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저(建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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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계승할 왕세자, 혹은 원자 및 세제의 책봉을 포괄하는 말.

개설

조선은 유교 정치를 표방하였으나, 개국 초의 정치적 사정으로 인하여 적장자 계승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세종대에 의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종법(宗法)의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라 세자 책봉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왕세자를 책봉하는 의례도 정비되어 갔다. 이후 반정(反正)과 같은 정변으로 즉위한 왕이 세자를 거치지 않는 예외도 있었으나, 세종대에 정비한 오례의 기준에 따라 책봉의례가 이루어졌다.

연원 및 변천

왕위를 적장자가 계승하는 원칙은 삼국시대에 이미 나타났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왕 기사에 태조왕의 동생인 수성(遂成)이 ‘반드시 적자가 이어야 한다[承襲必嫡]’라고 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원칙이 당시에는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적장자 우선 원칙이 있었으나, 실제 정치 무대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종법의 원칙이 더욱 중시되었고, 왕실뿐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가계 계승에 이르기까지 적장자 계승 원칙은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렸다. 그렇지만 왕위 계승에서 적장자를 우선한다는 원칙은 다양한 정치적 사건과 후사(後嗣) 없음 등의 문제로 인하여 원칙대로 시행되기가 쉽지 않았다.

건저는 정치 상황과 결부되어 무력 분쟁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세자 책봉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른바 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에 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발생한 2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었다. 이들 사건은 건국 직후 왕권이 확고하지 못하였던 과도기에 세자 책봉 원칙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16세기 후반에 붕당이 발생해 당쟁이 전개되면서, 건저의 문제는 매우 첨예한 사안으로 부상하였다. 1591년(선조 24)에 서인(西人) 정철이 제기한 세자 책봉 건의는 당쟁화되어 동인(東人)이 재집권하고 서인이 실각하는 주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건저의(建儲議)사건으로, 조선전기에 건저문제로 야기된 숱한 정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도 건저문제는 언제나 정국의 핵심 사안이었으며, 그로 인한 정쟁이 꼬리를 물었다. 건저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에 세자의 장남을 세손(世孫)으로 삼아야 한다는 신료들과 소현세자의 아우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 사이에 벌어진 알력, 숙종의 재위 말기와 세종 대에 걸쳐 처절하게 전개된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건저 과정에서 벌어진 정쟁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후사 없이 왕이 승하할 경우에는 대개 왕실의 최고 서열인 대비(大妃)가 왕실 자제 중에서 새로운 왕을 지목하곤 하였다. 성종·선조·고종가 대표적이다.

절차 및 내용

대신들이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고 왕에게 요청하는 것이 건저였다. 결정된 왕세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선왕이 붕어한 직후에 즉위하였다. 건저는 대신들이 왕세자의 책봉을 왕에게 요청하고 왕이 이를 공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왕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을 통하여 왕위계승권자가 결정되었다고 만천하에 공표하면, 책봉된 세자는 왕비와 태상왕에게 조현(朝見)하였다. 이어서 종묘에 가서 선왕을 알현하는 의식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인정전에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책문을 내리고 나라 안팎에 관련 사실을 알리는 교서를 반포함으로써 건저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참고문헌

  • 『대학연의(大學衍義)』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국왕의 일생』, 글항아리, 2009.
  •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신명호 등,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
  • 김돈, 「세조대 단종복위운동과 왕위승계문제」, 『역사교육』 9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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