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斥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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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과 호란 당시 적국과의 화친을 배척하는 논의.

개설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적국과 맞서 싸우자는 주장인 주전론(主戰論)과 화친을 도모하자는 주장인 주화론(主和論)이 있어 왔다. 이때 주전론이 바로 척화론(斥和論)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자학(朱子學)을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학문으로 신봉하였으므로, 이민족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지배층이었던 관료와 선비들 사이에서 주자학의 명분론(名分論)과 의리론(義理論)에 입각한 척화론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즉 양란기(兩亂期)에는 각종 제도의 모순으로 국가의 전반적인 역량이 약화되어, 이러한 현실에서 전쟁을 고집하는 것은 국가의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다.

내용 및 특징

선조대의 왜란 당시에는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왜적을 막지 못하고 명(明)의 군대에 의지해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평양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본과 화의(和議)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유성룡(柳成龍) 등 일부 집권 남인(南人)이 당시 상황에서는 화의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이를 추진하자 이산해(李山海) 등 북인(北人)들이 척화를 주장하면서 유성룡 등을 비판하였다(『선조실록』 31년 9월 28일). 이것은 남인과 북인 사이에 정국 주도권 쟁탈전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다. 즉 주화·척화 논쟁이 당쟁과 결부되어 일어났던 것이다.

인조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정국을 주도하던 인조반정의 공신인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는데, 윤황(尹煌) 등이 그것은 항복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인조실록』 5년 2월 15일). 병자호란을 전후해서는 최명길이 주화론을 주도하였는데,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와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이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최명길을 비판하였다(『인조실록』 14년 11월 8일). 이때는 같은 서인 내에서도 주화론과 척화론으로 분열되어 갈등이 일어났는데, 인조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척화론을 추종하였다가 1637년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당하였다.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는 청(淸)나라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였고, 인조 역시 척화론을 비판하면서 윤황 등을 처벌하였다(『인조실록』 15년 2월 19일).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조야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척화론을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조선말까지 지속되었다.

변천

임진왜란과 호란 당시 척화론은 조선 왕조 국가의 현실과는 괴리된 측면이 많았다. 즉 척화론은 현실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주장이었다. 특히 호란 당시 주화론자였던 이귀·최명길 등이 인조대 대표적인 변법론자(變法論者)였다는 점이 주의를 요한다. 이들은 인조반정 초부터 제도의 변통(變通)과 경장(更張)을 통해서 국가 체제를 재정비해야만 국방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방향은 당시 지배층이었던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약화 내지 제거하고 대동(大同)과 균역(均役)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 개혁에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세력이 주자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을 내세우면서 척화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척화론은 양반과 지주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주장된 측면이 있었다. 현종·숙종대에 송시열(宋時烈)은 척화론의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배제하고 배타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서인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열되어 당쟁을 격화시켰다. 인조대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은 숙종대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는 연원이 되었으며, 영조·정조대 탕평론(蕩平論)과 반(反) 탕평론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사상적으로는 실학(實學)과 주자학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정조의 탕평책이 좌절되고 나서, 19세기에 김상헌의 후손인 안동김씨에 의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전개된 것은 조선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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