비회를 조직하였고,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비회
자비회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1974년 신도들로부터 장학기금을 모금하고 스님들도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발생되는 이자로 일 년에 한두 명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1억이 되면 재단 설립이 가능하여 자비회 장학재단은 현재 법인으로 정식 등록된 상태이다. 혜주스님은 1982년 자비회관을 짓기 시작하여 1983년에 완공을 하였고, 1984년~1996년까지 자비유치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상좌스님을 동국대학교 아동학과에 보내 졸업하게 하여 원장을 맡기기도 하였으며 크게 마음을 열 때는 불사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였다.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청룡사 노스님이 기도를 다닐 때 꼭 혜주스님과 동행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룡사는 강원과 선방을 겸하고 있을 때였는데, 노스님은 혜주스님이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을 알고 같이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노스님이 기도를 다니신 연유는, 어렸을 때부터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갑이 지나 3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은 노스님을 금강산에 있는 절에 업어다주었는데, 노스님은 90세가 넘어서도 정정하셨다. 남해 보리암에 간 적도 있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아침에 여수에 도착해서 남해 가는 배를 타고 그 다음에 다시 남해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마다않고 노스님은 그 곳에서 기도를 하셨다. 이때 노스님은 남해 보리암의 주지스님을 위해 옷을 꼭 한 벌씩 가져가곤 하셨다. 노스님이 직접 광목 한 필을 끊어다가 바느질을 해서 만든 옷이었다. 노스님은 화장실 가는 옷도 따로 있었으며 법당에 가실 때는 그냥 가지 않고 목욕재계를 한 후에 가셨다. 노스님을 시봉하는 동안 혜주스님은 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노인복지시설
스님은 복지시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출가 후 열심히 수행정진 하면서 농사도 짓고 불전에 기도도 하고 참선 공부도 했지만 세월만 가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열심히 공부를 해도 부처가 되지 못하니 시은이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때 의정부 회관 옆에 있는 동회 사무실을 시에서 불하받아 건물을 허물고 수리를 하여 1층은 무료병원, 2층은 무료급식소로 활용하는 노인 복지시설을 만들었다. 의정부 경찰서에서 경승 15명을 선출하여 경찰서 안에 법당을 만들어 접대를 한 적도 있다.
경승제도
우리나라는 경승제도가 전무한 실정이라 신도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선출된 15명의 경찰들로 경승제도를 만든 것이다. 신도들을 위한 일종의 복지제도인 셈이다. 경승제도를 만든 후에는 법회를 시작하였다. 스님은 항상 검소한 생활과 진실한 모습으로 수행 실천에 앞장섰으며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만족감을 느끼고, 물질과 명리에도 초연하였다. 스님은 ‘마음으로는 많이 도와주고 싶어도 형편상으로는 그게 잘 안되어 아쉽다.’고 하였다.
‘바다는 사람의 힘으로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심은 채울 수 없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 밖에서는 구할 수 없고 다만 마음 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혜주스님은 2004년 9월 회룡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45세로 사바의 인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성견·성타·종일·성범·성오·성진·성파·성원·성엽·성환스님 등이 스님의 유훈을 따르고 있다.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월간해인, "북한산 관통땐 지역주민 위기" (2003년) http://haein.or.kr/bbs/board.php?bo_table=free&wr_id=95&page=50&sfl=&stx=&sst=wr_datetime&sod=desc&sop=and&page=50 미디어조계사, [법회/행사] 북한산 살리기 생명법회 (2003년)
http://m.jogyesa.kr/news/articleView.html?idxno=450
법보신문, 회룡사 회주 혜주 스님 (2004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39
고산신문,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찰, 회룡사를 소개합니다 (2021년)
http://www.gosa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0
<사진> [혜주스님] 사진출처: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39
회룡사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Hoeryongsa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하였다. 936년(경순왕 10)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였으며, 1070년(문종 24)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삼창하였다. 회룡사로 불리게 된 것은 1384년(우왕 10)에 무학(無學)이 중창을 한 뒤이며, 여기에는 이성계(李成桂)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선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하였는데,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1403년(태종 3) 태조가 끈질긴 함흥차사(咸興差使)들의 노력에 의하여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 뒤, 이 절로 무학을 찾아왔으므로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1630년(인조 8)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4년부터 비구니 도준(道準)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삼성각·선실(禪室)·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수조(水槽)와 떡돌, 반파된 석탑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이 절의 창건주로 전하는 의상의 사리 1과가 봉안되었다고 전하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높이 3.2m이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속 암자인 석굴암은 출입구가 절 아래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독립된 암자로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선방(禪房)·요사채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 새겨진 글씨들은 김구(金九)의 휘호이다. 그리고 옛날 무학이 이성계의 창업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무학굴은 현재 찾을 수가 없다.
<사진> [회룡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806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32~41.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68.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7, 363
회룡사 경기 의정부시 전좌로155번길 262 (호원동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