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속면역(納粟免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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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을 납부한 사람에게 각종 국역을 면제하던 일.

개설

조선시대에 양반을 제외한 향리·군사·무과 출신·공사천(公私賤) 등은 각종 신역(身役)을 지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궁핍한 재정 상황에서 이들의 납속(納贖)을 권장하여 재정을 보충하는 데 활용하고자 하였다. 향역(鄕役)을 지는 향리나 무과 합격 후 변방에 파견되어 복무해야 하는 무과 급제자들은 납속을 통해 역을 면제받았다. 군정(軍丁)의 경우 면역이 어려웠지만, 관례적으로 납속하여 군역을 면제받는 길이 있었다. 공·사천도 납속을 통한 면역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납속면역의 주 대상은 양인 신분층이었다. 납속으로 면역한 자들은 납속을 거듭하여 관직을 얻거나, 향촌사회에서 향임(鄕任) 등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납속면역의 주 대상은 각종 신역을 지고 있는 신분층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초기에 제정된 「경기(京畿)·황해도(黃海道) 조도어사(調度御史) 별사목(別事目)」에서는 향리·유역인·공사천을 납속면역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정부는 그들에게 곡식을 바치게 하고 5년·10년 혹은 평생 동안 역을 면제해 주거나 속량(贖良)해 주었다(『선조실록』 25년 12월 29일). 이외에도 과거에 합격하면 변방에 나가 부방(赴防)하도록 되어 있는 무과 출신자도 곡식을 내고 부방을 면제받았으며, 승려·거사(居士)가 환속하여 납속하면 종신토록 군역을 면제받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납속면역의 정책은 신분에 따라 부과된 신역을 면제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납속면역의 주 대상은 역시 군역을 지는 양민층이었다. 당시 양역의 폐단은 후기로 갈수록 심화되었으므로, 양민들은 역을 피하기 위한 각종 방법을 모색하였다. 정부는 이들의 역 부담을 덜어 주면서 부족한 재정을 보전하고자 각종 공명첩·면역첩을 발매하였다(『인조실록』 7년 4월 11일). 양민이 납속을 통해 면역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곡식을 납부하거나 면역첩을 구입하여 바로 군역·연호잡역(煙戶雜役)을 면제받는 방법이 있었다. 또 하나는 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각종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을 구입하여 면역하는 것이었다.

양민들의 각종 공명첩 구입도 면역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먼저 노직첩은 60세 이상인 사람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나이를 속이고 직첩을 구입하여 면역하는 경우도 있었다. 1682년(숙종 8)에는 50세 이상인 사람에게 쌀 6석(石)을 받고 노직첩을 지급하여 면역케 하였다. 또한 영직첩(影職帖)을 구입한 경우에도 군역을 면제해 주었다.

가설실직첩(加設實職帖)을 구입한 경우에도 군역이 면제되었다. 1690년(숙종 16)에 제정된 「모속별단(募粟別單)」을 보면 40세 이상이면 가설실직첩을 구입할 수 있고, 가설직을 가진 자는 관례적으로 역을 담당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40세 이상의 양민이 납속하여 가설직을 받으면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변천

조선 정부는 공명첩 구입자가 역을 면제받는 문제에 대해, 군정(軍丁) 확보 차원에서 공명첩의 품직에 따라 군역에 재배정하거나 별도로 포상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납속을 받은 사람들의 원망과 정부의 신의 상실을 이유로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이와 같이 납속면역은 각종 신역을 지고 있는 향리·양민 등이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역을 피하고, 신분 변동을 도모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서한교, 「17·8세기 납속책의 실시와 그 성과」, 『역사교육논집』 15, 1990.
  • 서한교, 「조선 현종·숙종대의 납속 제도와 그 기능」, 『대구사학』 45, 1993.
  • 정만조, 「조선 후기의 양역 변통 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 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 차문섭, 「임란 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 『사학연구』 10·11, 1961.
  •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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