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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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31일 (수) 12:54 판




정의

계수(桂修스님은 스님을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은사로 출가하여 천개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6 전북 무주 출생
1962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法能)스님을 은사로 출가
용화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4 운문사 강원 사교 수학
1968~2004 전국 제방 선원에서 평생 참선
1970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94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 비구니 정혜도량 회장
1995 천개사 불사
2004 현재 천개사 회주(會主)[1]
문중 백양사(白羊寺)문중
수행지침 하루하루를 부끄럽지 않게 살자.
수계제자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

활동 및 공헌

출가

운문사 강원 보리베기 울력(1964. 6. 9)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104

계수(桂修)스님은 1946년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이름은 박희옥이다.

스님은 17세 때 무주구천동 관음사에서 5개월 동안 동문선습, 명심보감 등 한문공부를 하며 지냈는데, 그때 관음사에 오신 은사 법능(法能)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절에 간 것은 스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불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며, 검게 그을린 시골 사람들만 보다가 천사같이 곱고 섬섬옥수 예쁜 스님들을 보니 마냥 좋을 뿐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후 스님은 산중의 공기가 고향의 공기보다 훨씬 좋게 느껴졌다. 산바람이 그립고 스님들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스님은 도봉산 원효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발심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 때 묻지 않은 스님들과 함께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그러나 절집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짐을 지고, 땅을 파고, 나무를 하고, 스님들 시봉을 하느라 한 번도 앉지 못했다.

밤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억울한 마음에 보따리를 쌌다. 그러나 출가할 때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나왔기에 선뜻 돌아갈 수가 없어 아침이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날마다 보따리를 쌌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세에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

운문사 강원에 가다

계수스님은 20세에 운문사 강원에 가게 되었다. 운문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고, 물이 너무나도 맑아 낮에도 ‘이목소’에서 목욕을 했다. 스님은 운문사 도량이 무척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잘 견디어 여기까지 온 자신이 대견스럽고 장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마침내 운문사에서 발심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봐도, 산을 봐도, 물을 봐도 좋았다. 하루하루 너무 좋아서 신심이 났다.

그리고 스님은 24세에 『기신론』 소문에서 진정한 발심을 하였다.

 

       지환즉즉리(知幻卽卽離) 즉리즉각(卽離卽覺)

       환인 줄 알면 곧 여의고 여읜 즉 깨달음이라

 

나날이 발심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심 있게 생활하던 중 계수스님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지스님의 맏상좌 스님이 해제를 하고 돌아와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갔다는 말을 전해준 것이다.

최고의 비구니 도량인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가면 다시는 되찾지 못한다는 절박함에 삼직 스님은 서둘러 석남사로 향했다. 석남사의 어른스님들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전국의 비구니가 모두 나서서라도 운문사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셨다.

학인들이 선두에 서서 데모를 하고, 묘전 주지스님과 어른스님들 또한 음으로 양으로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학인들은 큰방에 소변통을 들여 놓고 하루 동안 단식을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방에 앉아 있다가는 다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며 동화사로 가서 데모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하여 모두들 동화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동화사에서 데모를 하는 동안에도 별 소득이 없었다. 주지스님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동화사 주지스님이 대구 포교당에 있으니 그곳으로 옮겨야 하며, 언론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학인들은 다시 대구 포교당으로 거처를 옮겨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와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다. 그제야 주지스님이 나와 ‘소원대로 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하였고, 학인들은 데모를 멈추고 돌아갔다.

주지스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비구니스님들은 결국 운문사를 되찾았다. 모든 비구니가 마음을 합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때 계수스님은 학인 대표로서 혜춘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한 달여 동안 총무원을 드나들며 운문사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운문사를 되찾은 뒤 묘전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모시고, 당시 마포 석불사에서 학인 몇 명을 가르치던 묘엄스님을 비구니 초대강사로 모셨다.

운문사의 생활은 무척 고되었다. 농사일부터 시작하여 벌목꾼까지 잡으러 다녀야 했다. 1960년대에는 운문사의 주변 산에 불법벌목이 극심했다. 스님들은 숯 굽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숯을 구울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여 함께 잡으러 다니곤 하였다.

한번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하였더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도망가고 노인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을 붙잡아 산을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따라왔다. 노인의 아내라고 하였다. 다른 산에는 나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운문사 주변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스님은 가난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불법으로 벌목을 해야 했던 노부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하러 간 사이 계수스님은 몰래 노부부를 도망가게 해주었다. 나중에 노부부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어른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으나 스님은 모르는 척하며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수행

운문사 강원 시절 불국사 참배 기념(1964. 11. 2)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7
뒷줄 왼쪽 두 번째부터 무착, 정오, 혜해, 심원스님 앞줄 왼쪽부터 상행스님, 향곡 큰스님, 계수스님(내원사, 1971)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8

24세에 사교입선을 하고 『기신론』을 보다가 재발심을 하게 된 스님은 선원에 가기를 원하였다. 당시에는 강원에서 선원으로 가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은 겨울 결재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정한 뒤 스승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스승님은 성철 큰스님께 가서 화두를 타라고 하셨다. 계수스님은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큰스님을 찾아뵙기로 하였다.

당시 전매청 뒤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는 한 보살이 있었는데, 동화사나 해인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성철 큰스님의 소식을 물으니 마침 출타 중이라서 해인사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계수스님은 성철 큰스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포교당에서 3일 동안 머물렀다. 잠시였지만 스님은 산중 생활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한다.

향곡스님과의 인연

그런데 그때 대구 동화사에 향곡 큰스님께서 오셨다는 얘기가 들렸다. 계수스님은 평소 향곡 큰스님을 뵙고 싶어 했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일찍이 향곡 큰스님은 속가 시절 이미 출가한 사촌 형에게 책을 한 권 받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여 서당 선생님께 여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해석을 해주시기는 하였으나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듯하였다. 이후 향곡 큰스님은 늘 책을 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심부름으로 절에 갔다가 한 젊은 지객스님께 다시 책의 뜻을 여쭈었다. 지객스님은 그 책이 치문이라며,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향곡 큰스님은 서당 선생님도 모르는 것을 젊은 스님이 모두 알고 있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이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구나.’ 생각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향곡 큰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18세에 견성하였다고 한다.

계수스님은 동화사로 찾아가 향곡 큰스님을 뵈었다.

“어디서 왔느냐.”

체구가 깡마르고 눈빛이 형형하신 향곡 큰스님이 물으셨다.

“운문사에서 왔습니다.”

“너는 강사하면 낫겠다.”

큰스님의 말씀에 계수스님은 이렇게 여쭈었다.

“백년 찌꺼기를 씹느니 한 모금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하고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계수스님은 동화사에서 큰스님께 화두를 탔다.


용맹정진

맨 뒷줄 왼쪽 첫 번째 계수스님, 두 번째 수덕사 성우스님, 가운데줄 왼쪽 두 번째 도연 노스님, 세 번째 마하 노스님, 앞줄 왼쪽부터 경봉 큰스님, 선경 노스님(내원사, 1974.1)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

그해 겨울 향곡 큰스님께서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하기로 하자 많은 수좌들이 내원암으로 모여 들었다. 큰스님은 이번 철에 대한민국의 비구니 큰스님이라 할 만한 딸 하나를 낳고 싶다.”고 하시며 수좌들과 한 방에서 함께 용맹정진을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스님의 경책 또한 매우 강하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님은 향을 뭉치째 불을 붙여 그대로 지졌고, ‘죽은 송장이나 같은 산송장이라 죽여도 괜찮다.’며 장삼 끈으로 목을 묶어서 도량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였다.

향곡 큰스님의 경책은 상처에 뿌리는 소금과도 같았다. 그래서 계수스님 역시 ‘내 금생에 확철대오하기 전에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리라.’하며 발심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수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8시까지 정좌한 뒤 다시 양진암 토굴에 가서 또 앉을 정도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은 도가 높을 텐데도 저렇게 잠도 주무시지 않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하며 어른스님들을 따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추운 겨울 눈밭에서 있다시피 하였더니 한 달 반 정도 지나자 이가 들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먹기 힘들뿐더러 고통도 심하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듯하였다. 그래도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스님은 거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점점 말라갔다. 잠깐씩 도둑잠을 잘 때도 다른 스님들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스님은 힘이 없어서 조금만 졸아도 몸이 크게 움직였다.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이 끝나자 향곡스님께서 수좌들에게 말씀하셨다.

“밥값하게 한 마디씩 해보아라. 역대 조사가 이 문에 들어오면 무간지옥을 간다고 하셨는데 무간지옥을 벗어나는 길을 일러라.”

스님은‘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하라는 말씀을 잊고, 지혜가 부족하여 마음만 헐떡거렸다.’고 한다. 당대를 주름잡던 어른스님들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끝에 앉은 스님이 사량 분별로 한마디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저는 큰스님처럼 확철대오도 못하고 공부도 못했지만 두 달 정진했는데 이 고통은 비길 바가 없어서 정말 이 문에 들어온 스님들은 생과 사를 넘을 지경이니 무간지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대한민국의 비구니 딸 하나 낳으려고 몸부림쳤으나 헛수고였구나.”하셨다.

치아 때문에 고생하다

' 내원사 동안거. 선경 노스님, 마하 노스님 등 어른스님들을 모시고 (1974. 1)‘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3
수좌스님들과 산행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4
가운데 진제 큰스님, 오른쪽 흥륜사 혜해 노스님과 함께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6

그렇게 첫 철을 나는 동안 건강이 나빠진 스님은 치아가 들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도블럭이 네모반듯하다는 사실도 몇 년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원래 울퉁불퉁하게 생긴 줄로만 알고 늘 조심스럽게 걸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느라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한 철을 지낸 후 계수스님은 치아를 모두 뽑아버리면 장애가 없을 것 같아 25세에 이를 다 뽑고 틀니를 하였다. 치과의사가 시술한 것이 아니라 어깨너머로 배운 사람이 이를 뽑았다. 그리고 결국이 치료를 위해 마을에 있는 한 보살님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기가 막힌 것은 초발심이 불길 같아 돌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그 집의 방이 단칸방이라 신랑이 퇴근하고 오면 스님은 다락으로 올라가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가 아침에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내려와서 생활했다.

스님은 그 집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죽을 먹지 않았다. 이가 그 모양이라 본해탈보살이 이를 해주고 있었는데, 가난한 살림살이에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까봐 잇몸에서 피가 줄줄 나는데도 죽을 안 먹는다고 했던 것이다.

비록 틀니가 잘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치아 때문에 장애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 제대로 씹어 먹을 수 없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지혜로운 처사는 아니었지만, 그런 초발심으로 용맹스럽게 수행했기 때문에 평생동안 제가 선원에서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1989년 계수스님은 혜춘스님의 소개로 좋은 치과에서 다시 틀니를 하게 되었다. 원래 틀니를 하는데 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지만 혜춘스님이 ‘앞으로 비구니계를 책임질 스님이니 돈을 못 받게 되더라도 잘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수중의 350만 원을 주고 치료를 받았다.

처음 틀니를 할 때는 한 달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1년이 소요되었다. 주위에서는 사기꾼한테 걸려든 게 아니냐고 우려를 하였지만, 병원에서는 성심껏 정성을 다해 만드는 중이었다. 병원 원장은 불교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스님이 방문하는 날에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스님은 틀니를 만드는 그 1년 동안 선원을 다니지 못하였다.

틀니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원장이 간호사에게 새 틀니를 씻어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짤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틀니가 깨지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은 빨리 가져오라고 채근을 하였다. 계수스님은 원장에게 “틀니가 깨진 것 같은데, 너무 야단치지는 마세요.”하고 말하였다. 원장은 다시 소리를 치며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자 간호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틀니가 깨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장은 버럭 화를 냈고, 스님은 “이왕 깨진 거 나무란다고 복구될 것도 아닌데 그만 하세요.” 하며 말렸다.

결국 밤새 다시 끊여서 아랫니는 다음날 기워서 끼웠다고 한다. 원장은 계수스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거듭 사죄를 하였다.

“혜춘스님 말씀대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 상황이면 어느 누구도 화를 안 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제가 꼭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틀니의 붙인 부분이 떨어져서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무척 바쁜지 틀니 교정은 계속 미뤄졌다. 그래도 스님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치과를 찾아서 교정을 하였다. 틀니는 여전히 잘 맞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원래의 치과를 찾았으나 원장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계수스님은 그동안 전국의 유명한 선원을 두루 다니며 정진하였다.

1994년 종단개혁운동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날 즈음 스님은 ‘우리가 선원에서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총무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 선원에만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의현스님이 너무 오래 집권하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

스님은 해제철을 맞아 잠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이모님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은사스님이 계수스님을 부르셨다.

“너를 찾아 난리가 났다. 지금 총무원이 쑥대밭이란다.” 때마침 선원의 수좌가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학인들은 맞아 죽게 되었는데, 어른스님들은 보이지도 않아요. 스님들만 살려고 와 보시지도 않는 건가요? 스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TV에서는 학인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

계수스님은 일단 한 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계사로 갔다. 스님이 도착하자 일연스님은 ‘어른스님이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하며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듯 매우 반가워했다.

그렇게 하여 학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수좌들까지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되었다.

의현스님이 사상은 출가자 정신이라 학인들이 움직일 때는 그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전국의 수좌들이 움직이니 수좌들에게 꺾이어 일단락이 났다. 비구니 어른스님들은 오랫동안 총무원장으로 계신 의현스님의 친분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다

그 후 계수스님은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나는 뜻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요.”

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정혜도량’이라 짓고 비구니 대표로 선원수좌(정)와 교학하는 강사(혜)들 모임으로 1년간 활동한 뒤 집권이 바뀌었으니 더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해체를 하였다.


은사스님인 법능스님

계수스님의 은사스님은 1968년 도봉산 원효사에서 나와 청계산 끝자락에 토굴을 짓고 20년동안 노보살님과 함께 사셨다. 평생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비구니스님이자 학자로 살았던 은사스님은 공양을 드시면서 짜고 맵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밥도 못하는 사람이다. 짜면 물을 넣고 싱거우면 간장을 넣어서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처음 토굴을 지을 때 보살님 명의로 주택 허가를 받아 집을 짓고 사셨다. 그런데 당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서 1995년 계수스님이 사찰로 만들려고 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스님은 1년 가까이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겨우 사찰 토지로 만들어 놓았다.


천개사 불사

스님은 새로 불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부전생활을 하였다. 하루 사분정근을 하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 21편과 관세음보살 정근 천념을 하였고, 사시에는 매일 관음시식을 하며 『금강경』을 독송하였다.

이때 계수스님은 독살이 절 살림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선원에서 살 때는 전혀 모르던 힘든 일이었다. 이후 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원의 후인들에게 독살이 스님들의 어려움과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선원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공양을 해주는 독살이 스님들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독살이 하는 곳에 불사가 있으면 해제철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독살이하며 공양하는 스님들이 없으면 선원이 유지될 수 없고, 또 우리가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 무간지옥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수스님은 불사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불사를 마쳤다. 그런데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 은사스님께서 주신 불사금은 1억 5천만 원이었는데, 불사를 끝내고 모두 계산을 해보니 총 공사비가 10억이 넘었다.

은사스님의 청빈 공덕인지, 제가 30년 면벽 공덕을 쌓았는지, 상좌와 함께 3대가 잘 산 공덕인지 모르겠지만 불사를 할 때는 말만 하면 다 되었습니다. ‘불사를 하는 것은 유산을 남기는 것이니 힘 따라 하리라.’ 하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곤 했지요. 그때부터 저는 사심없이 불사를 하면 부처님께서 다 이뤄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문관에 들다

계수스님은 정축년 여름 결재를 오대산 지장암에서 나고, 8월 그믐께 무문관에 들어갔다. 평소 스님은 특별 기도하러 간다는 사람, 단식하는 사람, 오후 불식 한다는 사람 등 특별히 무엇을 한다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도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며, 수행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에 살면서 대중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무문관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을 하였는데, 도반인 수덕사 성우스님이 혼자서 가기가 어려웠는지 결제하는 것과 똑같다며 거듭 청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바랑만 메고 가게 되었다.

스님은 이것저것 준비하거나 꼼꼼히 계산해서 돈을 쓰지 않고, 쓸 수 있는 만큼 한 번에 쓰고 마는 성품이어서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따로 무엇을 준비하지 않았었다.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할 만큼 답답한 것을 못 견뎌했던 스님은 창문에 큰 창살이 박혀 있고 개구멍만한 구멍으로 밥이 들어오는 좁은 공간에서 수행을 했는데, 저혈압에다 심장까지 약해서 문이 쾅 닫힐 때마다 그 충격으로 앞뒤가 끊어졌다. 밥은 하루 한번만 들어오기 때문에 식은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야 했다.


스님은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줄도 몰랐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을 줄도 몰랐다.

그런데 꽉 막힌 공간에서 두 달이 지나도록 창문을 열지도 않은 채, 경치 좋은 전국의 선원을 두루 다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은산철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였던 것이다.

한 달 쯤 지나자 극도로 상기되어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스님은 ‘30년이 지나서 여기까지 왔거늘 어디서 죽은들 어떠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하며 휴지를 머리에 감고 무통 침으로 수백 군데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가 줄줄 흘러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정도였다.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전후가 끊어져 아무 기억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올 때 알아보기나 할 것을.........’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일어서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깨끗해졌다.

원래 위가 약해서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해지곤 하였으니 음식의 양이 적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평소 잠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눈도 깜빡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맑았다. 그런 와중에 ‘3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

무문관은 알릴 사항이 있으면 쪽지에 적어 각 방에 밥과 함께 들여보냈다. 하루는 쪽지에 ‘내일은 해가 바뀌는 29일, 뜨거운 물이 나오니 목욕하세요.’ 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평소 몸이 차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하였던 스님은 그날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달력의 글씨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달력에는 ‘계룡산 갑사’라고 적혀 있었다.

‘아, 여기가 계룡산 갑사란 말인가. 어제와 오늘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구나.’

스님은 그때 환희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수행지침

계수스님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아 수행 정진하는 데 큰 힘이 되는 몇 가지 말씀들이 있다.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

이것은 1964년 무렵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세계불교 세미나가 열렸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수계할 때 전강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지혜 있는 도학자여! 계산을 잘 해라.’라는 말씀에도 큰 뜻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깨닫지 못하면 산송장이다.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

향곡 큰스님의 이 말씀 또한 스님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계수스님은 세 분의 큰스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을 늘 되새기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학들에게도 전하고 있다.

스님은 24세 되던 해 봄에 쌍계사에 경 찍으러 갔다가 주렴에 적힌 ‘삼라만상개오사(森羅萬象開悟事)’라는 글귀를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스승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우리는 수행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방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악연(惡緣)도 인연, 선연(善緣)도 인연입니다. 한때 어른스님들이 왜 저런 사람을 옆에 두고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모두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돈오를 주장하셨지만 저는 점수돈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 인행시를 돌아보면 감히 수행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턱없이 모자라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계수스님은 항상 기력이 없어서 서른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순을 넘긴 지금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부처님 인행과 용맹을 흉내 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며 오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늘 방일하지 말고, 혼자 있어도 대중에 있는 듯이 삼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속가 어머니와 은사스님의 가르침

계수스님은 강원에서 인과를 배울 때 한마디를 들으니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조부 밑에 인자하신 어머니가 계셨고, 무서운 노스님 밑에 자비하신 은사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은 어머니와 은사스님을 통해 이미 인과에 대해 배우고 깨달았던 것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5형제 중의 셋째이셨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큰 아들 노릇을 하여 다른 이들이 큰집이라 부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그런데 스님이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후 할아버지가 매우 엄하게 대하셨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돌아와 밥상을 뒤엎으며 어머니에게 욕을 하는 등 매우 모질게 대하며 재혼을 종용하였다. 스님은 할아버지에게 곤욕을 치르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밤새 울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

다음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장국을 끓여서 상을 차려 들고 할아버지 방문 앞에서 잘못했다며 사죄를 드렸다. 할아버지께 아침밥을 차려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간밤의 행동이 부끄러워 식사를 하러 나오지 못할까봐 그랬던 것이다.’라고 하셨다.

불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은사스님 또한 매우 훌륭하고 자비로운 분이셨다.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올 때 은사스님은 31세, 스님은 18세였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쌀 2가마니를 팔아 그 돈을 어린 스님에게 맡겼는데, 계수스님은 깜짝 놀라며 거절을 하였다.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알아서 쓰라며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평생 통장을 소유한 적이 없고, 직접 돈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셨다. 수중에 책값 몇 푼만 있으면 만족하는 분이셨다.

강원 시절 계수스님이 운문사에서 오면 은사스님은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교통비를 모자라게 주시곤 했다. 그럴 때면 스님은 탁발을 해야 했는데, 그런 생활이 고되어서 ‘나중에 크면 절대 탁발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

“저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거역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은사스님은 젊은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분이 아니어서 힘든 면이 많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더욱 강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효암 행자 시절,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께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도로에서 원효암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길을 짐까지 지고 올라다녔다. 나무하기, 밥하기 등 절집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딸이 일곱이나 되는 집안에서, 매우 완고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속가 시절보다는 모든 게 수월하게 느껴졌다.

후대스님들에 대한 당부

행자 시절에는 늘 잠이 모자라기 일쑤여서 저녁에 짐을 지러 도로에 내려가면 그때가 쉬는 시간이 되었다. 행자 여러 명이 서로 손을 잡고 깍지를 낀 채 내려가곤 하였는데, 한 사람만 깨어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졸면서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스님들이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바닥에 엉덩이만 닿으면 잠이 쏟아졌다. 해우소에 가서도 잿더미에 이마를 한 번 찧어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곤 하였다. 스님의 사형 중에는 스님보다 잠이 많았던 분이 있었는데, 나무를 하러 가면 꼭 ‘잠깐만’ 하고 앉아서 조는 것이었다. 그러면 옆에서 기다리다가 같이 잠이 들어 늘 어른스님께 혼이 나곤 하였다. 함께 행자 시절을 보낸 스님들 가운데 현재까지 계신 분은 당시 꼬마 사숙이었던 위봉사 주지스님뿐이라고 한다.

계수스님은 요즘의 선원 분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가 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공부하려는 수좌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안 시킬 만큼 선원에서 참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선원은 선을 하는 사람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총무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출가하면 8안거를 나야 한다고 하니 제도에 묶여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수좌들이 몰려와 선방 분위기를 다 버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선 시간에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음악 듣고, 온갖 즐길 것 다 즐기는데, 그러면 공부는 언제 하겠습니까. 스님들은 근기에 따라 공부해야 하는데, 기본교육 과정이라는 제도를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좌가 정진 못하면 산송장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은 어디를 갈 때 보따리는 싸서 택배로 부치고 몸은 가볍게 다닌다고 합니다. 수행자가 직접 바랑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입니다.”

계수스님은 젊은 시절 장래가 유망한 스님으로 주목을 받았고, 타고난 언변을 가졌다며 지도를 잘 받으면 훗날 좋은 강사가 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현재 스님은 천개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도량을 가꾸며 살고 있다. 상좌들이 돌아가면서 법당을 보며 3대가 조용히 지내고 있는 천개사는 누구라도 한 번 들어오면 결재하러 선방에 가는 일 외에 일체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한번은 상좌 한 명이 그런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음악회도 가고, 영화도 보고, 시내로 볼 일을 보러 다니기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계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삭발했으니 수행자가 아니냐. 그렇게 살자면 왜 수행의 길을 선택했느냐. 속인들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어찌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과연 무엇이 수행자의 길이냐.’하고 물었다. 상좌들은 아무 답변도 하지 못했고, 그 후부터는 스님의 지도를 잘 따르고 있다.

사람들에게 오신채 냄새가 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사람멀미를 하는 계수스님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 엽서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

스님은 인연이 되어 찾아오는 사람만 맞으며 ‘하루를 함부로 지우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는 것이 수행’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묵묵히 수행 정진 중이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스님 등이 있다.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계수(桂修)스님 본항목 계수스님(桂修, 1946~) 桂修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수스님(桂修,_194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계수(桂修)스님 백양사(白羊寺)문중 ~의 일원이다
계수(桂修)스님 법능(法能)스님 ~의 제자이다
계수(桂修)스님 용화사 ~에서 출가하다
계수(桂修)스님 전강(田岡)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계수(桂修)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계수(桂修)스님 대한불교조계종개혁회의 의원 ~을(를) 역임하다
계수(桂修)스님 비구니정혜도량 회장 ~을(를) 역임하다

참고자료

사찰

  • 천개사: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441



주석

  1.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하나의 모임을 이끌러 가는 큰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