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典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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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에 소속된 정6품의 관직.

개설

전적(典籍)은 성균관에 소속된 정6품 관직으로,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주부(主簿)가 개칭된 관직이다. 전적은 성균관 유생의 교육을 전담하였을 뿐 아니라 종학(宗學)이나 사학(四學)의 교수 요원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주사(主事)가 겸직하였다.

담당 직무

전적은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원으로, 교육의 효과를 위해 1478년(성종 9)에는 전적에서 사성(司成)까지 차례대로 옮기도록 하여 그 임무를 오래 맡게 하고 외직에는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다(『성종실록』9년 2월 2일).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1430년(세종 12)부터는 종학의 관원을 겸직하며, 대군(大君)을 비롯한 종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6일). 직강(直講)과 함께 종학의 전훈(典訓)과 사회(司誨)를 겸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18일). 또한 사학의 교관으로 차출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성종실록』 8년 윤2월 25일).

전적은 본래의 역할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공궤(供饋)를 위한 미곡·어물·채소 등을 출납하던 양현고(養賢庫)의 주부를 겸하였다. 왕명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어 조운(漕運) 등을 감독하거나(『세조실록』14년 3월 7일), 안변에 파견되어 수령들의 불법을 적발하고 동시에 학교를 살펴보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4년 8월 17일). 국상 등 왕실 행사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며(『예종실록』 즉위년 9월 9일), 시관(試官)으로 차출되기도 하였고(『숙종실록』 3년 10월 21일), 윤대(輪對)에도 참석하였다(『성종실록』 2년 9월 18일).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이기에 그 자질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에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471년(성종 2) 5월 전적에 제수된 유양춘(柳陽春)의 행동이 경솔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개차(改差)되었고(『성종실록』2년 5월 23일), 1473년(성종 4) 2월에는 김흔(金訢)이 과거 급제 이후 문묘(文廟)를 배알할 때 문을 젖히고 마구 들어가 괴상한 행동을 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세종실록』 4년 2월 12일).

변천

1466년 관제 개혁 때 이전의 주부를 전적으로 개칭하였으며, 정원을 13명으로 하였다. 이때의 개정 내용이 이후 그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 12)에는 정원 중 6명을 감원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1월 6일). 한편 겸직하던 종학의 관직은 영조대 간행된『속대전(續大典)』때, 사학의 교관은 정조대 간행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전적은 이후 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과정에서 성균관의 성격이 변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적은 군국기무처의 주사가 겸하였다(『고종실록』 31년 7월 28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신석호, 「이조초기의 성균관의 정비와 그 실태」, 『대동문화연구』 6·7, 1970.
  • 이성무, 「선초의 성균관 연구」, 『역사학보』 35·3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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