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朴鎭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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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3년(인조 11)~1692년(숙종 18) = 60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문신.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를 지냈다. 자는 정경(定卿)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박계영(朴啓榮)이며, 어머니 유씨(柳氏)는 유명남(柳命男)의 딸이다.

숙종 시대 활동

박진규는 통덕랑(通德郞)으로서 1674년(숙종 즉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76년(숙종 2) 9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1677년(숙종 3) 7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78년(숙종 4) 1월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고, 6월에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7월에 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 해 9월에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염찰(廉察)하였다. 그 해 10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고 11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2월에 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79년(숙종 5) 6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고, 8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고, 11월에 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680년(숙종 6) 1월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고, 2월에 다시 집의가 되었다가 3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언관직에 거듭 임명되면서 효종에 대한 예론(禮論)을 그르친 것으로 처분된 송시열(宋時烈)의 죄상을 종묘에 고하자고 대사간(大司諫)이원정(李元禎)과 함께 주장하는 등, 남인(南人)의 입장에서 활동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대사간민암(閔黯)과 함께 사간에서 체차된 뒤 관직에 오르지 못하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몰락하고 남인이 등용될 때인 그 해 2월에 사헌부 집의로 복귀되었다가 같은 달에 특별히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다. 그 해 5월에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고, 그 해 10월에 또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그는 이때 율곡이이(李珥)와 우계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서 출향한 것을 비난하는 서인(西人) 유생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90년(숙종 16) 6월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가 1691년(숙종 17) 11월에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후손

첫째 부인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강휘행(姜徽行)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계(李偰)의 딸이다. 자녀는 1녀를 두었는데, 심득현(沈得賢)의 처가 되었다. 동생 박신규(朴信圭)의 아들 박행의(朴行義)가 그의 양자가 되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