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암사(仰庵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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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던 사찰.

개설

앙암사(仰庵寺)는 고려 태조왕건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어 조선초기까지 존재하였다. 조선 태조가 왕건을 기리는 사당으로 바꾸었다. 이후 고려의 8왕을 봉안하였고, 다시 4왕으로 축소하였다. 고려의 충신 16명을 추가로 배향하여 지금까지 고려 왕조를 추모하는 유일한 사당의 기능을 하고 있다.

내용 및 변천

고려 태조왕건의 원찰로 창건되었는데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후기의 문신 이인로(李仁老)가 「앙암사」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詩)가 전한다.

조선시대 들어 1397년(태조 6) 이곳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태조이성계는 고려 왕족들을 몰살시켰지만 1395년(태조 4)에는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여 고혼을 달래고자 하였다(『태조실록』 4년 2월 24일). 2년 후에는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을 배향(配享)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는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을 제사하는데 고려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만을 배향하도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숭의전(崇義殿)이라 이름 짓고 4왕과 더불어 고려의 충신 16명(지겸, 홍유, 신숭겸, 유검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배향하였다. 이 무렵부터 절은 완전히 사당으로 변화하였다.

1452년(문종 2)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씨 제사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문종실록』 2년 3월 18일). 먼저 1449년(세종 31)부터 퇴락한 사당을 수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완성되지 않았으니 서둘러 진행하도록 하였다. 매년 봄·가을 제사 때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리고 관원을 보내도록 하였다. 사당을 지키는 노복(奴僕)을 6호(戶) 추가하였고, 제사를 맡은 후손 왕우지(王牛知)에게 관직을 주고 매월 월봉을 주도록 하였다. 왕우지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으로 공주(公州)에 살고 있었는데 수소문 끝에 데리고 와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까지 하사하였다. 또한 사당 인근의 비옥한 토지 10결과 살 집을 주고, 경작에 필요한 소와 농기구를 지원하였다. 아울러 사당이 있는 마전현(麻田縣)을 군(郡)으로 승격하고 명망 있는 관리를 파견하여 사당을 유지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지원과 관리를 법으로 제정하였다.

숭의전은 이후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5차례에 걸쳐 중건을 거듭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되었다. 1971년 재건하여 사적 제223호로 지정하였다.

현재는 숭의전과 배신청(陪臣廳), 이안청(移安廳), 전사청(典祀廳), 앙암재(仰巖齋) 등 5동의 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 『동문선(東文選)』
  • 이종일, 『대전회통 연구 3 : 호전·예전편 』, 한국법제연구원, 1999.
  • 김인호, 「조선전기 숭의전의 설치와 역사인식」, 『사학연구』78, 한국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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