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흠(李甫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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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7년(태조 6)~1457년(세조 3) = 61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박사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순흥부사(順興府使) 등을 지냈다.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대전(大田)이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이현보(李玄寶)이고,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보승랑장(保勝郞將)장표(張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석지(李釋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흡(李洽)이다. 단종(端宗) 복위를 계획하였다는 혐의로 유배된 후 교살되었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유방선(柳方善)에게 학문을 익힌 이보흠은 1429년(세종 1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뒤[『방목(榜目)』], 이듬해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10일) 1434년(세종 16)에는 사정(司正)으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으며,(『세종실록』16년 6월 29일) 다음해 4월에는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편찬을 완료하여 세종에서 바쳤다.(『세종실록』17년 4월 5일)

1443년(세종 25)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방물수목(方物數目)을 잘못 적어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교부한 죄로 파직되었다가,(『세종실록』 25년 4월 15일) 다시 성균관(成均館) 주부(注簿)가 되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5년 11월 3일),(『세종실록』 28년 7월 2일) 1444년(세종 26) 1월 병조에서 부사직이보흠을 사직(司直)으로 승급 제수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인사였다. 이를 깨달은 병조에서 이를 바로잡으려 했는데 이보흠이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미리 임금에게 사은은 행하였고, 이로 인하여 탄핵을 받은 후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월 6일) 함양군지사(咸陽郡知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그는 1448년(세종 30)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대구군지사(大丘郡知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세종실록』 30년 1월 25일),(『세종실록』 30년 5월 15일),(『세종실록』 30년 6월 1일)

한편 문종(文宗)이 즉위한 후에는 1자급 승진을 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문종실록』 즉위년 9월 18일),(『문종실록』 즉위년 12월 24일) 대구지역에서 사창제의 효과적인 시행 결과를 내보인 이보흠은 공로를 인정받아 1452년(문종 2)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3일) 그는 장령으로 재직하며 지속적으로 사창의 장점에 대해 임금에게 보고하고,(『문종실록』 2년 3월 17일)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금과 은의 사용 금지법을 제청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2년 3월 20일)

단종~세조 시대 활동

1454년(단종 2) 직예문관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편수의 기주관(記注官)으로 활동한 이보흠은 세조 즉위 이후 1457년(세조 3) 순흥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당시 순흥에는 세조의 동생이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유배를 와 있었다. 이에 평소 세조의 왕위찬탈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이보흠은 금성대군 및 영남 사인들을 규합하여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어 박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0월에 교살(絞殺)되었으니,(『세조실록』 3년 10월 27일)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세조실록』에서는 이보흠이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한 것이 아니라 금성대군의 협박과 뇌물공세에 못 이겨 거사에 참여하였고,(『세조실록』3년 10월 9일) 결국에는 변절자가 되어 세조의 편에 서서 이 사건을 고변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세조실록』 3년 7월 3일) 이 같은 측면에서의 서술은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찾아볼 수 있으며, 숙종 대 순흥부의 복설에 대한 문제가 공론화되었을 때 당시 순흥에 살던 이정식(李廷植)이 올린 상소에서도 동일한 시각의 서술이 보인다.(『숙종실록』 8년 1월 13일) 그러나 정조 대에 이르게 되면 이보흠에 대한 다른 언급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러한 평가는 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하여 1791년(정조 15) 장릉에 배향할 충신을 선정할 때 이보흠은 정단(正壇)에 배식되는 충신 32인에 들어가게 된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이후 이보흠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해동야언(海東野諺)』, 『장릉지(莊陵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대전실기(大田實記)』등 18세기 이후 작성된 문헌들에서는 이전의 공적 기록들과는 다른 이보흠의 충신열사적 측면에서의 서술이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1738년(영조 14) 사면되어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1791년 충장(忠莊)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성품과 일화

이보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박사에 제수되자 그의 스승이었던 유방선은 그의 학문을 칭찬하며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을 기대하였다.[『이대전유사(李大田遺事)』]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도 뛰어나 길재의 묘제문(墓祭文)을 지었으며,[『국조인물고』] 김종직은 “이보흠은 글을 잘 지었으며, 성품은 검소하여 비록 해진 옷을 입고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을 남겼다.[『이존록(彛尊錄)』]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모심에 부족함이 없었고, 아우인 이보관(李甫款)과도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였다고 한다.[『이대전유사』]

기록에 따르면, 순흥부 관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죽은 지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보흠이 순흥부에 부임하자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 울창해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보흠의 사건도 있고 순흥부도 혁파되었다. 이보다 앞서 집현전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흰 까치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1453년 계유년 즈음 이 버드나무가 모두 시들어 버렸고, 집현전도 혁파되었다. 식자(識者)들은 이 두 경우 모두 절의에 감응한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이대전유사』]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죽곡리 단애곡(丹厓谷)에 있다. 이보흠의 묘소 아래 묘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에 이보흠의 행적을 적은 이대전유허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호)와 집터에 판 연못인 순흥연(順興淵)이 있다.

부인 영천 최씨(永川崔氏)는 1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통덕랑(通德郞)이간인(李盰仁)이고, 1녀는 최자척(崔自滌)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장릉지(莊陵誌)』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해동야언(海東野諺)』
  • 이영호, 「端宗朝 烈士 李甫欽의 삶과 그 기록의 의미」,『한국어문학연구』48, 2007
  • http://yeong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100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