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령군 이지(惠寧君 李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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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7년(태종 7)~1440년(세종 22) = 34세].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5왕자. 봉작(封爵)은 혜령군(惠寧君)이다. 자는 선여(善餘)이고, 호는 동계(桐溪)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안숙빈(安淑嬪)는 안의(安義)의 딸인데, 숙선옹주(淑善翁主), 안선빈(安善嬪)이라고도 한다. 안숙빈이 낳은 2남 2녀 중에서 맏아들인데, 익녕군(益寧君)이치(李*)의 동복형이다. 부인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증 찬성윤변(尹汴)의 딸인데,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짧은 생애

1429년(세종 11) 혜령군에 봉해졌다. 1430년(세종 12)에 1월 아침 조회(朝會)의 반열(班列)에 서 있다가 온녕군(溫寧君)이정(李䄇)과 함께, 신의군(愼宜君)이인(李仁)과 다투다가 종부시(宗簿寺)의 탄핵을 받았다. 6월 종학(宗學)에서 온녕군이정과 장난치다가 다투는 바람에, 종부시에서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세종이 황희(黃喜)와 맹사성(孟思誠)의 의견에 따라 그의 직첩과 구사(丘史)와 전토를 모두 거두고, 벼슬 없는 종친의 예에 따라서 취학하도록 하였다. 그해 윤9월 혜령군에 봉해졌다.

1438년(세종 20) 1월 상사(上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5월 명나라에서 하사하는 관복을 가지고 돌아오니, 세종이 그에게 전지 50결과 말과 안장을 내려 주었다. 1440년(세종 22) 6월 25일에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이 겨우 34세였다. 세종은 혜령군이지가 무더운 여름철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몹시 슬퍼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회(襄懷)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 243번지에 있는데, 부인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의 묘소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부인 무송 윤씨는 윤변의 딸인데,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예천정(醴泉正) 이수(李洙)이고, 장녀는 원맹수(元孟穟)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김수영(金壽寧)의 처가 되었다. 서출 1녀는 원보강(元甫岡)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朝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돈녕보첩(敦寧譜牒)』
  • 『무송 윤씨 족보(茂松尹氏族譜)』
  • 『원주 원씨 족보(原州元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